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은 인류의 희망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흔들리는 시대를 살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희망 없이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 희망은 사람이 만든 낙관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에서 오는 확실한 약속입니다. “하늘과 땅은 없어지겠지만 내 말은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마 24,35).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 18.20)
오늘 '하느님의 희망'이신 예수님 말씀은 '또 다른 희망'을 낳으며, 넘어지는 이를 일으키고, 죄인을 새 길에 세우며, 상한 마음 안에 미래를 엽니다. 이제 그분 앞에 우리의 현실을 펼칩시다.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희망의 불씨를 다시 지펴 주실 것입니다.
1. “발자국”의 비밀: 한 수도사가 세상을 떠나 예수님 앞에 섰습니다. 자신의 일생이 파노라마처럼 들여다보입니다. 기억할만한 길 위엔 발자국이 두 쌍이었습니다. 수사님이 “왜 두 사람의 발자국입니까?” 물으니, 예수님께서 “내가 늘 함께 걸었기 때문이지”이라고 말해주십니다.
그런데 험한 길목—병고, 배신, 실패, 죄책—에서는 발자국이 한 쌍뿐이었습니다. 실망한 표정이 역력한 수사님이 물었습니다. “주님, 저렇게 힘들 때는 왜 제 곁에 안 계셨습니까?” 그러자 주님이 대답하십니다. “그때 나는 너를 업고 걸었단다.”
우리는 종종 세상에 혼자 내던져진 듯 느낍니다. 아무도 나를 맞아주지 않는 것 같고, 걱정해 주는 이도 없는 듯 어둠이 길게 드리웁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말합니다. 신앙생활은 ‘하느님과의 인격적 만남’이며, 그 만남은 특히 내가 약할 때 더 선명해진다고. 주님은 고비마다 우리를 업어주셨습니다.
2. 희망은 실제로 생명을 붙듭니다 — 리히터의 쥐 실험
‘희망 쥐 실험’은 1950년대 존스홉킨스 대학의 커트 리히터(Curt Richter)가 수행한 유명한 실험으로, 희망이 생명체의 생존력에 미치는 영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전해집니다.
실험 방법
• 쥐들을 낯선 물이 담긴 유리 플라스크에 넣었을 때 처음 실험에서는 대부분의 쥐들이 약 10분에서 15분 만에 포기하고 익사했다.
• 하지만 쥐가 물에 빠져 힘겹게 버티다 건져내어 휴식을 취하게 한 다음, 다시 물에 넣으면, 이전과 달리 쥐들은 무려 최소 240배나 되는 60시간까지 버티는 놀라운 결과를 보였다.
• 한 번 ‘구조되었던’ 경험, 즉 ‘희망’이 주어진 쥐들은 쉽게 포기하지 않고 훨씬 더 오랫동안 생존했다.
• 이 희망 실험은 ‘한 번이라도 구조되었던 쥐들이 다시 위기에 처했을 때’ 절망하지 않고 끝까지 생존하려는 의지를 지속시켰다는 점에서, 희망이 동물의 생존 본능과 의지에 강력한 영향을 미침을 보여준다.
• 절망과 희망은 물리적 조건 이상으로 생명력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심리적 요인임을 잘 보여주는 실험이다.
3. 성경의 메시지 — 희망은 믿음의 열매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로마 5,5) 성경은 희망을 단순 낙관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신뢰의 열매라 증언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이사 41,10) 희망은 “잘 될 거야”라는 자기 암시가 아니라, 끝까지 우리를 붙드시는 하느님에 대한 신뢰에서 솟아나는 힘입니다.
4. 교회의 지혜 — 은총과 자유의지, 그리고 희망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없이’ 창조하셨으나, 우리의 협력 ‘없이’ 구원하지 않으신다.” 은총(하느님의 붙드심)과 자유(우리의 응답)가 만나는 자리에 희망이 서 있습니다. 초대 교회의 성인들은 박해와 순교의 문턱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희망은 “죽음 너머의 천국”만이 아니라 ‘지금-여기’에서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의 확신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쓰러져도 다시 일어섰고, 무너져도 다시 노래했습니다.
“이미 건져 올리신 분”을 기억하십시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도 깊은 물속 같은 때가 있습니다.
• 병상에서 지쳐 떨릴 때,
• 관계가 끊어져 홀로 남을 때,
• 죄책 앞에 고개를 들 수 없을 때,
• 더는 버틸 힘이 남지 않았다고 느낄 때.
바로 그때,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은 이미 나를 건져 올리신 분이시다.”
세례에서—나는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고해성사에서—나는 넘어짐의 자리에서 다시 일으킴을 받았습니다.
성체성사에서—나는 그분의 몸을 모시며 ‘나 홀로가 아님’을 맛보았습니다.
이 구원의 기억은 리히터의 관찰처럼 우리 내면의 지속력 회로를 다시 켭니다. 한 번 업혀 본 이가 다시 걸을 수 있듯, 한 번 구원받은 기억은 다시 버틸 힘을 줍니다. 그래서 교회는 주기적으로 ‘기억(Anamnesis)’을 살리는 전례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기억된 은총이 지금의 희망이 되고, 그 희망이 내일의 용기가 됩니다.
작게는 오늘 한 통의 전화, 한 줄의 메시지, 미사에 드리는 한 번의 발걸음이 절망의 조건화를 희망의 조건화로 바꿉니다. “나는 또다시 구원받을 수 있다.” 이 믿음이 마음과 몸에 포기하지 않는 지구력을 만들어 냅니다.
혼자라고 느껴질 때가 은총의 시간
오늘 우리가 깨달은 것은 분명합니다.
• 희망은 생명을 연장시키는 실제적 힘이다.
•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부활하신 주님이 끝까지 나를 붙드신다는 확신입니다.
• 길 위에 발자국이 하나뿐이라고 느껴질 때, 그때가 바로 주님이 나를 업으신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희망을 놓지 마십시오.여러분의 삶과 가정과 공동체와 이 교회를 끝까지 살려낼 힘이 바로 그 희망 안에 있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여러분을 업고 걸으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