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단지

어둠 속의 고철, 빛의 걸작이 되다

by 진동길


형제자매 여러분, 한 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오늘은 서울 테헤란로, 포스코 센터 앞에 서 있는 거대한 조형물 이야기로 강론의 문을 열어볼까 합니다. 아마 보신 분들도 계실 텐데요, 높이가 9미터나 되고 무게가 30톤에 달하는 엄청난 쇳덩어리, 바로 프랭크 스텔라의 ‘아마벨(Amabel)’입니다.


1997년 이 작품이 처음 설치되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매끈하고 아름다운 동상이 아니라, 마치 비행기가 추락해서 처참하게 구겨진 잔해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스테인리스 스틸들이 찌그러지고 뭉쳐 있는 그 기괴한 모습을 보고, 지나가던 택시 기사님들은 “아니, 건물을 저렇게 멋지게 지어놓고 왜 공사장에 쓰다 버린 폐기물을 아직도 안 치우고 있나?” 하며 혀를 찼다고 합니다.


심지어 웃지 못할 실화도 전해집니다. 지나가던 고물상 트럭 아저씨가 차를 세우더니 경비원에게 진지하게 물었답니다. “저 고철 덩어리, 꽤 돈이 될 것 같은데 내가 가져가도 되겠소?” 그분 눈에는 그것이 그저 ‘녹여서 팔면 돈 되는 고물’로 보였던 것입니다. 시민들은 “흉물이다, 철거해라”라며 민원을 넣었고, 실제로 철거 논의가 오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던 그 ‘고철 덩어리’의 진실을 아십니까? 그것은 현대 미술의 거장이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난 친구의 딸 ‘아마벨’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걸작입니다. 차갑고 날카로운 금속을 구기고 뭉쳐서, 슬픔을 승화시킨 ‘강철의 꽃’을 피워낸 것이지요. 작가의 눈에 그 찌그러진 쇳덩어리는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도 아름다운 꽃이었습니다.


보는 눈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처리해야 할 폐기물’이었지만, 그 가치를 아는 작가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사랑스러운 명작’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전례 말씀 안에서, 바로 이 ‘아마벨’과 똑같은 처지에 놓인 한 장소를 발견합니다. 바로 제1독서 이사야서에 나오는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즉 ‘갈릴래아’입니다.


당시 유다인들의 시선으로 볼 때, 갈릴래아는 포스코 앞의 고철 덩어리 같은 곳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이민족들이 섞여 산다는 이유로 ‘이방인의 갈릴래아’라 불리며 멸시받았습니다. 예루살렘의 엘리트들이 보기에 그곳은 영적으로 찌그러지고 망가진 땅, 거룩한 것이라고는 도무지 나올 수 없는 ‘신앙의 불모지’였습니다. 마치 고물상 주인이 “저거 가져다 어디에 쓰겠나” 하고 쳐다보듯, 사람들은 갈릴래아를 어둠 속에 버려진 땅 취급을 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시선은 달랐습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그 버려진 땅을 향해 놀라운 선언을 합니다.


“옛날에는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이 천대를 받았으나...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 (이사 8,23-9,1)


세상은 그곳을 ‘어둠의 땅’이라 불렀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곳을 ‘가장 큰 빛이 시작될 장소’로 점지하셨습니다. 프랭크 스텔라가 찌그러진 고철로 꽃을 피웠듯, 하느님께서는 멸시받던 갈릴래아를 당신 구원 사업의 ‘베이스캠프’이자 가장 아름다운 ‘복음의 발원지’로 삼으신 것입니다.




이 ‘반전의 역사’는 오늘 복음(마태 4,12-23)에서도 계속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화려한 예루살렘이 아니라, 천대받던 ‘카파르나움’에 자리를 잡으시고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당신의 제자들을 뽑으십니다.


예수님이 선택하신 시몬 베드로, 안드레아, 야고보, 요한을 봅시다. 그들은 갈릴래아 호수에서 그물질하던 어부들이었습니다. 당시 사회적 기준으로 그들은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도 아니요, 그저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투박한 인생들이었습니다. 율법 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이 볼 때, 그들은 무식하고 거친 ‘인생의 고철’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저런 뱃사람들이 무슨 하느님의 일을 하겠어? 생선 비린내나 풍길 줄 알지.”


세상의 눈은 그들을 고물상 트럭에 실어 보내려 했지만, 예수님의 눈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그 찌그러진 쇳덩어리 같은 어부들의 내면에서 ‘아마벨’을 보셨습니다.


비린내 나는 시몬의 손에서 교회의 반석을 보셨고, 성격 급한 야고보와 요한에게서 복음을 위해 목숨을 바칠 뜨거운 열정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에게 다가가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이 말씀은 곧 “너희는 세상이 말하는 고철이 아니다. 내 손에 맡겨지면, 너희는 세상을 구원할 명작이 될 것이다.”라는 예술가의 선언이었습니다.




나의 시선은 어디를 향하는가?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하느님께서는 이사야의 예언과 예수님의 부르심을 통해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는 지금, 네 이웃과 너 자신을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느냐?”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사람을 마주합니다. 그런데 혹시 우리도 ‘고물상 트럭 아저씨’의 눈으로 그들을 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남편, 내 아내의 찌그러진 성격을 보고 “구제 불능이야”라고 단정 짓지는 않습니까?

성적이 나쁜 자녀, 혹은 취업에 실패한 자녀를 보고 “싹수가 노랗다”며 흉물 취급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 본당의 까칠한 교우를 보며 “저 사람은 우리 공동체의 폐기물이야”라고 쳐내고 싶어 하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타인을 판단하고 단죄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을 ‘쓰다 버린 고철’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찌그러진 쇳덩어리 같은 우리 이웃의 내면에서 기어코 ‘아마벨’을 찾아내십니다. “지금은 비록 상처받아 구겨져 있지만, 내 사랑의 빛을 비추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 될 영혼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시선입니다.


이 시선은 무엇보다, 우리 자신에게도 필요합니다.

살다 보면 실패하고, 죄짓고, 늙고 병든 자신의 모습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나 같은 게 뭘 할 수 있겠어. 나는 이제 쓸모없는 뒷방 늙은이야. 나는 실패한 인생이야.” 스스로를 어둠 속의 즈불룬 땅처럼 여기며 자책할 때가 있지요.


그때 포스코 앞의 그 조형물을 떠올리십시오. 세상 사람 모두가 흉물이라고 손가락질해도, 그것을 만든 작가는 “아니다. 이것은 내 사랑하는 아마벨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를 만드신 하느님께서도 똑같이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너를 늙었다고, 가난하다고, 실패했다고 무시하느냐? 내 눈에는 네가 가장 값비싼 작품이다. 너는 어둠 속에 있지만, 내가 너를 큰 빛으로 만들겠다.”




그물을 버리고 빛을 따르십시오

오늘 복음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고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들이 버린 ‘그물’은 단순히 물고기 잡는 도구가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을, 그리고 자기 자신을 ‘고철’로만 바라보던 ‘낡은 시선’입니다.


“나는 평생 고기나 잡다 죽을 팔자야”라고 스스로를 가두던 **‘어둠의 감옥’**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가치를 알아봐 준 진정한 예술가를 만났기에, 과거의 낡은 시선을 미련 없이 던져버릴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느님의 말씀 주일을 맞아 하느님의 시선으로 세상과 이웃을 바라봅시다.

어둡고 멸시받던 즈불룬과 납탈리 땅에 큰 빛이 비치었듯이,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 그리고 여러분의 지친 마음속에도 주님의 빛이 들이닥치기를 바랍니다.


비행기 잔해 같은 고철도 거장의 손을 거치면 20억 원짜리 ‘꽃’이 됩니다. 하물며 하느님의 숨결이 담긴 우리 영혼은 얼마나 더 귀하고 아름답겠습니까?


이번 한 주간, 내 주변에 있는 찌그러진 고철 덩어리들 속에서 ‘아마벨’을 찾아내는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주님, 저희 눈을 열어주시어 세상이 흉물이라 부르는 것들 속에서 당신의 걸작을 발견하게 하소서. 아멘.”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