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장남의 탄생
윤 씨가 기백이를 낳던 때는, 혼례를 치른 뒤 열 달 남짓이 지난 이듬해 가을이었다.
해원천 물길은 뱀처럼 굽이치며 들판을 감고, 메밀꽃은 하얀 숨을 내뿜듯 낮은 바람에 흔들렸다. 들녘의 빛은 한껏 맑았으나, 해원장 안쪽의 공기는 늘 눅눅하고 차가웠다. 윤 씨에게 그 집은 넓은 집이 아니라, 넓게 벌어진 감옥이었다.
산기가 시작된 것은 밤 열한 시께였다.
윤 씨는 이불 끝을 움켜쥐고 이를 악문 채 신음을 삼켰다. 고통은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물러갔다. 멀어지나 싶으면 다시 가까워지는, 피할 수 없는 리듬이었다. 옆방에서는 최태국이 코를 골았다. 술 기운이 벽을 타고 넘어와 방 안에 눅진하게 들러붙었다. 그는 잠든 것이 아니라, 윤 씨의 존재 자체를 저녁의 안주처럼 취급한 채 아무렇지 않게 누워 있는 것이었다.
윤 씨는 그를 깨우지 않았다.
깨워 보았자 돌아올 것은 짜증 섞인 눈짓과 “여자 일은 여자가 하는 기라”는 한 마디뿐임을, 그는 이미 수없이 보여주었다. 짐승조차 새끼를 낳을 때는 숨을 고르는데, 이 집의 남자는 그보다 더 차가웠다.
“마, 마님…”
문틈으로 하녀 막돌이 어멈이 눈을 비비며 들어왔다. 촛불 아래 윤 씨의 얼굴을 본 순간, 여자는 숨을 들이켰다.
“아이고메… 마님! 이거 큰일 났습니더!”
“산파… 산파 불러 와라. 빨리…”
윤 씨의 목소리는 얇게 떨렸지만, 그 안쪽에는 끊어지지 않는 의지가 있었다. 막돌이 어멈은 고무신을 질질 끌며 뛰어나갔다. 뒤란을 지나 마을 어귀로 향하는 발소리 위로, 어둠 속 개 짖는 소리가 날카롭게 번졌다.
윤 씨는 홀로 남았다.
진통이 밀려올 때마다 방 안의 공기가 좁아졌다. 숨이 턱에 걸리고, 세상이 한 번씩 기울어졌다. 창밖에는 달이 떠 있었다. 둥글고도 차가운 달. 윤 씨는 순간 생각했다. 저 달은 수많은 밤을 내려다보았을 텐데, 여자가 몸을 찢어 생명을 내어놓는 이 밤도 그저 흰빛으로만 비출 뿐이겠지.
뒤란 감나무가 떠올랐다.
가을이면 홍시가 주렁주렁 달리던 그 나무는, 윤 씨에게 유난히 친정의 감나무를 닮아 있었다. 화림리에서도 어머니는 가을이면 홍시를 따서 말렸고, 그 달고 눅진한 냄새가 부엌에 오래 머물렀다. 윤 씨는 혀끝에 감의 단맛이 남은 듯한 착각에 잠깐 숨을 고르다가, 다시 찾아온 통증에 눈을 질끈 감았다.
‘어머니, 저 아이 낳습니더. 혼자서라도 낳아 보겄습니더.’
기도인지, 다짐인지 모를 말이 가슴속에서 솟았다. 그리고 곧바로 진통이 더 깊게 몸을 훑었다. 윤 씨는 비명을 삼켰다. 입술을 깨물었다. 피 맛이 혀에 번졌다.
산파 박 씨가 도착한 것은 한 시간쯤 뒤였다.
오십 줄의 억센 여자. 손등엔 시간의 주름이 굵게 박혀 있었으나 손놀림은 놀랍도록 정확했다. 그녀는 윤 씨의 배를 짚고, 맥을 재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아, 마님. 아직 멀었심더. 힘 빼이소. 힘 빼야 애기가 나온다 아입니꺼.”
그 말은 위로이면서 명령이었다. 윤 씨는 그 말에 매달리듯 숨을 길게 뽑아냈다.
“건강한 아기입니더. 걱정 마이소.”
그러나 밤은 길었다.
윤 씨의 몸은 땀으로 젖었고, 이불은 젖은 짐승 가죽처럼 축축해졌다. 통증은 자비가 없었다. 윤 씨는 몇 번이나 속으로 생각했다. ‘이대로 죽는가.’ 아이와 함께. 그 생각이 스치면, 몸 안 어디선가 다시 힘이 끓어올랐다. 죽을 수 없었다. 죽으면, 이 집은 아이에게 지옥을 고스란히 물려줄 것이다.
‘… 제발… 이 아이만은…’
동이 트기 직전, 하늘이 희끄무레하게 풀릴 때였다.
닭이 울었고, 산파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자아! 지금이다! 힘 주이소! 마지막이라!”
윤 씨의 목에서 짐승 같은 소리가 터졌다.
그 소리는 부끄러움이 아니라 생존이었다. 윤 씨는 남은 모든 힘을 아래로 밀어냈다. 몸이 찢어지는 듯했고, 뼈가 부서지는 듯했으며, 눈앞이 하얘졌다.
그리고—
“응애—! 응애—!”
가늘지만 또렷한 울음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 울음은 칼처럼 공기를 가르더니, 곧 따뜻한 물처럼 방 안을 적셨다.
“아드님입니더! 옥동자라예!”
산파의 목소리가 환해졌다.
윤 씨는 천장을 바라봤다. 눈물이 저절로 흘렀다. 기쁨이라 말하기엔 너무 처절한 눈물이었고, 살아남았다는 안도라 말하기엔 너무 뜨거운 눈물이었지만, 분명히 윤 씨의 것이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느꼈다. 자기 몸으로, 자기 고통으로, 자기 힘으로—무언가를 지켜냈다는 감각을.
산파가 아기를 닦아 윤 씨의 품에 안겨주었다.
작고 붉은 얼굴, 꼭 쥔 주먹, 숨을 들이쉬는 미세한 떨림. 윤 씨는 그 작은 생명 위에 시선을 박고 움직이지 못했다. 세상에 태어난 지 몇 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아이는 이미 윤 씨의 전부가 되어 있었다.
“우리 아가… 우리 아가…”
윤 씨는 아이를 가슴에 끌어안았다. 따뜻했다. 살아 있었다.
그 순간 윤 씨는 알았다. 이 아이가 자신이 이 세상에 남길 유일한 흔적이며, 동시에 자신을 다시 살게 할 유일한 이유라는 것을. 누구도 지켜주지 않는 이 집에서, 이 아이만큼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을.
최태국이 아들을 본 것은 그날 오전이었다.
숙취에 머리가 쪼개질 듯했지만, “아들 났다”는 말에 그는 벌떡 일어났다. 세수도 하지 않은 얼굴로 안채에 들이닥쳤다.
“아들이가? 진짜 아들?”
“예, 나으리. 튼튼한 사내아입니더.”
산파가 대답하자, 최태국은 아기를 내려다보았다.
피와 땀 사이에서 겨우 빛을 얻은 생명. 그러나 그의 눈엔 그저 ‘핏줄’이라는 표식만 반짝였다.
“하… 내 자식이네. 내 핏줄.”
그가 아기를 들려 하자 윤 씨는 반사적으로 아이를 더 꼭 끌어안았다.
“아직… 아직 약합니더. 조심해야 됩니더.”
“뭐? 내 자식을 내가 안는데 뭐가 조심이고?”
윤 씨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날 윤 씨의 눈빛에는, 최태국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단호함이 있었다. 최태국은 혀를 찼다.
“쯧. 계집이 애 낳더니 배짱이 두둑해졌네.”
그는 더 오래 머물지 않았다.
마당으로 나가 막돌이 어멈에게 고함을 질렀다.
“야! 솥 걸어라! 오늘 마을 사람들 다 불러서 잔치한다!”
그에게 아들은 축복이 아니라 ‘승인’이었다.
대가 끊기지 않았다는 승인. 땅과 돈과 힘이 제 자리를 찾아갈 거라는 승인. 윤 씨의 고통은, 그 승인서를 받기 위해 치른 비용 정도로만 취급되었다.
그날 저녁 해원장에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장, 구장, 면서기, 땅 중개인들—최태국의 돈 그림자 아래 붙어 사는 얼굴들이었다.
“축하합니더, 나으리!”
“이제 대가 끊기지 않겄네라예!”
“와, 이 집 복 타고났심더!”
아첨이 술처럼 흘렀다. 최태국은 고기를 굽고 술잔을 돌리며 크게 웃었다.
하지만 윤 씨는 방 안에 있었다. 아기를 안고, 창밖 소란을 들었다. 그 소란은 축하가 아니라, 기름 냄새와 비슷한 끈적한 환호였다.
윤 씨는 아이에게 젖을 물렸다.
작은 입술이 젖꼭지를 찾고, 숨을 쉬고, 빨아들였다. 아프면서도 따뜻한 감각이 가슴을 통과해 목까지 올라왔다.
“우리 아가… 니는 저 사람들 닮으면 안 된다. 알았제?”
아기는 대답 대신 더 깊이 젖을 빨았다. 윤 씨는 아이의 보송한 머리를 쓸어내렸다.
사흘째 되던 날, 최태국이 아이의 이름을 지었다.
“최기백. 崔起白이라 카이소.”
한문을 아는 면서기가 종이에 적어 보였다. 起—일어날 기. 伯—맏 백.
최태국은 그 글자를 보며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어서는 사람. 맏아들. 이 자식이 우리 최 씨 집안을 일으킬 장손이다.”
윤 씨는 그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누구를 위해 일어서나. 누구의 집안을 위해. 누구의 땅을 위해.’
그러나 그녀는 말하지 않았다. 이 집에서 윤 씨의 말은 늘 벽에 부딪혀 흩어졌다. 그녀는 그저 ‘낳는 사람’으로 남아야 했다.
그날 밤 윤 씨는 아이를 안고 낮게 속삭였다.
“기백아. 엄마가 니 이름 하나 더 지어줄 끼다. 엄마만 아는 이름.”
아이의 숨소리는 작고 고르게 이어졌다.
“니는… 살아남는 사람이다. 알았제? 이 세상에서 살아남아야 된다.”
윤 씨는 아이의 손가락을 하나씩 셌다. 하나, 둘, 셋… 열 개. 발가락도 열 개.
완전한 생명. 그 사실이 윤 씨를 잠깐 울게 했다. 완전해서가 아니라, 이 완전한 것을 지키기 위해 앞으로 얼마나 많은 날들을 버텨야 할지 알 것 같아서였다.
기백이가 백일을 맞던 날, 최태국은 또 잔치를 벌였다.
이번엔 떡도 더 돌리고 술도 더 풀었다.
“내 아들이 백일을 맞았다!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
사람들은 축하했고, 최태국은 더 크게 웃었다.
윤 씨는 여전히 방 안이었다. 기백이를 안고 혼자.
그날 밤 최태국이 취해 돌아왔다.
비틀거리며 안채로 들어오더니 소리를 질렀다.
“야, 윤 씨. 아들 어디 있노?”
“자는 기라. 조용히 해 주이소.”
“뭐? 조용히?”
그 한마디에 기백이가 놀라 울기 시작했다.
윤 씨는 재빨리 아이를 달랬지만 울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최태국은 짜증을 냈다.
“야, 애 좀 조용히 시켜라. 시끄러워 죽겄네.”
“울음 그치라 카도 아기가 어째 알아듣겄습니꺼. 배고파서 우는 기라.”
“그럼 젖 물려.”
“지금 물리고 있심더.”
최태국은 나가려다 멈춰 섰다.
그리고 윤 씨를 돌아보며 낮고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똑똑히 들어라. 기백이는 내 아들이다. 니 아들 아이다. 내 핏줄이고, 내 대를 이을 자식이다. 니는 그냥 낳아준 것뿐이다. 알았나?”
윤 씨는 고개를 숙였다.
기백이를 더 꼭 끌어안았다.
“…알았심더.”
“그래. 그렇게 순하게 굴어야제.”
문이 쾅 닫혔다.
윤 씨는 그제야 숨을 깊이 들이켰다. 기백이는 젖을 빨다 말고 엄마를 올려다보았다. 큰 눈. 아직 세상이 뭔지 모르는 맑은 눈.
“미안하다, 기백아… 니 애비가 저런 사람이라 미안하다.”
윤 씨의 눈물이 아이 볼에 떨어졌다. 기백이는 눈을 깜빡였다.
기백이는 빠르게 자랐다.
백일, 돌, 두 돌. 통통하고 건강한 아이였다. 걸음마도 빨리 뗐고 말도 빨리 배웠다.
“엄마.”
그가 처음으로 그렇게 불렀을 때 윤 씨는 울었다.
그 말 한마디가, 윤 씨에게는 자기 존재를 인정해주는 유일한 증언처럼 들렸다.
“그래, 엄마다. 니 엄마.”
기백이는 웃으며 윤 씨를 안았다. 작은 팔로 목을 감았다.
윤 씨는 아이를 꼭 안았다. 세상에서 이 아이만이 자신을 진심으로 바라봐주는 것 같았다.
반면 최태국은 아들에게 무관심했다.
가끔 지나가며 머리를 쓰다듬는 정도였고, 그마저도 손끝은 늘 급했다. 그는 늘 바빴다. 땅을 사고, 돈을 빌려주고, 사람을 만나고, 더 큰 판을 꿈꾸느라.
“아부지!”
기백이가 손을 내밀어도, 최태국은 지나쳤다.
“나중에 보자. 아부지 바쁘다.”
아이의 손이 허공에 잠깐 멈췄다.
윤 씨는 그 작은 멈춤이 마음에 걸려, 아이를 안아 들었다.
“아부지는 바쁜 기라. 우리 기백이는 엄마하고 놀자.”
“응.”
기백이는 금방 웃었다.
하지만 윤 씨는 알았다. 아이의 눈 깊은 곳에서, 아주 얇은 그늘이 자라기 시작했다는 것을.
기백이가 세 살이 되던 해 겨울, 최태국의 폭력은 더 잦아졌다.
그는 술을 마시면 돌아왔고, 이유는 필요 없었다. 밥이 짜다고, 방이 춥다고, 그냥 기분이 나쁘다고—그 모든 말은 주먹이 나갈 핑계였다.
“이 계집아! 밥이 워째 이 모양이고?”
“죄송합니더.”
“죄송하면 다가? 다시 해!”
윤 씨가 부엌으로 달려가려 하자, 최태국은 머리채를 잡아당겼다.
“야, 내가 니를 워째 데려왔는지 아나? 돈 주고 샀다. 니는 내가 산 계집이다. 알았나?”
윤 씨가 바닥에 넘어졌다. 이마가 기둥에 부딪쳤고 피가 흘렀다.
“엄마!”
기백이가 울며 달려왔다. 작은 몸으로 엄마를 감싸 안았다.
“엄마! 엄마!”
최태국은 잠깐 멈칫했다. 그리고 혀를 찼다.
“쯧, 애 앞에서 꼴불견이네.”
그는 돌아섰다.
윤 씨는 기백이를 안고 떨리는 등을 토닥였다. 아이가 울먹이며 말했다.
“피 나왔어.”
“아이다. 안 아프다.”
“엄마, 울지 마.”
윤 씨는 울지 않으려 했지만, 눈물은 이미 흘러내리고 있었다. 기백이가 작은 손으로 엄마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엄마, 나 커서 엄마 지킬 끼라.”
윤 씨의 가슴이 내려앉았다. 세 살짜리 아이에게서 이런 말이 나오는 것이, 이 집이 얼마나 비정상인지 보여주는 증거였다.
“나 커서 아부지보다 더 세질 끼라. 그럼 엄마 안 맞을 끼제?”
윤 씨는 아이를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조심스레 말했다.
“기백아, 니는 착하게 자라야 된다. 나쁜 사람 되면 안 된다.”
“나 나쁜 사람 안 될 끼라. 엄마 지키는 사람 될 끼라.”
아이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단단했다.
윤 씨는 그 단단함이 기특하면서도 두려웠다. 이 단단함이 증오로 자라버리면, 아이는 결국 이 집의 피를 닮아갈지도 몰랐다.
기백이가 네 살이 되던 해 봄, 최태국은 큰 땅을 샀다.
산 24번지—해원천 너머 산자락에 붙은, 오만 평이 넘는 임야였다.
“이 땅이 내 마지막 승부수다.”
그는 마루에 앉아 혼자 중얼거렸다. 어디선가 들은 ‘정보’에 매달린 눈빛. 몇 년 뒤 산업단지가 들어선다는 소문. 그 땅이 금싸라기가 될 거라는 기대. 그는 소문을 믿는 것이 아니라, 소문이 돈이 될 가능성을 믿었다.
윤 씨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또 땅이었다. 또 돈이었다. 이 사람의 삶은 흙을 사랑하는 삶이 아니라, 흙을 씹어 삼키는 삶이었다.
최태국은 더 거만해졌고, 윤 씨에겐 더 폭력적이었다.
“야, 윤 씨. 니도 알제? 산 24번지 말이다. 저 땅이 몇 년 뒤에 얼마가 될 줄 아나?”
“…모릅니더.”
“최소 백억이다. 백억. 그럼 우리 기백이는 재벌 아들이 되는 기제.”
기백이는 옆에서 블록을 쌓고 있었다.
아버지 말이 귀에 닿았을 텐데도, 아이의 표정은 묘하게 비어 있었다. 최태국이 인상을 썼다.
“야, 아부지가 말하는데 대답을 해야제?”
기백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최태국의 자존심을 긁었다. 손이 올라가려는 순간, 윤 씨가 재빨리 아이를 감쌌다.
“아이고, 애가 아직 어려 가지고 그럽니더. 용서해 주이소.”
“쯧… 버릇없이.”
최태국이 나가자, 기백이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나 아부지 싫어.”
윤 씨는 대답하지 못했다.
“왜 맨날 엄마한테 소리 지르고? 왜 때리고?”
“…아부지도 힘든 기라.”
윤 씨는 스스로도 믿지 않는 변명을 내뱉었다.
기백이는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커서 절대 아부지 안 닮을 끼라.”
윤 씨는 아이를 더 꼭 안았다.
그 목소리에는 벌써 미세한 증오가 섞여 있었다.
기백이가 다섯 살이 되던 해 여름, 윤 씨는 결심했다.
더는 이 집에 있을 수 없다고.
폭력은 날로 심해졌다. 최태국은 윤 씨를 사람으로 대하지 않았다. 술만 마시면 방으로 들어와 윤 씨의 삶을 짓밟았다. 윤 씨는 기백이 때문에 참고 견뎠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는 견딘다는 말이, ‘죽지 않기 위해 숨만 쉬는 것’과 같은 뜻이 되어버렸다.
‘이러다 내가 죽겄다. 죽으면 기백이는 어째 되노…’
어느 밤, 윤 씨는 기백이를 재우면서 유난히 오래 아이를 안고 있었다. 아이의 체온이 윤 씨의 가슴을 조금씩 녹였다.
“기백아.”
“응?”
“니는 착하게 자라야 된다. 알았제?”
“엄마도 같이 있을 끼제?”
그 질문 앞에서 윤 씨는 숨이 막혔다.
대답할 말이 없었다. 아이는 엄마 얼굴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엄마, 왜 울어?”
“아이다. 안 운다.”
“눈물 나왔잖아.”
기백이가 손끝으로 윤 씨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윤 씨는 아이를 꼭 안았다.
“기백아, 엄마가 니한테 미안하다.”
“워째?”
“…니를 이런 집에 낳아 가지고.”
“괜찮아. 엄마 있으면 돼.”
그 말이 칼처럼 박혔다.
윤 씨는 더 말하지 못했다. 목이 메었다.
‘이 아이를 두고 어째 가노… 어째…’
그러나 또 다른 목소리가 윤 씨 안에서 자랐다.
‘내가 여기서 죽으면, 기백이는 저 사람 손에 길들여진다. 내가 살아 있어야 된다. 어디에 있든 살아 있어야—언젠가 이 아이를 찾을 수 있다.’
그날 밤, 윤 씨는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떠난다는 것은 도망이 아니라 생존이었다. 살아남는 것만이, 언젠가 다시 지키는 길이 될 수 있었다.
기백이가 다섯 살이던 해 가을, 어느 저녁이었다.
윤 씨는 아이를 재우며 다시 한 번 오래 품에 안았다. 마치 내일이 오지 않을 것처럼, 혹은 내일이 오면 모든 것이 달라질 것처럼.
“기백아, 엄마 말 잘 들어라.”
“응.”
“니는 강하게 자라야 되고, 착하게도 자라야 된다. 둘 다 해야 된다. 알았제?”
“응. 근데 엄마, 왜 자꾸 그 얘기해?”
윤 씨는 대답 대신 아이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눈물이 흘렀다.
“엄마, 왜 울어?”
“아이다. 눈에 뭐 들어가 가지고.”
“거짓말. 엄마 우는 거 맞제?”
기백이는 벌써 알고 있었다.
윤 씨는 아이를 꼭 안았다.
“기백아, 엄마가 니를 사랑한다. 세상에서 제일 사랑한다. 알지?”
“응. 나도 엄마 제일 사랑해.”
“…고맙다.”
윤 씨는 아이가 잠들 때까지 숨소리를 들었다.
규칙적이고 평화로운 숨. 그 숨이 끊기지 않게 하려면, 윤 씨는 내일 이 집을 떠나야 했다. 떠나야만 했다.
‘미안하다, 기백아. 엄마가 약해서 미안하다.’
‘하지만 엄마는 살아남을 끼다. 니를 위해서라도.’
그날 밤이 지나면 윤 씨는 떠날 것이다.
그리고 기백이는 홀로 남을 것이다.
해원장 뒤란 감나무에는 홍시가 익어가고 있었다.
달은 차갑게 떠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가을바람이—마치 오래된 흙이 한숨을 쉬는 소리처럼, 담장을 넘어 방 안까지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