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

20장 — 제물

by 진동길

2000년 3월 20일 아침–밤 / 해원성심병원 영안실 — 가르멜 수도원 성당 — 진주 요양병원



1

아침은 눈이 시리도록 맑았다.

하늘은 마치 인간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조차 모른다는 듯, 혹은 알면서도 모르는 체하는 자의 낯빛처럼 거짓말같이 푸르렀다. 병원 외벽에 와 닿는 봄볕은 따뜻하였고, 뜰 가장자리에 남은 겨울빛은 이미 물러날 자리를 찾고 있었다. 계절이란 본디 그런 것이었다. 어느 집 대문 안에 초상이 나든, 어느 골목에서 피가 흐르든, 어느 가슴이 찢어지든 말든, 제때가 되면 어김없이 와서 제 몫의 빛과 바람을 펴놓고는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가버린다. 그 무심함이야말로 때로는 잔인하였다.


해원성심병원 영안실 복도는 차고 고요했다.

벽은 희었고 바닥은 지나치게 깨끗하였다. 그러나 그런 깨끗함이 사람 마음을 위로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살아 있는 것들의 어수선함과 군내와 체온, 사람이 살았다는 흔적의 더께야말로 얼마나 사람다운 것인가를 거꾸로 일깨워 줄 뿐이었다. 죽음 가까이의 말끔함은 으레 그러하였다. 슬픔을 닦아내기는커녕, 슬픔의 자리를 더욱 또렷하게 비워 보일 뿐이었다.


서하의 시신은 아직 너무 젊었다.

젊게 죽은 사람의 얼굴은 늘 산 사람들로 하여금 어제의 낯빛을 덧그리게 한다. 아직 말을 끝맺지 못한 입술 같고, 아직 어딘가로 급히 걸어가다 잠시 멈춘 이마 같고, 아직 누군가를 향해 고개를 돌릴 수도 있을 것 같은 목선이었다. 이마 위 상처는 정리되어 있었고, 입가에 번졌던 피도 깨끗이 닦여 있었다. 허나 그렇게 말끔해진 얼굴이 곧 평온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죽음이 미처 다 거두어가지 못한 시간들이 그 굳은 낯 위에 아직 가늘게 남아 있는 듯하였다. 제 몫이 아니어야 할 것들까지 끌어안으려 했던 젊은 사람의 얼굴, 남의 죄와 남의 슬픔까지 제 어깨로 받으려 했던 이의 얼굴이란 죽은 뒤에도 쉬이 다 닫히지 않았다.


원장 수사는 관 앞에 오래 서 있었다.

묵주를 쥔 손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고, 늙은 입술도 쉽게 열리지 않았다. 하느님 앞에 오래 서 본 사람일수록, 정작 설명되지 않는 죽음 앞에서는 말을 아끼게 된다. 세상사란 모름지기 이치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그도 모르지 않았으나, 맑고 어린 영혼 하나를 이렇게 보내는 일까지 신앙의 셈법으로 다 헤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믿는다는 것과 납득한다는 것은 본디 다른 것이어서, 오래 믿어온 사람에게도 끝내 납득되지 않는 슬픔은 남는다.


이현은 영안실 복도 끝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밤을 꼬박 새운 얼굴이었다. 눈 밑은 깊이 꺼져 있었고, 입술은 마른 흙처럼 갈라져 있었다. 사람들은 그가 울지 않는다고 수군거릴지도 몰랐다. 그러나 울음보다 먼저 마르는 것이 있었다. 사람이 자기 안의 마지막 기둥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을 때, 슬픔은 오히려 늦게 오는 수가 있었다. 먼저 오는 것은 멍함이요, 그다음은 텅 빈 귀청을 때리는 침묵이요, 그 끝에 가서야 비로소 눈물은 제 길을 찾는다.


그의 머릿속에는 같은 생각만 자꾸 맴돌았다.

어제 서하가 자기를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자기가 그날 모텔 방에서 끝내 입을 다물지 않았더라면.

더 오래전, 열다섯도 아니고 겨우 여덟 살이던 그 봄날, 자기가 어머니 쪽으로 한 걸음만 더 갔더라면.


이런 생각이 아무 소용 없다는 것은 그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이라는 것이 본디 그렇다. 소용없음을 알면서도 제 죄를 불가능한 가정들 속에서 다시 세어 본다. 이미 지나간 날을 붙들고, 거기다 한 치만 다른 발걸음을 끼워 넣어 보려는 헛된 짓을 산 사람은 끝내 놓지 못한다.




기백은 아침나절이 다 지나서야 구속집행정지를 받아 도착하였다.

사복 차림이었으나 양옆에는 건장한 교도관 둘이 바짝 붙어 있었고, 두 손은 천으로 덮인 채 수갑에 묶여 있었다. 불과 며칠 사이 얼굴은 이미 사람의 것이라기보다 궁지에 몰린 짐승의 몰골에 가까워져 있었다. 핏발 선 눈, 쑥 패인 뺨, 이마 위에 도드라진 힘줄, 이를 악물고 버텨온 사내의 낯빛 위에 서린 지리한 분노와 두려움이 그를 더욱 사나운 것으로 보이게 했다. 그는 영안실 문턱 앞에서 잠깐 멈추었다.

막내가 죽었다는 말을 유치장에서 들었을 것이다. 허나 말로 듣는 것과 흰 국화 속에 누운 얼굴을 제 눈으로 보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말은 귀를 스쳐 지나가지만, 눈으로 본 죽음은 사람 몸속 어디엔가 와 박혀 오래 썩지 않는다.


기백의 시선이 관 속 서하에게 닿는 순간, 그의 얼굴 위로 기묘한 것이 지나갔다.

처음 온 것은 화가 아니었다. 먼저 온 것은 당혹이었다. 그다음이 분노였고, 맨 마지막에, 아주 잠깐, 어린아이 같은 겁이 스치고 지나갔다. 덫을 알아본 짐승의 눈빛이었다. 세상과 맞부딪쳐 온 몸으로 버텨온 자가, 정작 피할 수 없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만 비치는 눈빛이었다. 제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자리에 이르렀음을 깨달은 자의 눈빛이기도 했다.


“누가 그랬노.”


울먹일 듯한 소리는 목구멍 깊은 데서 갈려 나오는 원망이었다.

수갑 찬 두 손이 천 아래에서 으드득 구겨졌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운전대를 잡았던 놈의 목을 부러뜨리고 싶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양옆의 교도관들은 그의 팔뚝을 단단히 틀어쥐고 있었다. 힘으로 세상을 부수어 온 수컷도, 끝끝내 쇠와 제도 앞에서는 묶인 몸 하나일 뿐이었다. 그 비참함이, 하필 서하의 죽음 앞에서, 더욱 또렷이 드러났다.


그 시각, 영숙은 영안실 문턱을 넘지 못하고 주차장 구석 검은 차 안에 숨어 있었다.

경찰의 눈이 깔린 빈소에 대낮부터 얼굴을 들이밀 수는 없었다. 짙은 선팅 유리 안에서 영숙은 입구 쪽만 오래 바라보았다. 영안실 문이 열릴 때마다 그쪽으로 고개가 움직였고, 손끝은 가늘게 떨렸다. 라이터 불은 자꾸만 헛돌았다.


제일 먼저 목을 따야 할 짐승들은 아직 시퍼렇게 살아 으르렁거리고 있는데, 어째서 가장 깨끗한 놈이 먼저 피를 쏟고 갔는가.


영숙은 담배에 불을 붙이지도 못한 채 필터를 짓씹었다. 이 죽음이 무엇을 무너뜨릴지 아직 다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만은 분명하였다. 이것이 서하 하나의 죽음으로 끝나는 판이 아니라는 것. 오히려 이 죽음이야말로 살아남은 자들의 숨통을 본격적으로 조여 올 첫 매듭이라는 것. 그런 예감이 봄바람보다 더 차갑게 그녀의 살갗 밑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수만은 영안실 문턱을 오래 넘지 않았다.

복도 모퉁이에 기대 선 채 사람들의 얼굴과 발소리, 관 앞의 향 냄새와 조화의 이름들을 한꺼번에 보고 있었다. 그는 늘 그랬다. 자기 자리를 앞으로 당겨 오기보다, 남의 자리와 그림자를 먼저 살피는 쪽이었다. 지금 이 장례가 슬픔 하나로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죽은 자 하나를 둘러싸고 더 많은 말과 종이와 손이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었다. 울음 다음에는 수군거림이 오고, 수군거림 다음에는 계산이 오고, 계산 다음에는 서로의 목을 겨누는 손길이 온다.




2

장례미사는 가르멜 수도원 성당에서 열렸다.

서하가 아직 정식 수도자는 아니었으나, 이미 그 문턱 안에서 제 몸과 시간과 마음을 내맡긴 사람이었으므로, 수도원의 품에서 보내는 것이 마땅하다고 원장 수사는 말했다. 그 말에 반대하는 이는 없었다. 반대할 이유를 찾는 것 자체가 서하에게 미안한 일처럼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죽은 자가 생전에 붙들고 있던 마지막 문턱만큼은 산 자들이 함부로 밀어내지 못하였다.


성당은 크지 않았으나 천장이 높았다.

관은 중앙 앞쪽에 놓였고, 흰 천과 십자가가 단정히 얹혀 있었다. 제대 앞 촛불은 조용히 타고 있었으며, 향 냄새가 천천히 돌벽 사이로 퍼졌다. 꾸밈없는 위령 성가가 낮게 깔렸다. 아름답다고 할 수는 없는 목소리였으나, 오히려 그 거친 숨과 떨림 때문에 더 슬펐다. 사람의 목으로만 낼 수 있는 슬픔이 있었고, 잘 다듬어진 소리보다 삭고 갈라진 소리 속에 더 깊은 진실이 스며드는 때도 있었다.


해원 사람들도 적지 않게 왔다.

철거민 몇은 검은 옷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뒤편에 서 있었고, 국밥집 정 할머니는 맨 끝 줄에 앉아 묵주를 돌렸다. 박 군수 쪽 사람들은 얼굴만 비추고 물러났으며, 장 회장 쪽에서 보낸 화환은 성당 바깥에 놓였다. 같은 자리에 선다고 해서 같은 마음이 되는 것은 아니었으나, 죽은 자 앞에서는 잠시나마 모두가 한 지붕 아래 모이게 된다. 다만 그 잠깐의 한자리에도 각자의 속셈과 두려움과 민망함이 저마다 다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을 뿐이었다.


원장 수사는 강론대 앞에 오래 서 있다가 입을 열었다.


“누군가는 칼을 쥐고 사람을 해칩니다. 누군가는 돈으로 사람을 무너뜨립니다. 또 누군가는 손 하나 더럽히지 않은 채 문을 닫고 등을 돌립니다. 세상은 그 마지막 죄를 제일 가볍게 여기곤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는, 하지 않은 일이 때로 한 일보다 더 무겁습니다.”


성당 맨 뒤에 서 있던 수만이 시선을 들었다.

원장 수사의 목소리는 점점 낮아졌으나, 그 낮음이 오히려 더 깊이 사람들 가슴속을 파고들었다. 큰 소리는 귀를 때리지만, 낮고 마른 소리는 오래 남아 속을 쑤신다.

“이 청년은 제 것이 아닌 짐까지 끌어안으려 했습니다. 핏줄이 저지른 탐욕과 외면, 살아 있는 자들이 서로에게 떠넘긴 죗값을 제 가느다란 어깨에 올려놓고도, 끝내 남을 먼저 살피려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관 앞에서 보는 것은 단지 한 사람의 죽음이 아닙니다. 산 자들이 마땅히 짊어졌어야 할 짐이 가장 깨끗한 사람에게 먼저 지워진 것입니다.”


그 누구의 기침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옷깃 스치는 소리조차 크게 들릴 만큼 적막했다. 어떤 말은 직접 사람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듣는 이들 각자의 심장을 정확히 짚어낸다.

원장 수사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산 사람은 죽은 이를 따라갈 수 없고, 남의 죄를 끝내 대신 살아 줄 수도 없습니다. 살아 남은 사람은 각자 제 이름으로 하느님 앞에 서야 합니다.”


성당 안이 더 조용해졌다.


“죄는 숨긴다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벌은 피한다고 끝나지 않습니다.

다만 사람은 너무 늦기 전에 자기 몫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 자비는, 바로 그 너무 늦은 사람에게도 문을 닫지 않으십니다.”

그 말은 누구 하나를 직접 가리키지 않았으나, 듣는 이들은 저마다 제 쪽으로 받았다. 어떤 이는 위로로 들었고, 어떤 이는 심판처럼 들었고, 어떤 이는 너무 늦게 들은 구원의 말로 받았다. 말이라는 것은 늘 그러해서, 한 입에서 나와도 열 사람 가슴에서 열 가지 다른 무게로 내려앉는다.


이현은 끝내 고개를 들지 못했다.

어제 모텔 방에서 서하가 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형이 형 몫을 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곁에 내가 없지는 않겠다는 뜻입니다.'


허나 이제 그 곁에 서하가 없었다.

그 사실이 성가 한 구절 한 구절마다 더 분명해졌다. 살아 있는 동안 다 받지 못한 사랑은 잃고 나면 늦게 죄처럼 남는다. 있을 때는 미처 다 헤아리지 못하던 사람이, 없어진 뒤에야 제 몫보다 더 커져 돌아와 가슴을 짓누른다.


성체거양 뒤 잠깐의 침묵이 왔을 때, 성당 안에는 사람들 숨소리만 가늘게 오갔다. 바깥의 봄볕은 점점 더 따뜻해지고 있었으나, 성당 안의 슬픔은 그와는 전혀 다른 온도로 가라앉고 있었다. 바깥은 살아 있는 계절의 시간으로 흘러가고, 안은 죽은 이 하나를 붙들고 멈춘 시간으로 굳어 있었다.




3

오후 해가 기울 무렵, 진주 요양병원.

원장 수사를 대동하고 온 이현이 402호 병실 문 앞에 섰다. 손을 뻗어 문고리를 잡았다가 놓고, 다시 잡았다. 사람은 제 생애 가장 단순한 동작 앞에서 가장 오래 머뭇거리기도 한다. 문을 연다는 것,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 이름을 부른다는 것. 그런 쉬운 일들이 때로는 한 사람의 남은 생애를 두 동강 내는 경계가 되기도 한다.

원장 수사가 낮게 말했다.


“열어라.”


끼익, 마른 쇳소리가 났다.

소피아는 침대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창문 틈으로 늦은 오후의 빛이 조금 들어오고 있었으나, 그 빛은 방 안을 따뜻하게 만들지 못한 채 바닥에만 엎드려 있었다. 소피아의 얼굴은 전날보다 더 말라 있었고, 눈은 오래 울다 마른 사람처럼 퀭하였다. 살이 빠진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사람답게 붙들고 있던 무엇이 오래전부터 조금씩 빠져나간 낯빛 같았다.


“어머니.”


한동안 반응이 없었다.

그러다가 소피아의 눈동자가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라기보다, 소리를 더듬어 기억의 먼 자리까지 가는 눈 같았다. 사람의 정신이 망가져도 끝내 닿는 이름 하나쯤은 남아서, 어떤 눈빛은 이승과 저승 사이를 헤매다가도 불행의 근원을 찾아 정확히 멈추기도 한다.

“어머니.”


이현이 한 번 더 불렀다.

소피아의 시선이 마침내 이현의 얼굴에 닿았다.

그 순간, 흐릿하던 눈이 잠깐 또렷해졌다. 미친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불행이 마침내 제 얼굴을 드러냈을 때의 눈이었다. 피해 다니던 진실이 기어코 문턱을 넘어와, 침대맡에 앉은 사람의 목을 조를 때의 눈이었다.


“……왜 네놈이 왔느냐.”


사포로 긁는 듯한 소피아의 쇳소리가 병실 바닥을 기어 다녔다.

“서하가 와야지. 나를 데리러…… 내 막내가 와야지. 네놈 손에는 항상 피비린내가 나는데…… 왜 네가 왔어!”


이현은 목구멍으로 넘어오는 피를 삼키듯 힘겹게 입을 뗐다.


“서하가…… 서하가, 갔습니다.”


침묵.

숨 막히는 적막이 방 안의 산소를 모조리 태워버린 듯하였다.

소피아는 비명을 지르지도 않았고, 바닥을 뒹굴며 오열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침대 끄트머리를 움켜쥔 채, 짐승처럼 그르렁거리는 숨만 내뱉으며 이현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퀭한 두 눈에서 핏물 고이듯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사람의 울음이란 소리로만 터지는 것이 아니어서, 때로는 한 마디 비명보다 저렇게 말없이 떨어지는 눈물 몇 방울이 더 참혹할 때가 있었다.


“네놈이…… 네놈이. 또 무슨 일을 저질렀구나.”


소피아의 목소리는 너무 또렷하고 서늘하여 오히려 기괴했다.


“십오 년 전에는 어미를 지옥에 밀어 넣고 문을 잠그더니…… 이제는 네 동생을 사지로 몰아넣고, 또 네놈만 살겠다고 문을 걸어 잠갔어! 피 한 방울 안 묻히고 사람 백정 짓을 하는 무서운 놈아!”


이현은 대꾸하지 못했다. 변명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세상 어떤 말도 이 순간 저주 앞에서는 제 꼴을 갖추지 못할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말은 때로 진실을 밝히지만, 때로는 진실 앞에서 가장 먼저 부서지는 것이기도 하였다.


“가라! 꼴도 보기 싫다!”


소피아가 악에 받쳐 비명처럼 토해냈다.


“막내가 목숨을 내놓고도 못 씻어낸 더러운 핏줄! 너도, 기백이도, 이 애미도 다 모조리 천벌을 받아 뒈질 것이다! 그 애는…… 그 불쌍한 내 새끼는, 우리를 대신해서 먼저 살이 찢어진 기라!”

소피아의 참혹한 저주는 이현의 고막을 찢고 영혼을 난도질하였다. 이현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평생을 견고하게 쌓아 올렸던 이성의 방패가, 어머니의 저주 앞에서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머리로 버텨온 세월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릴 때, 사람은 비로소 제 안에 남은 것이 죄뿐임을 깨닫기도 한다.


원장 수사는 차마 그 파국의 현장에 끼어들지 못하고, 그저 눈을 감은 채 성호를 그을 뿐이었다. 믿음으로도 막을 수 없는 말이 있고, 기도로도 대신 맞아줄 수 없는 저주가 있었다.


창밖에서는 봄볕이 천천히 물러가고 있었다.

사람 마음과는 달리, 날은 저물기 전까지 오래 따뜻하였다.




4

그날 저녁 해원 읍내에서는 소문이 바람보다 빨리 돌았다.

가로등 아래로 벚꽃이 소리 없이 흩날렸다.

막내가 죽었다더라.

술 처먹은 놈 차에 치였다더라.

수도원 들어가던 길이었다더라.

최씨 집안은 진짜 끝났다더라.


사람들은 늘 남의 집 파국을 몇 마디 말로 줄여 입에 올렸다. 허나 그 몇 마디 뒤에 얼마나 많은 밤과 피와 부끄러움이 웅크리고 있는지는 잘 모르는 채였다. 알더라도 모른 척하는 것이 세상살이의 오래된 습속인지도 몰랐다.


정 할머니는 국밥집 문을 닫으며 한숨을 쉬었다.


“사람 집안이 무너지는 것도 하루아침은 아이다. 허지만 꼭 한순간이 있기는 있는 기라.”


누구를 두고 한 말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너무 분명하여 굳이 이름을 붙일 필요가 없었는지도 몰랐다. 무너질 것은 오래전부터 금이 가 있었고, 그 금이 마침내 소리를 내며 벌어지는 순간만이 사람들 눈에 띄었다.


영숙은 그 말을 직접 듣지 않았으나, 비슷한 말들이 해원 바닥을 돌기 시작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창문 없는 방에서 가만히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불씨가 짧게 타들어 가는 동안에도 얼굴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서하의 죽음이 판을 바꾸었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었다. 최씨 집안에서 가장 조용한 축이 부러졌으니, 이제 남은 자들은 더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소리 없이 버티던 기둥 하나가 사라지자, 남아 있는 것들은 제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한꺼번에 삐걱거리기 시작하였다.


수만은 골목 어귀에서 담배를 피우며 병원 쪽 불빛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는 지금부터 더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죽음은 늘 판을 단순하게도 만들고, 더 복잡하게도 만들었다. 산 사람들은 죽은 사람의 몫까지 더 오래 살아야 했다. 그리고 더 오래 산다는 것은 더 많은 죄를 떠안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누군가 하나가 빠져나간 자리엔 으레 말 못 한 것, 숨겨 둔 것, 미뤄 둔 대가가 고스란히 남아 다른 이들의 발목을 잡았다.


유라는 그날 밤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듣지 않았을 리 없었다. 누군가 죽고, 누군가 무너지고, 누군가 늦게 울기 시작하는 소식은 언제나 가장 멀리 있는 사람에게까지 먼저 가 닿는다. 사람 사이의 인연이라는 것이란 끊어진 듯 보여도 어딘가 가느다란 실 하나쯤은 남아 있어서, 가장 피하고 싶은 소식일수록 이상하리만치 빨리 전해지곤 하였다.



밤이 늦어 수도원 성당의 불이 하나둘 꺼졌다.

원장 수사는 마지막으로 경당에 들어가 무릎을 꿇었다. 붉은 성체등만이 어둠 속에 남아 있었다. 늙은 수도자의 굳은 손에서 묵주알이 한 알씩 넘어갔다.


그날 밤, 기도는 말이 되기 어려웠다.

죽은 이를 위한 기도와 살아남은 자들을 위한 기도는 언제나 함께 가야 하는 것이었다. 죽은 이는 하느님 쪽으로 떠나 보낼 수 있으나, 산 사람의 죄와 번민은 아직 이 땅에 남아 있었다. 흙 위에 남은 발자국처럼, 아무리 지우려 해도 빗물과 바람으로는 쉬 사라지지 않는 것들이었다.


서하의 빈자리는 이제부터 더 크게 자랄 터였다.

산 자들 사이에서,

각자의 말 속에서,

각자의 문 앞에서.


그리고 그날 밤, 레퀴엠은 끝난 것이 아니라,

실은 이제 막 시작된 것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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