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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riposa Jul 23. 2024

뻥카가 통했다

전화위복, 불륜의 증거가 내 손 안에 들어오고있다

뻥카란?

뻥+카드의 줄임말. 포커에서 유래된 말로, 족보에 맞은 패가 전혀 없는 가장 낮은 카드를 칭한다.


영화 타짜를 보면 보통 자기가 가진 패가 별로일 경우, '전 죽어요~'라고 말한 뒤에 게임을 포기한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포기.

나는 내가 가진 패가 형편없을지라도 대단한 패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뻥카'를 친다. 고도의 심리전과 담대함이 필요한 순간인데 이 담대함을 내가 남편의 불륜 증거를 잡으려고 쓸 줄은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남편이 더 이상은 나랑 살기 싫다며, 아이를 원하네 어쩌네 난리부르스를 치는 사이 나는 머리를 팽팽 굴렸다. 내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 뻥카.

에라 모르겠다. 날리자 뻥카.


나 : 너 여자 있는 거 알아.

남편 : 뭔 소리야? 내가 여자가 어딨어?

나 : 내가 걔 이름도 알고 어디 사는지도 다 아는데? 내가 이때까지 바보라서 모르고 있는 줄 알았어? 내가 미행하는 거 몰랐지?

남편 :........?


와 씨... 이게 통했다. 미행은 개뿔.. 난 바보였고 그 여자에 대해 아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름도, 나이도, 직업도 그리고 어디에 사는지도.


여기서 조금이라도 잘못 행동했다가는 뻥카라는 게 들통난다. 조심조심 상대를 살펴야 한다.


나 : 너 성병 걸렸잖아. 그 여자애도 걸렸지?(물론 뻥카다)

남편 :.............

나 :  어디서 그런 정숙한 여자를 만나서 성병까지 걸려오고 난리니. oo에 있는 oo병원 맞지? 나 병원에 전화까지 해봤어. 똑바로 대답해. 진짜 부대에서 개망신당하기 전에. 내가 못할 거 같지? 너 내가 누군지 몰라서 그러는데, 나 미친년이야. 바람피운 거 맞지?

남편 :....... 맞아..


(뻥카가 제대로 통했다)


 미안하다는 소리는 안 한다. 미친놈이 따로 없었다. 갑자기 순순히 인정을 하더니 입이 바짝바짝 마르는지 정수기로 향한다. 이때다. 나는 얼른 스마트워치의 녹음기능을 켰다. 워낙 꼼꼼한 성격의 남편은 블랙박스영상을 거의 매일같이 지웠다고 했고, 정수기에서 물을 뜨기 전까지 내 핸드폰을 계속 감시하는 느낌이 들었다. 녹음을 하고 있는지 확인하려고. 그러나 멍청한 머리는 딱 거기까지였다. 나에게는 스마트워치가 있었다. 그리고 나는 굉장히 부자연스러운 포즈로(팔을 쭉 뻗고) 소파 끝에서 남편을 마주 보고 앉았다. 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는 녹음이 될 것이므로 교양 있게.


나 : 흠.. 나랑 이혼이라도 하고 그 여자랑 잤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지?

남편 : 응. 그러게.


됐다. 일단 육체적 외도를 인정했으니 이혼소송은 할 수 있겠다.

멍청한 남편은 진짜 겁을 먹고 내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고 본인들의 정보를 줄줄 말했다.

상간녀의 정체는 같은 부대 인사과에 근무하는 7급 군무원. 심지어 군무원이 된 지, 6개월도 채 되지 않아 내 남편과 놀아났다.

간도 크다. 유부남인걸 처음부터 알았다고 했다. 반지를 끼고 있는 것을 보고 결혼을 했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남편에게 특정 날짜까지 이혼을 해오라는 명령을 하셨단다. 당사자인 내가 모르는데 내 결혼의 기한이 정해져 있었다. 진짜... 이런 정신병자들은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지 정말 궁금하다.


 정신줄을 똑바로 잡아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됐다. 뻥카가 통한 마당에 나는 겁대가리를 상실하고 상간녀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체했다. 일단 걔의 집을 알고 있으니 상간녀의 부모님께 이 사실을 다 알리겠다고 했다. 너네가 당장 헤어지지 않으면 부대에 찾아갈 것이고, 그걸 막으려면 상간녀의 부모님이 내 앞에 와서 무릎 꿇고 빌라고 했다. 남편이 그제야 무릎을 꿇었다 ㅋㅋㅋㅋㅋ 나한테는 미안하지 않으면서 상간녀를 해친다고 하니 그게 무서웠나 보다. 그것만큼은 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


 자, 그 이유를 들어보시라.

본인은 나와 이혼을 하고 상간녀와 결혼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근데 걔네 부모님이 그걸(결혼 생활 중 외도) 아시면 자기는 절대 걔랑 결혼을 할 수가 없다고...

 내가 글을 쓰면서도 이게 진짜 내 남편의 입에서 나온 말이 맞는지 소름이 끼칠 정도다. 어쩜 이리 뻔뻔하기 짝이 없는지..

 그 여자를 해치지만 않는다면 자기는 앞으로 나를 위해 쥐 죽은 듯이 살 것이고, 다신 만나지 않도록 일을 그만두겠다고 했다. 나는 그걸 반대했다. 왜 또 내가 손해를 봐야 하는지. 그 상간녀보고 일을 그만두라고 말하라고 했다. 그건 못하겠단다. 절대 다시 안 만날 거라고 싹싹 빌었다. 근데 멍청이가 그 이유를 이미 말했으니 나는 그 말의 저의를 알고 있었다. 그 여자 부모에게 밉보이면 안 된다는 저의. 진짜 돌대가린가...


그리고 가장 기가 막힌 말을 했다.


남편 : 내가 게임을 좋아하잖아. 나는 게임을 하다가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게임을 리셋해 버려. 내 캐릭터가 흠이 없길 바라는 거지. 그래서 내가 잘못 선택한 결혼도 리셋하고 새 인생을 살고 싶어.

나 : 뭐? 리셋? 나를 리셋하겠다고? 누구 맘대로? 그럼 내 인생은?

남편 : 난 솔직히 내가 아기 얘기를 꺼내면 네가 자존심 상해서 바로 이혼해 줄 거라고 생각했어. 네 인생은 네가 알아서 살아. 넌 똑똑하잖아. 난 이제 상관없어.

나 : 내가 너랑 이혼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그거야. 너는 다 알고 결혼했고, 네 선택에 책임을 져. 난 앞으로 결혼을 다시 할 생각도 없으니 이혼을 할 이유도 없어. 아기 갖고 싶으면 걔랑 가져. 너의 호적 상의 아들은 앞으로도 평생 없을 거야. 아기를 낳고 싶다고 했으니 누가 엄마인지는 내 알 바가 아니고 그냥 너의 아기를 낳으면 돼.


결혼생활을 게임에 비유하고 나를 무슨 npc도 아닌 먹어서는 안 되는 아이템을 먹은 것처럼 생각했다. 자기 캐릭터가 망가졌으니 처음으로 돌리겠다는 거였다. 나는 그때 알았다. 이 사람이 정신병이 있구나.

우리는 그 이후 굉장히 무쓸모한 대화를 이어갔고 결국 내가 짐을 다 싸서 친정으로 돌아오는 결론을 지었다. 그러나, 아직 나에게는 한 가지 큰 문제가 있었다. 바로 상간녀가 누군지 모른다는 것.

뻥카로 대강의 정보는 알았지만 정작 소송을 할 수 있는 이름과 전화번호 등을 몰랐다. ‘이대로 집에 돌아가면 큰일인데.. 어쩌지…’ 그리고 더 기가 막힌 사실은 이제 집에 돌아가면 부모님께 이 사실을 다 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눈앞이 깜깜했다.


 친정으로 가는 차 안, 아이러니하게도 신혼여행을 위해 샀던 내 캐리어가 친정으로 돌아가는 짐을 싣고 있었다. 둘이서 가는 차 안에서 우리는 계속 울었다. 아마 남들은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고성이 오가는 걸 예상했겠지만 우린 한 번도 그렇게 싸워본 적이 없었다. 마지막까지 대화를 이어나가는데 눈물이 그냥 줄줄 나왔다. 난 남편이 그렇게 우는 것을 처음 봤고, 바보같이 또 슬퍼졌다. 등신 같은 게 왜 그런 짓을 해서 우리가 이 모양이 됐는지.. 왜 나한테 진심으로 용서해 달라고 빌지 않는지.. 모든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본인은 이제 집에 돌아가면 내 빈자리를 느끼면서 살 거라고 했다. 내가 주로 앉아 있었던 소파의 자리는 쳐다보지도, 앉지도 못할 거라고 했다. 너무 미안하지만 너무 미안하기 때문에 결혼생활을 지속할 수 없다며 눈물 콧물을 흘리며 말했다. 난 그걸 또 믿었다. 이제 보니 남편이 등신이 아니라 내가 등신 등신 상등신이었다.


그때, 가드레일이 눈에 들어왔다. 남편에게 말했다.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고, 가드레일에 조수석을 박아달라고 했다. 있는 힘껏 세게. 난 안전벨트를 풀고 있을 거라고.. 지금 나에게 최선은 그거라고, 제발 그렇게 해달라고 했다. 그냥 우리 부모님께 나는 평생 남편에게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살다가 안타까운 사고로 세상을 등진 딸로 남겨달라고 부탁했다. 남편은 크게 울기 시작했고 나는 더더 크게 울었다. 남편이 자기는 절대 못한다고 제발 병신 같은 자기를 잊고 원래의 너대로 예쁘고 당차게 자신 있게 행복하게 살아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운전대를 막 잡고 흔들었지만 역부족이었다.


 기운이 다 빠진 나는 더 이상 울 힘도 없이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가만히 앉아서 집 앞까지 왔다. 우리가 연애할 때 매번 그랬던 것처럼 남편은 내 짐을 다 들어주고 엘리베이터까지 데려다주었다. 이제 진짜 너와 나의 마지막이다. 믿어지지 않았다. 서럽게 우는 남편을 두고 엘리베이터를 탔고, 문이 닫히자마자 그대로 주저앉아 펑펑 울었다. 이대로 죽어버리고 싶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남편새끼는 내 앞에서 그렇게 펑펑 울다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마자 상간녀에게 지금 만날 수 있냐고 전화를 했다.


밤 아홉 시경, 나는 우리 집 초인종을 눌렀고 갑자기 찾아온 딸의 모습에 엄마는 놀라움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뒤로 등장하는 캐리어 두 개.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광경 앞에 엄마는 얼어붙었고,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우리 헤어지기로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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