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을 나는 나만의 비기
다섯 시인데 벌써 밖이 어둡다. 환기를 시키려고 잠시 문만 열어도 코 끝이 시려온다. 집에서 즐기는 안락한 겨울이야 더할 나위 없이 낭만적이지만 한 발자국만 밖을 나서려고 해도 매서운 바람에 신음소리부터 새어 나온다.
게다가 가족을 잃은, 이혼녀의 겨울은 말할 것도 없이 차디차다.
그렇다고 움츠러들 수만은 없는 일. 내 몸을 깨울 따뜻한 차를 한 잔 내려보는 게 좋겠다. 여름에는 거들떠도 안 보던 티포트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가장 즐겨 먹던 차로는 옥수수와 결명자가 있다. 옥수수는 아이가 좋아해서 자주 끓여 먹곤 했다. 그러다 보니 그 맛에 내 혀가 길들여진 거다. 여기서 괜히 아이가 그립다고 눈물콧물 흘리기 시작하면 차고 나발이고 마실수도 없게 된다. 그러니 맘을 단단히 잡아야 한다. 옥수수 알을 차망에 와르르 쏟으며 내 슬픔도 한 다발 털어낸다.
티포트에는 물을 최대 1400ml까지 넣을 수 있다. 나는 이 애매한 수치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1500ml까지 물을 담는다. 오랜 경험을 통해 100ml 넘기는 것 정도는 수용 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다. 티포트에 차망을 넣고 바글바글 끓여준다. 옥수수는 다른 곡물들에 비해 알이 커서 조금 오래 끓여줘야 하지만 티포트는 한 번 끓고 나면 칼퇴하기로 마음먹은 근로자처럼 다시 일할 생각을 하지 않으므로 잠시 우려내는 시간을 갖도록 한다. 색이 적당히 진해지면 옥수수를 빼도 좋다는 뜻이다. 좋아하는 머그컵에 담아낸 뒤 잠시 식혀 호로록 한 모금 마신다. 지난겨울 마시던 그 차, 그 맛이다.
둥굴레차나 보리차도 구수하니 먹기 좋지만, 나는 옥수수차 특유의 단향이 좋다. 음식엔 설탕 한 스푼을 더 넣고 샐러드마저 꿀을 뿌려 먹는 내게는 조금이라도 달달한 편이 입에 맞는다. '차를 누가 단맛으로 먹냐'는 사람이 있을 것만 같다. 그렇지만 차 역시 기호식품이므로 간섭을 사절하고 취향껏 먹도록 하겠다.
뜨끈한 차를 한두 모금 들이켰더니 몸이 조금씩 데워지는 게 느껴진다. 평소에 나는 속이 차다고 느껴질 때가 많다. 심할 땐 두꺼운 이불 아래서 한 시간을 누워있어도 발이 차갑다. 몸속이 냉하니 혈액이 더디 순환하고 그러다 보면 하체까지 피가 닿지 못해 발끝이 얼어붙는 일이 허다하다. 계절을 가리지 않는 수족냉증은 어쩌면 피부로 오는 추위가 아니기 때문에 속을 데워주는 편이 더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사실, 속 데우는 데는 어묵탕 만한 것이 없다. 길거리 포장마차 위에서 종이컵에 한 잔 따라 호호 불어 마시는 국물 맛도 좋지만 이자카야에서 제대로 시켜 먹는 어묵탕 역시 극락이라 할 수 있겠다. 아무래도 2,30대에는 포장마차를 주로 갔지만 이젠 엉덩이 붙이고 여유롭게 즐기는 업장의 맛을 거부할 수 없다. 약속이 거의 없는 나 같은 확신의 집순이라도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한 연말 약속은 꼭 이자카야로 잡는다. 추위에 바들바들 떨다가 실내로 들어가면 안경알이 뿌예지면서 온몸으로 습도가 느껴진다.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국물들이 데워지고 있는지를 말해주는 거다. 두꺼운 외투를 벗고 자리에 앉으면 달콤한 쯔유(일본식 간장) 향이 어디선가부터 퍼져온다.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 잠시 홀로 앉아있노라면 약속한 사람이 펑크라도 내주길 바라게 된다. 이대로 유유자적 혼자이고 싶은 기분이랄까!?
이자카야에 갔다면 겨울에 즐길 수 있는 따뜻한 사케를 시켜도 좋겠다. 그렇지만 나는 (갑자기 애국심이 들어서하는 말은 아니지만) 정종이 더 좋다. 제사를 지내고 나면 늘 정종을 나눠 마셨는데 미세하게 단향이 퍼지면서 부드럽게 넘어가는 것이 술이라기엔 너무 아름다웠다. 음, 그러니까 뭐랄까, 붓이라도 들고 글이라도 휘갈겨야 할 것 같은 예술적인 맛이랄까? 향과 풍미가 감히 소주와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소주야 미안해). 가족들과 있을 때는 부어라 마셔라 하며 마음껏 즐기는 분위기는 아니기 때문에 적당히 잔을 내려두곤 했는데, 그때의 아쉬움덕에 더 애틋해진 게 아닐까 싶다.
정종은 보통 실온으로 즐기곤 했다. 제사 전부터 싱크대 어딘가에 우뚝 서있던 초록색 병을 제사가 끝난 뒤 한두 잔씩 따라 마시던 게 전부였는데, 얼마 전 사진 한 장을 보고 깜짝 놀랐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물에 백화수복 원컵이 온천을 즐기고 있었던 거다. 다시 보니 그건, 온천이 아니라 중탕이었다. 정종을 데워 먹다니! '세상에! 나는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사람들은 어째서 이렇게 귀여울까?' 동시에 두 생각이 찾아왔다. 올 겨울은 귀여운 사람들 대열에 끼어 볼 작정이다. 글을 쓰다 보니 당장이라도 나가 백화수복 원컵을 모셔와야겠단 생각이 든다. 눈이라도 내리는 어느 밤 뜨끈하게 데워 바글바글 끓고 있는 어묵탕과 함께 한 잔 하며 속이라도 데워야지. 찬기는 다 빼버리고 뜨끈한 기운으로 내가 채워지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