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도네 Nov 21. 2019

이사하는 날 : 평화로운 이스트 코스트

22일 차, 싱가포르 생활기

싱가포르 한 달 생활 중 두 번째이자 마지막 이사, 이스트코스트로 이사 가는 날이다.


이사 가야 한다는 부담감에 캐리어도 다 풀지 않고 빨래하면 다시 캐리어 안에 넣으며, 매일매일 짐을 챙겼다. 캐리어를 끌고 1시간가량 걸어가야 하기에, 달걀과 과일, 음료 수 등 이동하기 어려운 음식물은 남기지 않으려고 구매를

제한하고, 어제까지 웬만한 건 다 먹어 치웠다.


아침밥까지 먹고 짐을 빠짐없이 다 챙겼다. 청소기를 한 번 돌린 후 침대 정리까지 했다. 아이들이 혹시라도 망가뜨릴까 싶어 이 집에 온 첫날, 한쪽으로 치워뒀던 장식품들도 원래 있던 위치에 뒀다. 다시 단장한 계단에서 마지막 사진을 찍었다.


‘이제 나가면 되나?’

창 밖을 내다봤다. 새벽부터 천둥번개 치며 거센 바람과 함께 내리던 비가 여전히 오고 있다. 그동안, 그치지 않을 것처럼 쏟아지던 비도 몇 시간 후면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하게 그쳤기에 오늘도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런데... 안 그친다.

‘어쩌지?’, 이사 간다고 짐도 다 쌓아놔 할 것도 없고, 가만히 있자니 아이들도 지루한 것 같다. 빗줄기가 사그라들지 않는다. 언제 그칠지도 모르는데 계속 기다리는 것은 시간만 죽이는 것 같아 아깝다. 결국 우버를 불렀다.

우버 기사가 도착하자 아이들은 한 번 가봐 아는 먼 길을 걸어가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에 밝은 표정이다. 우버 기사는 우리의 캐리어를 보더니 절망하는 듯한 표정이다. 애써 괜찮은 듯 캐리어를 옮기려 하는 기사의 표정에 당혹감이 역력히 드러난다. 트렁크에 한 개밖에 들어가지 않는다. 무거운 캐리어가 미안해 내가 들고 앞좌석에 실었다. 새로운 우리 집에 금세 도착했다. 여전히 비가 온다. 캐리어를 보고 갑자기 어색해진 우버 기사 표정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캐리어를 내리려면 비를 맞아야 하기에, 내가 먼저 캐리어를 잡고 내렸다. 우버 기사에게 “고맙다”라고 연신 인사했다. 우버 기사는 별 대답 없이 서둘러 떠났다. 그리고 나에게 낮은 고객 평점을 줬다. 나는 차 냄새가 심해도, 인사 한 마디 하지 않는 분도 항상 만점을 드렸다. 캐리어도 나서서 싣고 내렸는데, 나쁜 점수를 받은 게 기분이 좋지는 않지만, 낮은 점수를 줘서 우버 기사가 기분이 좋아졌으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덕분에 나도 미안한 마음이 조금은 줄어들었다.


체크인 예정시간보다 2시간 일찍 도착했다. 집을 찾아 올라가니, 집주인이 나온다. 메이드와 함께 정리 중이었다며 반갑게 맞아준다. 집 문을 여니 우리 방문이 있고, 바로 옆으로 작은 문이 있었다. 우리 방 2층 다락방으로 올라가는 문인데, 다른 사람이 산다고 열지 말라고 한다. 그러니 집 문은 잠그지 말고 방문만 잠그고 다니라고 알려줬다. 집을 계약할 땐 몰랐던 부분이지만, 어차피 방문이 있으니 괜찮다. 방에 작은 창고 같은 것이 있다. 그 안에 휴지 등 필요한 물건이 있으니 쓰라고 한다. 청소기가 없어서 조금 아쉽지만, 수건과 휴지를 넉넉히 주고, 주방에 그릇이 두 개씩 갖춰져 있어서 좋다. 이사 오기 전 집보다 조금 넓어졌는 데, 아이들은 넓은 집이라며 좋아한다.


캐리어를 집 안에 들여놓고, 바닷가에 가보기로 했다. 바닷가에 가는 길, 이사해야 한다는 걱정이 없어서 그런지, 미리 와봤던 지난 8일 차 때와 느낌이 다른다. 해변가는 길에 쇼핑몰이 보인다. 전에 아이들이 떡국과 떡볶이가 먹고 싶다고 했을 때 검색한 한국 마트도 그 쇼핑몰 안에 있다. 첫째가 지난번 동생에게 양보한 떡국떡을 살까 해서 한국 마트를 찾아갔다. 한국 마트를 보니 미역국도 먹고 싶다고 한다. 없는 것 없이 다 있다. 그런데 너무 비싸다. 열흘 후면 한국 가는데, 몇 배의 돈을 주고 사더라도 양념이 없어 어설픈 맛일 텐데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차라리 이 곳에서 느낄 수 있는 맛을 느끼는 것이 어떻냐고 아이들과 얘기하고 나왔다.


아무것도 안 사고 다소 아쉬운 마음으로 나오는 길, 눈에 익숙한 가게가 보인다. 한국 마트 찾느라고 오는 길에 못 봤는데, 아이들이 매주 일요일 문화센터 수업 끝나고 3년 동안 사 먹던 프레즐 가게다.

익숙함 속에 익숙하지 않은 맛을 찾으며 먹었다. 점심시간이 지나 다소 허기진 배를 맛있는 프레즐로 달래며 쇼핑몰 안을 더 구경했다. 식당가가 나오자 아이들, 눈길을 떼지 못한다.

“배고프구나, 먹을래?”

“응”

첫째 아이는 우동을, 둘째 아이는 소고기 카레를 주문했다. 싱가포르 와서 외식을 거의 안 했다. 매번 먹을 것을 싸 갖고 나와 먹었다. 싸온 것이 다 떨어져 배고프면 간식을 사 먹었다. 간만의 외식에 아이들이 너무 기뻐한다.


우동에 넣어 먹으라고 가게 한편에 미역이 놓여있다. 미역국을 먹고 싶어 하던 첫째는 우동에 미역 한 가득 담아 먹는다. 둘째의 소고기 카레는 90프로 이상이 비계다. 비계를 발라주다 보니 먹을 부분이 남아있지 않다. 쌓아놓은 비계를 둘째는 끌어다 먹는다. 한국에서 전혀 먹지 않던 비계를 맛있어하며 먹는 모습을 보니 싱가포르 와서 너무 안 먹인 것 같아 짠한 마음이 들었지만, 아이들은 만족해하며 배부르게 먹었다.

기분 좋게 쇼핑몰을 나왔다. 지도 상으로는 옆이 바다인데 건물들 밖에 안 보인다. 지난번에는 지도에서 안내하는

길을 따라갔지만 바닷가 가는 길을 찾지 못하고 돌아갔기에 오늘은 바닷가 방향과 풍경을 보며 걸었다.

해마와 물개 등 바다 생물을 표현해 둔 조형물들이 보인다.  분명 바다에 가까이 온 것 같은데 건물들 외에는 전혀 길이 안 보인다.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 갔다 왔다 하다가 건물 옆에 있는 놀이터를 발견했다. 급할 것 없으니 잠시 놀다 가기로 했다.

아이들이 노는 동안, 주변을 계속 살폈다. 분명 이 벽 너머가 바다인 것 같은데, 높은 벽을 어떻게 지나쳐 가야 할지 모르겠다. 한 아저씨가 벽 쪽으로 걸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그 아저씨를 눈으로 좇았다.

“얘들아, 이쪽으로 가보자. 여기 길이 있는 것 같아.”

전혀 길이 보이지는 않지만, 아저씨가 갔던 방향으로 우리도 가보았다. 지하도가 보인다. 이 길로 가면 되나 보다. 지하도를 지나니 숲이 나온다. 이정표가 없다. 지도 앱을 켜고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살펴보았다. 왼쪽에 이스트코스트 파크가 있다. “파크”라고 적혀있으니, 사람들이 많이 오는 곳일 것 같아 왼쪽으로 정해 걸었다. 길이 없는 숲을 한 참을 걸었다. 어디쯤 나올지, 뭐가 있을지 모르는 길을 걸으니 불안하고 막막했지만, 이사한 오늘은 꼭 바다를 보겠다는 마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계속 나아갔다. 한 참을 걸으니 맥도날드가 보인다. 인도가 보이지 않지만, 주차장을 통해 차도로 맥도날드 앞에 도착했다. 맥도날드 앞으로 인도가 있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보인다. 인도를 따라 앞으로 걸어갔다.

놀이터다. 다양한 놀이기구에 꽤 많은 아이들이 놀고 있는  놀이터다. 벤치 그네가 아닌 줄에 매달린 그네도 보인다. 싱가포르에 와서 우리나라 놀이터에 있는 줄에 매달린 그네는 못 봤기에 그런 그네는 없는 줄 알았는데, 여기에 있다. 아이들은 그네로 달려갔다. 오랜만에 놀이터 다운 놀이터 모습을 만나 반가운 아이들은 모든 놀이기구를 돌며 신나게 놀았다. 바닷가 나오는 길을 찾는데 오래 걸려 얼마 놀지 못한 것 같은데 어느덧 저녁시간이 다 되었다. 아쉽지만, 이제 길을 알았으니, 다음엔 더 빨리 와서 더 많이 놀기로 하고 집으로 향했다. 돌아가는 길은 올 때의 숲길이 아닌, 바닷가 옆 길로 걸어갔다.

올 때는 한 치 앞을 모르는 길이었기에 조심조심 살피며 걸었다. 집에 가는 길은 한 번 와봤던 길인 만큼 갈 수 있다는 가능성이 확실하니, 인도를 찾아 조금 다른 길로 돌아가며 성큼성큼 걸었다.

아까 올 때는 보지 못한 이스트코스트 안내판이 보인다. 가족끼리 나들이를 나와 곳곳에 설치된 바베큐 장에서 바베큐를 즐기는 모습이 아름답게 보인다. 그들의 모습을 보니 부럽기도 하고, 올 때보다 우리의 마음도 한 층 평화로워졌다.


지하도를 나오니 바로 마트가 보인다. 지난 8일 차에 왔던 마트인데, 그 마트 옆으로 돌아가면 지하도가 있는 것을, 지도만 보고 지도가 가라는 대로 돌다 보니 1시간 넘게 주변을 돌고도 찾지 못했다. 주변을 조금만 살폈다면 볼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지도는 현지의 상황이 바로바로 반영되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을 더욱 절감하게 됐다. 무엇보다 우리가 길을 찾지 못한 것은 막연한 두려움에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어리석음 때문이었던 것 같다. 확실해 보이는 정보에도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것, 무엇보다 현재 우리가 있는 곳의 정보는 우리의 감각이 더 정확할 수 있다는 것, 그러니 두려움이 들더라도 고개를 들고 주변을 더 잘 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트에서 훈제 바베큐 치킨을 판다. 그렇지 않아도 바베큐 냄새를 맡으며 걸어와 먹고 싶어 했는데, 반갑다. 셋이 먹기에 많은 양인 것 같았지만, 점심에 비계마저 긁어먹던 아이들을 위해 한 마리 샀다. 집에 가는 길이 더욱 흥이 나는지 미소 가득하다. 그래도 출출해진 배는 달래지지 않나 보다. 마트 앞 도너츠 가게에서 아이들이 잠시 멈춘다. 도너츠 하나씩 사 먹고 든든해지자, 동네를 좀 더 둘러보기 위해 둘러가자는 엄마의 요구를 들어준다.

우리집 길 건너편인데, 우리집 쪽과 완전 다른 분위기이다. 우리집 옆으로는 높은 건물과 상가들이 즐비한 데, 여기는 상점이 없다. 힌두교 사원을 지나니 지나다니는 사람 한 명 없는 한적한 주택가이다.

집에 돌아오니 바베큐 치킨이 아직 따뜻하다. 닭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모습에 선뜻 잘라주기가 망설여졌지만, 기대에 찬 아이들 눈빛을 보고 용기 내 뜯어 줬다. 그 순간 우리를 위해 닭을 뜯어주고, 늘 닭날개를 먹어주던 아빠가 더욱 생각났다. 보기에도 큰 데 먹을수록 정말 양이 많다는 것을 실감했다. 배 터질 만큼 최대한 입으로 밀어 넣었지만, 더 이상 못 먹겠다. 먹을수록 아빠가 더욱 그리웠다.

“아빠가 있었으면 다 먹어줬을 텐데”라며 아이들도 아빠의 부재가 더욱 절실히 느껴지나 보다. 그리움을 부른 닭을 배부르게 먹고 수영을 하러 1층에 내려갔다.

이사오자마자 하고 싶어 하던 수영인데, 컴컴한 밤에야 하게 됐다. 밤 9시, 1층 수영장 옆의 집들에는 불이 켜지지 않았다. 아직 사람들이 들어온 것 같지는 않지만, 늦은 시간이라 말소리 내지 않고 조용히 수영을 했다. 수영하는 동안 지나가는 이웃들도 없다.


이스트코스트의 첫날, 평화롭다.

마지막 이사이기에 더욱 편안한 밤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