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콤 달콤, 아로마 향기를 남기고 간 사람들
후쿠오카(福岡) 텐진(天神)에서 버스를 타고 한 시간 반 정도. 여느 때와 같이 버스 안에서 무념무상으로 창문 너머 보이는 푸른 하늘에 맛 닿은 바다를 멍 때리고 보다가, 바다 풍경이 거의 끝나는 지점에서 허리를 쭉 펴고 정신을 차린다. 가라쓰(唐津)로 가는 버스는 1년 중 11월 초 '군치 축제(가라쓰의 유명한 전통 가을축제 )' 때 이외에는 거의 텅텅 비어있어서 아주 편한 자세로 앉아서 갈 수 있다. 반대로 아침 출근시간에는 가라쓰에서 후쿠오카로 나오는 버스는 빈 좌석이 없이 꽉 찬다고 들었다. 생산인구의 도심 집중 현상으로 나타나는 지역 소도시의 공동(空洞) 현상이 바로 이것이다.
가라쓰 시내로 들어가는 차창 밖 풍경은 그냥 지방의 작은 도시와 같은 풍경으로, 낮은 건물과 오래된 주택들이 전봇대의 전깃줄과 연결되어 띄엄띄엄 자리 잡고 있다. 한적하다고 하기에도 설명이 안 되는 활력 없는 도시라는 생각이 절도 든다.
오전 10시. 마지막 종점. 버스에서 내려 아직 통행하는 사람 없는 텅 빈 상점가 거리를 보면 뱃속에서부터 한숨이 나온다. 어쩜 이렇게 사람 구경하기 힘들까.
끼기긱, 드르륵드르륵, 하나둘씩 공허한 상점가의 이웃 상점의 낡은 셔터가 올라가는 소리가 들리면 그래도 반갑다. 명랑한 소리로 아침 인사를 한다. '오하요~ 고자이마~스!(일본 아침 인사)'.
날씨가 쾌청하면 그래도 밝은 목소리로 인사할 수 있어서 좋다. 비가 오거나 태풍이라도 다가오면 사람들은 집에서 꿈쩍도 안 할 테니, 그때는 유령도시를 연상케 한다. 내가 이 상점가 모퉁이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자괴감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전날 청소를 대충 해서 지저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빗자루를 들고 청소를 한다. 상점가 통행로에 나와 일부러 빡빡 긁어대며 열심히 하는 척을 해댄다. 그래야 뭔가 나만의 비전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이 드니까. 가끔 상점가를 지나가는 사람에게 큰 목소리로 인사한다. '오하요~ 고자이마~스!'.
처음엔 왜 나한테 인사하는 거지? 내가 아는 사람이던가? 하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그런데 그다음 날에도 똑같이 인사를 하니까 서먹서먹 말을 걸어왔다. "저기요~!. 죄송해요. 어제는 저한테 인사했는데도 응대를 못했어요. 고마워요~! 그런데 여기는 뭐 하는 곳이에요?" 하면서.
변함없이 휑한 상점가 거리에 서걱서걱 마른 낙엽 몇 잎을 품은 돌풍이 부는 어느 날, 바람이 내 공방 앞에서 가라쓰 역까지 길게 뻗은 통행로를 관통해서 지나간다는 것을 알아챘다. 좋은 생각이 났다. 나는 오늘 같은 우울한 날에 어울리는 아로마 향이 무엇이 있을까 알아보기 위해 아로마 전문서적을 뒤적거렸다. 아로마 체험 커뮤니티를 해보겠다고 공방을 창업하면서 아로마에 대한 관련 서적을 몇 권 구매해서 공부 중이었다. 아로마 향은 정신적 안정을 주는데 효과를 인정받아 에스테틱 관련 업종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다. 향기에 대한 선호도가 높은 일본 사람들은 세탁용 섬유 유연제를 비롯하여 실내 방향제나 비누, 캔들 등 향기를 매개로 한 상품들을 많이 구매하는 편이다. 언젠가 규슈 대학원 연구실에 있을 때, 일본 굴지의 화장품과 세제 기업 '가오(花王)'의 향기 마케팅 부서의 직원을 초빙하여 강연을 개최한 적이 있다. 그 강연을 통해 일본 사람들의 향기에 대한 관심과 다양한 향기의 종류, 효능과 효과를 알게 되었다. 오감(五感)을 활용한 마케팅 방법을 실행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후각 마케팅!
라벤더 향을 꺼냈다. 문을 활짝 열고 작품을 만들면서 라벤더 향을 뿜뿜 풍겼다. 바람이 휘이익 불면서 공방 안을 들어왔다가 쉬익 나갔다. 라벤더 향을 모시고 바람과 함께.
라벤더 향을 머금은 바람이 회색빛 황량하기 짝이 없는 상점가를 연보라색으로 감싸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 기다리는 거다.
키가 크고, 몸매가 가냘픈 30대 초반의 여성이 내 주먹만 한 조그마한 얼굴을 기웃거리며 들어왔다.
"곤니찌와!(こんにちは!) 어디선가 너무 좋은 향기가 나서 향기 따라와 봤어요. 여긴 뭐 하는 곳인가요?"
오케이! 향기 마케팅 성공!
마유미 씨는 두 자녀와 함께 사는 싱글맘이라고 했다. 공방에 두 번째 방문했을 때 남편의 가정폭력으로 이혼 한지 얼마 안 되어 심한 우울증으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고민을 털어놨다.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이 있는 가라쓰로 돌아와 새로운 삶을 계획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라벤더 향이 우울증과 불면증을 완화해 준다는 아로마 전문서적의 페이지를 보여주면서 라벤더 향 사쉐(Sachet:향주머니라는 뜻으로 향기 나는 장식품)를 만드는 작업을 권했다. 라벤더의 부드러운 향기를 맡으며 드라이플라워와 프리저브드 장식용 꽃을 사쉐에 올리는 작업을 도와주었다. 그녀의 핏기 없이 건조한 얼굴에 점점 연보랏빛 아우라가 보이기 시작하면서 향기가 좋다며 예쁜 미소를 짓기도 했다.
어떤 날은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은 채로 '선생님!, 친정집 밭에서 무 농사를 지었는데 무 한 개 드릴까요?' 하면서 자신의 종아리보다 굵고 긴 무의 잎사귀를 잡고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지으며 가져온 무를 내 손에 덥석 쥐여주고 가기도 했다.
그 이후에도 마유미 씨는 아로마 향기로 자신의 우울증 증세가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면서 자신의 딸과 아들까지 데리고 와서 한바탕 시끌벅적 아로마 사쉐를 만들며 한껏 밝은 향기를 풍기고 갔다.
나는 그들이 돌아갈 때면 상점가 길 끝까지 가서 오른쪽 모퉁이를 돌아 안 보일 때까지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
"아리가또 ー! 마따네!(ありがとう! またね ー!)"
그녀를 닮은 연보랏빛 라벤더 향과 두 아이들을 닮은 노란색 레몬향이, 따뜻한 햇살과 청량한 바람에 섞여 조금 아까까지 썰렁했던 상점가 거리가 '새콤 달콤' 향기로 가득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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