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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risol Oct 17. 2023

내 인생에 '나중'은 없어

행복은 목발을 짚고 천천히 다가온다고?


 규슈 대학원 연구실에서 지도 교수와 연구원인 나를 포함해서 석사과정 학생과 학부 졸업생들과 공동연구를 했을 때의 쓰라린 경험 이야기다. 사가현 가라쓰시(佐賀県 唐津市)의 「'6차 산업화'를 통한 지역 활성화 전략과 지원 정책」을 테마로 한 연구 프로젝트의 타당성과 결론 추론의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가라쓰 주민들을 대상으로 앙케트 조사를 하러 갔다. 


 오늘날 일본은 인구 감소와 대도시의 인구 과도 집중은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고 있다. 생산능력을 가진 20∼35세의 약 35만 명의 젊은이들이 매년 지방 소도시에서 도쿄를 포함한 대도시로 이동하고 있는 현실이다. [1]


 인구 감소 및 농어촌 지역의 고령화는 지역의 경제적 경쟁력을 잃는 원인이 되고 지역 경제 문제는 심각한 상황에 놓여있다. 이와 같은 지역의 경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농업의 6차 산업을 통한 다양한 지원 제도를 추진하고 있다. [2] 일본 규슈의 후쿠오카현(福岡県)과 오오이타현(大分県), 사가현(佐賀県), 나가사키현(長崎県) 등에 소재하며 농축수산물 생산을 주업으로 하는 지방 소도시에서는 지역의 젊은 층 인구의 유출을 방지하기 위하여 지역의 소중한 자원을 사용하여 농업을 중심으로 한 창업을 지원하는 다양한 정책을 펼치고 있다. 이러한 정책 실현으로 인하여 실제 창업한 젊은 창업가들의 성공사례와 지원정책에 대한 주민들의 공감 정도 등을 파악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 연구의 목적이었다. 


 자신들이 살고 있는 도시 가라쓰를 위한 연구를 하는 우리들의 행보를 칭찬하며 적극적으로 조사에 임해 줄 것이라고 기대하고 꿈에 부풀어 있었다. 조사 대상은 주민들 중 농업 또는 어업 등 1차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가공 식품업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생각 외로 지역 주민들은 우리들의 앙케트 조사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듯했다. 책상머리에 앉아서 뭘 할 수 있겠냐는 이야기다. 너희들이 1차 산업을 알아? 하는 눈초리로 악담을 하는 지역 유지라는 아저씨를 비롯해서, 그런 조사가 뭐가 필요해? 논문 따위가 우리 마을에 무슨 도움이 된다고? 하는 상점 주인아주머니도 있었다. 앙케트 조사단 대표인 나는 그들 앞에서 뭐라고 설명하고 설득해야 할지, 멍청하게 서 있다가 목표량을 채우지 못하고 돌아왔다.


 또다시 자괴감에 빠져 내가 왜 여기에서 이러고 있지? 하는 생각에 기분이 상했다. 그렇게 속상한 마음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주차장으로 걸어 들어오다가 눈앞에 막 내려오는 차단기를 늦게 알아채고 급히 피하려다 빙그르르 돌면서 고꾸라졌다.


 그 순간 어두워진 회색빛 하늘이 나를 덮친 것 같더니 왼쪽 발목에 격하게 심한 통증이 몰려왔다. 발목이 90도 이상 돌아가 있었다. 너무 요상하고 괴상하게. 아파서 죽겠다는 말이 이런 경우라고 생각했다.


  복합골절. 뼈가 박살이 나서 산산조각 흩어져 있었다고 한다. 인공 뼈를 대어 쇠 파이프 같은 것에 나사를 박는 응급수술을 하고 한참을 깁스를 한 채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연구고 나발이고 이게 무슨 꼴이람.


  일본의 간호사는 친절하지만 냉정했다.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 하는 환자들이라 해도 힘든 일을 거들어 주지 않는다. 휠체어에 의지하기만 하면 회복이 늦어진다며 조속히 휠체어를 졸업하란다. 아파 죽겠는데도.


  휠체어를 졸업하면 목발을 짚고 다녀야 한다. 나랑 생전 관계가 없는 단어라고 생각했던 단어이다. 일본어로 목발이 뭐더라 하며 핸드폰으로 사전을 찾아보았다.


 마쯔바쯔에(松葉杖). 단어를 찾으니 예문이 한 줄 밑에 있었다. '시아와세와 마쯔바쯔에오 쯔이테쿠루.

(幸せは松葉杖をついて来る。)'


 행복은 목발을 짚고 천천히 다가온다.라는 의미이다. 일본 격언인지 아니면 그냥 예문인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의미심장하게 스며들었다. 불행은 한꺼번에 들이닥치는데 행복은 절뚝거리며 천천히 온다는 말이다. 이건 너무 불공평하잖아. 


 어쨌든, 목발을 짚고 하루빨리 퇴원하기 위해 열심히 물리치료를 받았다. 샤워는커녕 머리에서 쉰 내가 나는데도 샴푸도 내가 직접 해야 하고, 걷는 연습도 혼자 해야 한다고 간호사들은 매정하게 도와주지 않았다. 연세가 많은 아주머니들도 마찬가지로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하루빨리 목발을 졸업하겠다고 안간힘을 썼다. 환자들이여,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서라! 


 퇴원이 일주일 정도 가까워진 때에 내 침대 건너편에 새로운 환자가 입원했다. 60대 후반의 얼굴이 고운 아주머니였다. 말도 별로 없고 조용하게 움직이는 분이었다. 항상 그 곁에서 간호하고 있는 남편인 듯한 아저씨도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한 분이었다. 서로 대화도 없고 아주머니는 그냥 누워만 있고 아저씨는 의자에 시무룩하게 앉아있다가 면회시간이 끝나면 조용히 빠져나갔다. 아주머니는 핑크색을 좋아하는지 가져온 모든 물품들이 핑크색이었다. 이불도 병원에서 사용하는 것이 아닌 핑크색 이불, 환자복도 자신의 핑크색 잠옷, 양치 컵과 타월, 거울, 빗, 슬리퍼 등 아주머니의 창백한 얼굴빛을 제외한 모든 것이 핑크색이었다.


 그렇게 며칠째 적막하리만큼 서먹서먹한 병실 분위기에 견디다 못해, 어디를 다치셔서 오셨어요? 하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왠지 대화하기 귀찮아하는 얼굴 표정이어서 물리치료나 받으러 갈까, 하고 일어서 목발을 챙기는데, '불행은 예고도 없이 갑자기 비정하게 찾아오는군요.' 하면서 아주머니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아,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정말 저도 어이가 없이 다쳐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수술까지 했거든요."


 한국에서는 이 정도로 다친 적도 없고 이렇게 오랫동안 입원 한 적도 없는데 타지에서 이게 무슨 끔찍한 일인지 말이에요 하면서 이런저런 불평을 늘어놓았다.


 "남편과 나는 자식들이 결혼하고 출가할 때까지 정말 정성을 다해서 아이들을 교육하고 화목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살았어요. 자식들이 성인이 되어 하나, 둘 우리들 품에서 떠나고 남편이 다니던 직장을 정년퇴직하게 되면, 그동안 열심히 살아왔던 우리들의 인생에 보너스를 주자고 약속한 것이 있었죠. 멋진 호화 유람선을 타고 일 년 동안 세계 여러 나라를 다니는 크루즈 여행을 하는 거였어요. 남편이 은퇴하기 몇 달 전, 우리는 그렇게 꿈꿔왔던 크루즈 여행을 예약했어요. 그날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동안 정말 행복했었죠."


 그런데, 정말 어처구니없게 슈퍼마켓에 장 보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보도블록에 걸려 넘어지면서 고관절이 골절되었다는 것이다. 움직이지도 못하고 누워만 있게 된 것이다. 수술을 해도 정상적으로 걸어 다니는 것이 힘들다고. 부부의 인생 최고의 꿈이었던 크루즈 여행은 취소할 수밖에 없었고, 직장을 정년퇴직 한 남편은 졸지에 아주머니의 간병인이 되었다는 말을 하면서 아주머니는 조그만 소리로 울고 있었다.


 "당신은 꿈이 뭐예요?"


핑크색 손수건으로 눈물을 조용히 훔치더니 나에게 물어왔다.


 저도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하는 것이 꿈이에요.라고 대답했다. 유럽의 역사나 문화에 관심이 많아서 책을 보며 어디 어디를 갈까 하며 언젠가는 꼭 가고야 말겠다는, 확실치 않지만 즐거운 여행 계획을 하는 것이 취미라고 신이 나서 말했다.


"그럼, 목발을 졸업하고 두 다리로 걸을 수 있게 되면 당장 여행을 떠나세요. '나중에'는 없어요. 나를 보세요. 돈이 모이면 가야지, 시간이 나면 가야지, 하다가 이런 꼴이 됐어요. 우리네들 인생에 '나중'은 없어요. 다리가 나으면 빚을 내서라도 꿈꾸던 여행을 떠나세요.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안타까운 자신의 지금을 한탄하면서 나에게 해주는 절실한 조언이었다.


 퇴원을 하고 집 근처의 물리치료센터를 다니면서 열심히 재활운동을 했더니 깁스를 했던 왼쪽 종아리의 근육이 원래만큼 단단해졌다. 아직 인공 뼈는 쇠 파이프로 연결되어 있어야만 했다. 1년 동안.


 핑크 아주머니의 말이 생각났다. '나중'은 없다.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한다'라고 예전의 지도 교수님이 하신 말이 기억났다. 아들과 함께 스페인 여행을 다녀와서 나한테 구구절절 감동과 흥분이 섞인 여행담을 침을 튀기면서 자랑하셨다.

 '스페인은 감동 그 자체야! 꼭 가봐!'


 신나는 스페인 여행을 위해 스페인어를 공부했다. 

스페인 공항에서 적외선 탐지 시스템에 걸릴지도 모른다고 걱정이 됐다. 만일을 위해 병원에서 촬영 한 수술부위의 뢴트겐(X-Ray) 사진을 복사해서 가방에 넣었다. '발목뼈가 부서져서 쇠 파이프로 연결한 거예요'라는 간단한 스페인어도 수첩에 적어서 몇 번이나 읽어 보았다.  오케이 준비완료!


 그렇게 나는 22일간의 스페인 여행을 떠났다.


 행복은 목발을 짚고 절뚝거리며 천천히 온다지만, 두 다리로 걸을 수 있게 된 그때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싸구려 지팡이와 인공 뼈를 짚고 꿈에도 그리던 유럽 여행을 시작했다.


  내 인생에 '나중'은 없어!





[1] 참조 : 일본 마찌·히토·시고토 창생본부사무국(日本、まち・ひと・しごと創生本部事務局) 홈페이지,

   http://www.kantei.go.jp/jp/singi/sousei/

[2] 권혜숙 외, 「농수산물을 활용한 6차 산업화 공적 지원프로그램에 관한 연구(한국과 일본의 사례 비교 연구)」, 한국공간 디자인 학회, 제10권 4호, 통권 34호, pp.19-28,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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