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8년. 일본살이
규슈대학 대학원 예술공학원(九州大学大学院芸術工学府)은 후쿠오카시 오하시(大橋)라는 지역에 있었다. 연구과제를 정해서 논문을 쓰려면 거의 매일 학교에 가야 했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학교 근처에 집을 구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서 부동산 중개인이 추천해 준 몇 지역 중에서 지하철역과 가깝고 학교와도 가까운 중간지점인 노마(野間)라는 동네의 7층짜리 맨션(マンション―아파트와 빌라의 중간쯤 되는 주거용 건물)을 거처지로 정했다. 우리나라와 같은 전세제도가 없는 일본에서는 자기 소유의 주택이 없는 사람들은 월세를 지불하며 임대주택에서 생활한다.
보증금에 해당하는 시키킨(敷金), 월세의 2배 정도와 임대인에게 주는 레이킨이(礼金―이해는 안 되지만 집을 임차할 때 집주인에게 감사하다고 지불해야 하는 돈이란다.)라는 명목으로 1개월 분이나 2개월 분, 중개사무실 수수료 2개월 분, 월세 1개월 치 선금. 대략 집을 임차계약할 당시에 지불해야 하는 액수는 월세의 7배 정도가 되는 막대한 돈을 지불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취득한 개인 사업자가 운영하는 중개사무실을 통하여 매매 및 임대계약을 하지만, 일본의 부동산 중개사무소는 대부분 기업형으로 자격증을 갖고 있는 직원의 대응으로 계약을 한다. 서류 기입과 법적 검토는 물론, 임차인이 지켜야 할 규율 등 모든 설명을 아주 자세하게 설명하는데 그 모든 것이 조직화, 매뉴얼화되어 있다. 나는 이 깐깐한 상황이 너무 답답하고 귀찮았지만, 그 설명을 다 들어야만 중개사 사무실 직원이 계약서에 도장을 찍어준다.
입주하는 날에도 내가 거주하게 될 건물에 직원이 방문해서 거주하는 동안 지켜야 할 규칙과 전기, 가스, 수도 등의 사용개시 방법, 쓰레기 분리 방법과 적치장소 등이 기록된 시오리(ご入居のしおり [1])라고 하는 소책자를 열쇠나 키 카드와 함께 건네주면서 또 재차 확인 설명을 한다.
일본의 임대주택은 그야말로 한치가 아니라 1센티미터의 오차나 허술함이 없이 주도 면밀하게 계획돼 있다. 화장실이나 주방을 보면 작은 공간을 효율적으로 구획하는 치밀함을 더 잘 알 수 있다. 특히 냉장고의 위치가 애매해서 오른손을 사용해서 문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열어야 하는 냉장고가 불편할 경우가 있다. 노마의 맨션 역시 그랬다.
문제를 간단하게 해결했다. 문을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양쪽으로 열리는 냉장고를 구입했다. 참으로 신기했다. 이 냉장고는 어떤 집으로 이사를 가도 위치 때문에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좁은 집이지만 그래도 베란다가 있어서 햇볕에 빨래도 널 수 있고 작은 공원을 내려다볼 수 있어서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매일이다시피 악몽을 꾸었다. 기분 나뿐 꿈, 무서운 꿈, 몸을 못 움직여서 허우적대다가 식은땀을 흘리며 일어나기 일쑤였다. 잠을 못 잤으니 늘 피곤하고 식욕도 없어지고 몸도 찌뿌둥하니 얼굴빛도 좋을 리가 없었다. 지도 교수님이 걱정을 해 주셨다. 왜 그렇게 안 좋아 보이냐고.
매일 악몽을 꿔서 잠을 못 잤다고 하니까, 집 터가 안 좋은 거 아니냐고 주위에 뭐 이상한 거 있는가 확인 한번 해보라고 해서 주소를 알려주었다.
내가 베란다에서 내려다본 작은 공원은 공동묘지였다. 나무가 잘 다듬어져 있고 꽃이 예쁘게 피어있는.
게다가 주방 창문에서 보이는 고풍스러운 절(寺)은 납골당이었다.
위약금을 물지 않으려고 억지로 견디며 계약기간 2년을 채우고 바로 이사를 갔다.
두 번째 집은 후쿠오카에서 가장 아름다운 오호리 공원(大濠公園)이 바로 보이는 맨션이었다. 주말에 가끔 산책을 왔던 곳이었다. 호수를 두세 바퀴 돌면 적당한 운동이 되어서 후쿠오카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였다. 이런 곳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 하고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을 무척 부러워했던 곳이었다. 월세가 비쌌지만 일본에서 살고 있는 동안 이왕이면 쾌적한 환경에서 살고 싶었다.
건물 파사드가 스페인 건축가 가우디가 디자인한 까사 바뜨요에서 영감을 얻었는지 물고기 비늘 모양의 외벽이 독특한 맨션이었다. 창문으로 호수가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매일 행복하게 지냈다. 집 바로 앞이 공원이니 주말이 아니어도 시간만 나면 호수 주위를 돌며 산책을 했다. 햇볕이 잘 드는 베란다에 예쁜 꽃들을 잔뜩 키웠다. 라벤더, 베고니아가 꽃을 피운 8월이면 유명한 불꽃축제(大濠公園花火大会―이 축제는 2019년 이후에 종료되었다.)와 맥주 축제 '옥토버 페스타(독일의 맥주축제에서 유래한 음식축제)'가 바로 이 공원에서 열렸다. 불꽃축제가 열리는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가까운 곳에서 축제를 즐기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돗자리를 들고 와서 누구보다 먼저 자리를 잡으려고 혈안이 되었다. 나는 베란다에서 그 광경을 보며 이 집으로 이사 와서 너무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저런 수고를 하지 않아도 편안하게 의자에 앉아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베란다에서 불꽃 구경을 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그 비싼 월세를 내며 2년을 살았더니 경제적으로 힘들어졌다. 그야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할 수없이 또 이사를 가야만 했다.
부동산 중개 사이트를 뒤지며 이사 갈 집을 찾았다. 일본에서 4년을 살았으니 웬만한 지역 정보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더 이상 새로운 집에 대한 환상도 없어졌고 호기심도 사라졌다. 그냥 지하철역과 버스 정류장이 가까워서 교통이 편리하고 슈퍼마켓이 근처에 있으면 좋겠다 싶어서 정한 곳이 처음 후쿠오카에 와서 살았었던 노마 근처로 정했다. 후쿠오카시의 중심지인 텐진(天神)에서 3번째 전철역 다카미야(高宮)는 역 개찰구를 나오면 슈퍼마켓이 있고 바로 옆에 세탁소도 있어서 편리했다. 노마에 살았을 때부터 자주 갔었던 닭꼬치구이 집(焼き鳥屋)도 있고 단골 이자카야(居酒屋)도 있어서 모든 것이 익숙하고 마음이 편했다. 맨션 1층에는 운동시설 GYM이 있어서 그런대로 살기 좋은 곳이었다.
사가현 가라쓰시(佐賀県唐津市) 지자체의 지원을 받아 가라쓰에 사업체를 만들고 다카미야에서 가라쓰까지 출퇴근을 하다 보니 교통비도 시간도 만만치 않게 들었다. 또다시 이사를 가야만 했다. 가라쓰는 후쿠오카와 달리 작은 마을이었다. 가라쓰 전철역 부근에는 후쿠오카에 직장이 있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맨션이 많았다. 역시 교통이 편리한 곳에 주택들이 몰려있었다. 임대 물건이 별로 나와 있지 않아서 어렵사리 전철역의 고가선로(高架線路)가 보이는 맨션을 계약하기로 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난관에 봉착했다. 후쿠오카와 달리 일본인 보증인이 있어야 한다고 해서 곤란했었다.
이런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내가 가장 존경하고 따르는 전통 료칸 요요카쿠(洋々閣) 사장님께서 흔쾌히 보증을 서주시겠다고 하셔서 무사히 계약을 마치고 네 번째 이사를 했다.
이사 당일 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늦은 밤과 이른 새벽시간에 고가선로로 전철이 달리면서 '우르릉 쾅쾅' 진동과 함께 굉음이 들렸다. 그때마다 맨션 건물이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다. 매일매일 그랬다. 전철이 다니지 않는 시간은 고작 한밤중 4시간 정도.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살지?
그렇게 일본에서의 8년 동안, 한국에서부터 후쿠오카 노마로, 노마에서 오호리 공원으로, 다시 노마 근처로, 가라쓰로 이사를 네 번이나 하면서 후쿠오카와 가라쓰를 오가며 길바닥에 돈을 뿌리고 다녔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경제관념이 없이 살았던 시절이었지만, 낯선 곳으로 이사를 다닐 때마다 호기심과 설렘으로 두근두근거렸던 그때의 어린아이 같던 심장소리는 아직도 엷은 미소를 자아내며 기억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