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둘째 딸의 첫 번째 남자

박 씨가 아닌데도...

by Marisol

까불대며 노는 것만 좋아하던 날라리 큰딸 미정이와는 달리 똑똑하고 얌전했던 미영이는 공부 꽤나 하는 학생들이 다니는 여고에서 전교회장까지 하며 이름을 날렸다. 그런 고로 춘자는 미영이가 대학에 가고 싶다고 졸라대면 어쩌나 하고 내심 두려웠다.


다행히도 미영이는 그 나이또래 여자아이들처럼 미래에 대한 동경이나 원대한 포부는 없는 듯했다. 오빠 종태와 언니 미정이가 대학에 가지 못하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번 돈으로 가족들이 그나마 편안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할 테니 자신도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직장생활을 할 것이다.


춘자의 생각 그대로 미영이는 학교 졸업 후 전문학원에 다니며 자격증을 취득하여 차분하고 꼼꼼한 성격에 어울리는 간호조무사가 되었다. 집 근처에 있는 작은 병원이지만, 착실하게 월급을 모아 결혼자금은 자기가 마련할 테니 엄마는 내 걱정 마시라는 착한 딸의 야무진 계획을 듣고 춘자는 안심했다.


쉬는 날이면 조카 수진이를 데리고 외출하는 덕에 춘자는 편안한 마음으로 성당에 다닐 수가 있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정도로 사랑스럽다는 손녀딸이라고 해도 춘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할머니 춘자가 우아한 여인으로 변신할 시간이다.


꼼꼼하게 화장을 하고 큰 딸이 사준 커다란 보석이 박힌 귀걸이를 달고,

예쁜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반짝이는 장식이 달린 구두를 신고,

큰 아들이 사준 명품 가방을 들고,

우아한 발걸음으로 자매님들을 만나러 가는 일이 유일한 춘자의 기쁨이었다.


집안청소며 설거지며 딸자식들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소 발바닥 같이 거칠어진 두꺼운 손에 하얀 레이스 장갑을 끼는 것은 절대로 잊지 않았다. 레이스 장갑에 살짝살짝 보이는 화려한 반지를 끼는 것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어느 날,


병원에 자주 진료를 오던 남자와 사귀고 있다는 둘째 딸 미영이의 고백에 춘자는 미영의 말을 끊고 대뜸

성씨가 뭐냐? 하고 물었다.


“박 씨는 절대 안 된다!”


박 씨 성을 가진 사람을 집안에 들이면 안 된다는 사이비 종교 교주의 예언이 다시금 생각난 것도 께름칙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춘자의 자존심을 패대기쳐버리면서도 큰아들의 여자 며느리 박 씨를 집안에 순순히 들였던 뼈아픈 기억이 다시 새겨졌던 것이다.


춘자의 부글부글 끓는 속도 모르는 둘째 딸이 입을 멍하게 벌리고 있더니 미친 듯이 신경질을 부렸다.


“엄마 그게 중요해?”


착하고 얌전한 미영이가 미간에 개천자 주름을 만들며 인상을 쓰고 소리쳤다.


“어떤 사람이냐, 나이가 몇이냐, 얼마나 사귀었냐, 너한테 잘해주냐, 직업은 뭐냐, 집은 어디냐, 뭐 이런 건 안 궁금해?”


춘자는 입을 다물었지만 눈에 쌍심지는 풀어지지 않았다.


“임 씨야, 임 씨. 그럼 됐어?”


그럼 잘 됐구먼. 춘자의 눈두덩이가 땡땡하게 부어올랐던 두꺼비의 배가 훌쭉해진 것 마냥 쭈그러졌다.


그려.

니 인생이니, 니가 알아서 살아라.




둘째 딸 미영이의 남자는 자원사업을 한다고 한다.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춘자는 무슨 일을 하는 사업인지 모르겠다. 자원사업인지 고물상인지 알게나 뭐야. 단지 월급쟁이가 아니라 자기 사업을 한다니 돈은 많이 벌겠지 하고 두둑한 용돈을 받을 수 있겠다는 희망에 결혼을 허락했다.


지들끼리 좋아해서 한 결혼이니 깨가 쏟아질 정도로 잘 살겠거니 하고 북극곰 한 마리 무게 만한 어깨의 짐을 내려놓고 지낸 지 3년도 안된 어느 가을날,

쌀쌀한 바람에 휘말려 바닥에 뒹구는 낙엽마냥 바삭바삭 메마른 얼굴을 하고 미영이가 가방을 들고 집으로 들어왔다.

임서방과 못살겠다고.


있는 일 없는 일, 천방지축으로 떠벌이는 큰딸 미정이와는 달리 얼굴에 감정 표현을 숨기는 미영이다.


간간이 친정 나들이랍시고 왔을 때에는 별일 없는 얼굴로 보였기에, 달달한 신혼생활이 아니더라도 그럭저럭 불만 없이 지내는 줄 알았다.


그동안의 서러움이 목구멍으로 터져 나왔는지 미영이가 저리 서럽게 울어대는 것을 춘자는 이태껏 보지 못했다.


게임에 미친 임서방과는 깨 볶는 신혼생활은커녕 수도원의 수녀생활과 다름없었고, 시집식구들에게 월급 없는 식모 취급을 받으며 매일매일 괴롭고 외로운 시간을 보냈단다.


더 이상 참지 못한 미영은 대충대충 손에 잡히는 대로 옷 가방을 싸고 시부모와 남편에게 아무 말도 없이 집을 나왔다고 했다.


그래도 임서방에게는 말을 하고 나와야지라던가, 시부모님한테 전화해서 잘못했다고 말씀을 드려라라던가,

여자 인생이 다 그러니 네가 참아라라던가.

이런 상황에서 친정엄마들이 흔히 말하는 위로와 가르침 따위 머릿속에서 생각도 하지 않았다.


춘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집을 나왔을까 하는 친정엄마로서의 딸을 생각하는 마음도 가슴속에 일지 않았다.


춘자는 오른쪽 광대를 일그러뜨리며 힘겹게 입술을 움직였다.


니 인생이니, 니가 알아서 살아라.


미영이가 가방을 들고 집으로 온 일주일 후쯤, 안사돈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렇다 저렇다 말도 안 하고 경우도 없고 예의도 없이 집을 나갔으면 이것으로 내 아들과의 인연을 끊겠다는 의미로 알고 우리도 정리하겠습니다.”


춘자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네. 그러시죠. 지들 인생이니 지들이 알아서 결정했겠죠.”


꺼이꺼이 울어대는 미영이의 울음소리를 등지고 춘자는 불 꺼진 자기 방으로 들어와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화장대 거울에 비친 얼빠진 자신의 네모난 얼굴을 보고 읇조렸다.


젠장 할, 박 씨가 아닌데도 이 모냥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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