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왕 고추 손자를 낳다.
봄이다.
춘자가 태어난 봄이다.
봄날처럼 따뜻하고 온화하게 살라고 춘자라고 이름을 지어준 아버지가 보였다.
그리고,
춘자의 눈에 아지랑이처럼 아련한 고향의 정겨운 모습이 나타났다. 친정 엄마가 부엌 아궁이 앞에서 불을 때며 가마솥에 구수한 냄새가 나는 무엇인가를 만들고 있었다. 가슴이 따뜻해지는 이 냄새는 춘자가 좋아하는 누룽지를 끓이고 있나 보다.
집 앞에 펼쳐진 춘자네 밭에 간밤의 빗물을 머금은 초록색 채소가 가득하다.
상추와 오이, 애호박, 고추.
어느새 춘자는 밭고랑 사이로 들어가 기다란 몸을 허우적거리며 탐스런 열매를 따고 있다. 바구니 한가득 오이와 애호박을 따고 옆 고랑의 고추 밭으로 갔다. 초록색에서 빨간색으로 물들기 시작한 고추가 주렁주렁 달려있다. 오늘 저녁은 하얀 쌀밥에 내가 딴 가장 큰 고추를 칼칼한 고추장에 콕, 찍어먹어야지 하며 춘자는 이리저리 눈을 휘둥거리며 가장 큰 고추를 찾았다.
손을 뻗어 대왕 고추를 잡고 꼭지를 가지에서 똑 따냈다.
그런데 한 손에 가득 묵직하게 차도록 잡힌 대왕 고추 하나가 손바닥에 축 늘어지더니 시꺼멓게 들러붙었다.
에구머니나!
재수 없게 뭔 일이람!
손바닥에 눌어붙은 썩은 고추를 떼어내려 손을 마구마구 흔들어댔다.
퉷! 퉷! 퉷! 침을 뱉으며.
손이 찌릿찌릿 저리고 아파서 눈을 떴다.
꿈을 꾸면서도 손을 허우적거렸는지 손목에서부터 어깨까지 통증이 왔다.
큰아들의 여자가 아들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들에게 느낀 배신감으로 악몽을 꾼 게 틀림없다. 어쨌든 기분 나뿐 꿈이다.
바람이 불지 않아도 배의 닻을 올리면, 그 배는 물결의 움직임에 따라 항구를 떠나는 법.
그렇게 큰아들은 청담동 그녀, 박 씨 여자와 결혼했다.
결혼식을 올린 지 10달도 안되어 손자가 태어났다.
춘자에게는 두 번째 손주이다.
큰딸 미정이가 낳은 손녀딸 수진이 역시 엉겁결에 품에 안게 되었다.
며느리의 친정엄마라는 사람은 신사동에서 큰 게장식당을 한다더니 식당주인처럼 호방했다. 목소리도 크고 입도 컸다.
“신혼살림 장만하는데 돈 많~이 들었어요~. 큰 딸이라서 우리 집에서는 첫 결혼이구요~. 누구 못지않게 잘해주고 싶어서 가전제품이랑 가구들도 다 유명 브랜드 제품으로 들였구요~. 이불이랑 식기들이며….”
춘자는 쉬지 않고 지껄여대는 사돈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콧방귀를 뀌였다.
며느리 박혜진은 전문대학을 졸업했다고 한다. 최종학력이 고졸인 큰아들이 좀 꿀리는 면이 마음에 걸려 시어머니 노릇을 하기에도 눈치가 보였다. 아들의 씨를 품고 당당하게 춘자의 집으로 밀고 들어온 며느리의 기세에 춘자는 대항할 자신도 없었다.
며느리의 여동생은 발레를 전공했는데 미국여행을 하던 중 만난 재미동포 2세의 엘리트 남자가 여동생의 미모에 빠져 애걸하다시피 구혼을 해왔다는 둥, 그쪽 부모님까지 적극적으로 혼담을 밀어붙이니 어쩔 수 없이 결혼시켜 미국으로 보내야 하지 않겠냐는 둥, 며느리의 오빠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알아주는 대학교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일류기업의 가구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는데 일이 많고 바빠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지만 그 공로가 인정되어 곧 승진할 것 같다며,
춘자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도 푸념을 하는 척하며 지자랑 질을 끊임없이 해대고 있다.
사돈의 푼수 없는 수다를 듣는 둥 마는 둥 귀를 기울이지는 않았지만, 춘자는 자신의 입장이 초라하다고 생각했다.
큰딸의 아파트 방 한켠에서 몸도 못 가누며 병치레하는 남편도 자랑거리가 아니며, 아들의 학력도 자랑거리가 아니다. 무엇보다 며느리 집안보다 부자도 아니고, 이혼 한 큰딸의 자식을 키워주며 큰딸에게 생활비를 받아 근근이 살아가는 춘자의 일상이 자랑할 게 하나도 없는 처지이다.
저렇게 춘자 앞에서 자식자랑, 돈 자랑하느라 썰면 두 접시 정도 될 크고 두꺼운 입술을 다물지 않는 며느리의 친정엄마를 보며 춘자는 기어가는 소리로 혼잣말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