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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rk choi Jul 15. 2019

마케터는 '사고 수습반'이다

마케터를 꿈꾸는 이들을 위한 8년차 마케터의 미세팁 - 6화

매일 터지는 사고를 '사고'라고 부르는 게 맞는 것일까.


드라마 '미생'을 보면, 매회 예상치 못한 사고들이 빵빵 터진다. 납기에 문제가 생겼다는 전화를 받는 선배 직원의 모습은 일상 장면처럼 빈번하다. 차가 막혀 상사가 늦는 바람에 인턴이 대신 거래처의 VIP를 응대하러 나간다든지, 오징어 납품 업체에서 꼴뚜기를 섞는 바람에 말단 직원들이 직접 냄새나는 트럭에 올라 팔을 담그며 검수를 하는 '극적인' 장면들도 거의 매회 등장한다.


드라마니까 물론 과장된 측면도 있겠지. 하지만 '미생'이라는 드라마가 많은 직장인들의 공감을 이끌어내며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현실적인 측면도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나는 드라마를 보면서 폭풍 공감을 했었는데, 내가 경험했던 회사의 일상이 바로 그러했기 때문이었다. 크고 작은 '사고'와 뒤따르는 '수습'이 하루 일과의 절반 이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오징어 젓갈에 꼴뚜기가 섞여버린  사고, 손을 담궈서라도 찾아야 한다 _ TVN

대기업인데 그렇게 사고가 많아요?

큰 회사는 시스템이 잘 갖추어져 있어서 각자 주어진 일만 착실히 하면 평온할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사고가 없는 날은 오히려 '뭔가 놓치고 있는 것이 없나' 불안할 정도니까. (물론, 규모가 작은 회사는 더욱 심할 수 있다. 실제로 소규모 회사로 이직한 동료는 사고가 없는 날을 '명절(!)'이라고 표현하였다...) 신입사원 시절, 내가 마주한 사무실 풍경도 참으로 '극적'이었다. '아, 또 사고 터졌어!'라고 한탄하며 식사 거르수습할 방법을 찾아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마케터들... 나름 회사에서 인정받는 선배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고를 '지 않는' 것은 사실상 불가해 보였고, 터진 사고를 잘 '수습하는' 능력이 곧 이 회사에서 살아남기 위한 핵심 역량처럼 느껴졌다.


왜 이렇게 사고가 많은 건가요?

사고가 나는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크게 보면 순한 이유로 수렴된다. '급해서'다. 모든 일이 그렇듯, 급하게 하다 보면 탈이 나기 마련이다. '회사 일에 급하지 않은 것이 어디 있냐, 급한 상황에서도 잘해야지!'라는 원론적인 얘기, 이해는 간다. 하지 리는 뒤에서 커다란 돌덩이가 굴러 떨어지는 상황에서도 열심히 달려 간발의 차로 위기를 모면하는 인디아나 존스가 아니지 않은가. 우리 같은 범인들은 내리막길에서 그렇게 급하게 뛰다 보면 앞으로 고꾸라지는 것이 정상이다. 특히 트렌드가 매우 빠르게 변화하는 산업군의 마케터를 꿈꾸고 있다면, 신발끈을 단단히 매 두는 것이 좋다.

출시 일정이 다가오고 있어!  _ 인디아나존스

빠른 물살에서 물고기를 찾는 덩치 큰 곰

그래도 대기업은 조금 낫지 않냐고? 큰 회사일수록 잘 갖춰진 시스템의 혜택을 보는 것은 맞다. 하지만 대기업이라도, 아니 오히려 대기업이라서 벌어지는 사고도 있다.


내가 몸 담은 소비재 산업은 'FMCG(Fast Moving Consumer Goods)'라는 별칭처럼 트렌드가 매우 빠르게 변한다. 그리고 회사들은 그 빠른 변화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특히, 2등은 곧 아류(좋은 말로 'me-too')가 될 수밖에 없는 좁은 한국에서는, 새로운 트렌드에 가장 먼저 대응하여 선두의 위치를 '선점'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문제는, 덩치가 큰 대기업일수록 빠르게 흘러가는 트렌드를 선점하기는커녕, 뒤따라가기에도 숨이 찰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거 저번에 제안드렸던... 읍읍

한 가지 전형적인 경우의 사례를 들어보겠다. 어떤 특정한 트렌드가 발달하여 점차 사람들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하자. 가장 먼저 그 트렌드를 상업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누구일까? 큰 회사는 그 보수적인 성격 때문에, 트렌드가 막 형되기 시작 초기 상태에서는 '니치(niche)'하다는 이유로 사업에 적용하기를 하기를 꺼려한다. 게다가 그 트렌드가 어느 정도 대세화 되는 시점에서도, 그것을 리더들에게 보고하고 설득하기까지는 또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우리 전무님이 이 '갬성'을 아실까...?)


이윽고, 계절이 지나 열매가 맺히듯 트렌드는 무르익고 또 무르익은 상태가 된다(...) 이미 무수히 많은 작은 회사들이 그 무르익은 열매의 달콤한 혜택을 보고 있는 상황에서, 누군가 그 열매 하나를 어디선가 주워와 마케팅 실무인 당신의 발등 위에 툭 던지면서 얘기한다. '이게 요즘 대세라는데 우리는 도대체 뭐 하고 있는 거야?!'


급하니까 *르메스 오렌지 컬러로 해주세요!

'그래서 내가 이거 하자 그랬잖아!'라고 투덜댈 시간도 없다. 미투 행렬에 빠르게 동참(좋은 말로 'fast-follower') 하기 위해 무리하게 급한 일정을 잡는다. 마케터는 급한 마음에 연구소, 디자인, 구매 등 각 관련 부서들에게 긴급한 건이니 신속히 진행해달라고 강조하지만, 다들 당장 일을 서둘러 진행하기 보다는 불만부터 토로하기 바쁘다. 그런데 그들의 불만이 이해가 되할 말이 없 것도 사실이다. '솔직히, 급하지 않았던 적이 있긴 있었던가?'


게다가 더욱 불만을 부추길 수밖에 없는 것이, 급하다 보니 뭐든지 '겉핥기식'이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트렌드가 도대체 왜 생겨났는지', '어떤 소비자층과 어떠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지'와 같은 트렌드의 본질적인 측면에 대한 분석을 할 여유가 없기 때문에, 소재나 디자인 등 외연적인 측면을 모방하는 형식으로 방향성을 줄 수밖에 없. 쉽게 말해, '이거랑 비슷하게 만들어주세요, 빨리!'인 것이다.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할 맛이 안 날 수밖에 없다.

파란색 바탕에 동물 넣어주시고, 퓔(FIL)! 충만하게 부탁드려요 _ 서울경제신문

시작이 반이라고요? 네... 반을 망쳤네요.

그리하여 결국 '사고'가 난다. 우선 앞에서 언급했듯이, 말도 안 되는 급한 일정으로 업무를 진행하다 보니, 어딘가에서 누군가 실수를 할 확률이 높아지고, 문제가 터지기 마련이다. 그나마 실수를 줄이려면 모두가 집중력을 유지하며 꼼꼼히 챙겨야 하나, 겉핥기식으로 흉내만 내자니 그럴 의욕도 떨어진다.


컨셉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를 조직 구성원들이 모두 공유한 상태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해야 애초에 의도한 결과물이 나올 수 있을뿐더러, 신속한 의견 일치를 이끌어내어 협의 과정에 소요되는 일정도 단축할 수 있다. 반면, 겉핥기식으로 트렌드의 외연만 좇은 프로젝트는, 협업하고 보고하 과정에서 이 사람 저 사람 주관적인 취향에 따라 이랬다 저랬다 계속 뒤집어 엎게 된다. 왜냐하면, 모두가 이해하고 있는 것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방향성이 휙휙 바뀌며 수정, 재수정의 과정에서 일정은 더욱 빠듯하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누적이 되어 결국 일정 관리를 담당하는 마케터가 감당해 할 무거운 짐이 된다.


김대리, 일정대로 출시 가능하지?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정해진 일정을 어떻게든 맞춰야 하는 프로세스 관리자의 역할을 담당하는 '마케터'는 항상 사고의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으며, 무슨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항상 전전긍긍하게 된다. 솔직히, 무리한 일정의 프로젝트를 받으면, 시작할 때부터 사고의 느낌(?)이 강하게 온다. 급하고, 정신없고, 그래서 실수하고, 다들 의욕은 떨어지고, 위에서는 자꾸 바꾸고...

더욱 큰 문제는, 퀄리티를 높이는 것은 어느덧 욕심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일단 사고를 잘 수습해 제시간에 무사히 일을 끝마쳐야 한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 차게 되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퀄리티에 소홀하게 된다. 무사히 제 일정에 프로젝트를 끝내고 나서도, 끝났다는 안도감과 동시에, 챙기지 못한 퀄리티에 대한 아쉬움을 함께 느끼게 되는 경우가 많다.


여기, 사고 하나 추가요

게다가, 엎친데 덮친 격으로 '사고'가 완성품(?) 형태로 넝쿨째 굴러들러 오기까지 하면 가히 지옥이 따로 없을 정도다. 예를 들어, '어떠한 성분이 인체에 유해하더라'라는 식의 뉴스가 도는 경우다. 특히 인체에 직접 작용하는 식품이나 화장품 등의 산업은 성분 이슈 등에 큰 영향을 받게 된다. 실제 법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다 하더라도 (심지어 사실 무근의 가짜 뉴스라도) 한 번 매체를 타고 보도되면 일파만파 괴기스러운 소문들로 변질되어 소비자들 사이에 회자된다.


아무래도 대기업일수록 더욱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요구받기 때문에, 제로는 당당하다 하더라도 몸을 사릴 수밖에 없다. 정말 법적으로 이상이 없으면 '법대로 합시다'라고 말하면 되지 않느냐고? '겸손하지 못한 비도덕적인 대기업' 소리를 듣기 딱 듣기 좋다. 결국 마케터는 (합법적이지만 미움을 받는)'문제의 성분'을 긴급하게 대체해야 하는 미션을 받게 된다. 당장 뉴스가 터진 상황이기 때문에 일정은 '아삽(ASAP)'이다. 이러한 외부요인은 미리 대비할 수도 없고, 천재지변과 같이 누굴 탓할 사람도 없어서 더욱 억울하다.


아... 아모르파티

결국 '사고'는 마케터가 감당해야 할 숙명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조용할 날이 없다. 피할 수도 없다. 여기저기 빵빵 터지는 사고를 쫓아다니다 보면 사고 수습반이 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정신을 차리고 각 부서 담당자에게 일정을 조금씩 앞당겨달라고 굽신거리며 전화한다. 수화기 너머에서 돌아오는 날카로운 대답이 나의 자존심에 예리한 상처를 낸다.


'거봐, 내가 급하게 하면 사고가 난다고 했었잖아요!'

'다른 일도 지금 산더미예요. 제가 담당자님 일만 하는 사람은 아니잖아요?'

'급하지 않은 적이 있었어요? 맨날 이렇게 일하시는 거 좀 문제 아니에요?'

'뚜- 뚜-' (전화를 받지 않는다)


각 부서 담당자들을 달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반복되다 보면 더 이상 레퍼토리가 남지 않는다. 실제 마케터를 그만둔 동료들은 이렇게 '아쉬운 소리' 하면서 죄인 취급당하는 것이 가장 큰 스트레스였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아무리 그래도 사랑까지는 못 하겠어...

시간의 방에서 나와보니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마케터를 그만둔 동료들이 나중에서야 하는 얘기들이다. 그래도 그 고생하면서 배운 것이 있었다고. 매일 사고에 치이고 급하게 수습을 하는 과정을 겪고 나니, 어지간한 일에도 흔들리지 않는 강한 멘탈과,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도 차분히 풀어가는 힘이 길러진 것 같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며...) 세상의 풍파를 다 겪어낸 사람처럼 비록 몸과 마음은 지쳤지만, 든 상황에서도 담대한 태도로 냉철함을 잃지 않고 당면한 문제를 헤쳐나가는 '문제해결력'이 길러졌다고나 할까.


특히, 이러한 문제해결력은 '리더'로 성장하길 원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길러야 할 역량이다. 직원들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여 현업이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은 리더에게 요구되는 핵심적인 자질이기 때문이다. 직급이 올라갈수록 매일 필수적으로 루틴 하게 진행하는 실무형 업무는 적어지는 대신, 리더의 자리에서만 대응 가능한 복잡한 문제들을 처리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게 된다. 더 큰 자리를 맡을수록 직면해야 할 문제는 더욱 복잡하고 어려워지기 때문에, 그에 걸맞은 더욱 강한 멘탈과 뛰어난 문제해결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인턴 기간 때 회사 임원과의 세미나가 있었는데, Q&A 시간에 아무도 질문을 하지 않아서 뻘쭘함을 못 견디고 손을 들어 질문을 했던 기억이 난다. '사업부장님께서는 무슨 일을 하십니까?' 사업부장님이 허허 웃으며 대답했다. '사실 요즘 별로 할 일이 없습니다. 다행인 거죠. 제가 바쁘면 뭔가 사업부에 문제가 있다는 거거든요.'


리더의 역량이라고 미뤄두기엔...

'리더'가 되는 문제는 너무 나중 얘기라고?물론 그럴 수 있다. 그런데 문제 해결력은 정말 리더에게만 요구되는 역량일까? 시대적 흐름이 점점 더 빠르게 변해가는 만큼, 낮은 직급의 실무 담당자들에게도 문제 해결력이 점점 중요한 역량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회사에서는 급변하는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작고 빠른 조직으로의 변화를 추구하고 있고, 실무선에도 많은 권한을 주어 수시로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해 대응하고자 하는 것이 현재의 추세이다. 따라서 차 실무 담당자들도 단순히 문제를 윗선에 '보고'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범위에서 '직접' 문제에 대응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질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이 바닥에서 물 좀 먹었구나?

소수가 향유하던 것들이 갑자기 급물살을 타듯 큰 트렌드가 되어 침체된 브랜드를 살려내고 새로운 산업을 만들어내는 엄청난 기회가 되는 시대. 한 두 사람이 제기한 불만이 거대한 메아리가 되어 돌아와 거대한 회사도 휘청이게 할 만한 위협이 되시대. 이렇게 기회와 위협 요인이 급변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항상 '사고' 앞에 자유로울 수 없을지도 모른다.

배 터지게 짠 물 먹다 보면 베테랑 서퍼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_ CNN

그렇기 때문에, 어차피 피할 수 없다면 아예 처음부터 큰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에 몸을 맡겨보는 것도 방법이란 생각이 든다. 특히 자신이 몸 담고자 하는 분야가 잔잔한 호수와 같은 곳이 아니라면 더욱 그러하다. 혹시 또 모르지. 큰 파도에 휩쓸려 바둥거리며 물 좀 먹다 보면 어느새 높은 파도를 신나게 타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될 지도.




본 글은 '마케터의 역량' 시리즈 3편 중 2편, <문제 해결력> 편입니다.


1. 사업에 대한 감각

2. 문제 해결력

3. 다양한 대상과의 커뮤니케이션 역량


본 글의 배경이되는 글은 아래의 링크를 참조하세요.


https://brunch.co.kr/@mark-choi/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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