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하우스 마케터와 디자이너의 관계
세상엔 많은 유형의 사람이 있고 같은 직군에 몸담은 사람들도 일하는 스타일이 다르다.
나는 마케터로 일하면서 나름 많은 유형의 디자이너를 만났다.
바늘과 실, 후라이드와 양념, 마른안주와 맥주처럼(?) 마케터와 디자이너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회사 안에서 만난 이상 싫어도 우리는 같이 일하고, 협업하고, 의견을 나누어야 하며 서로가 배려하지 않으면 모두가 피해를 보는 존재이기도 하니까.
마케터로써 가장 보람을 느끼느 순간 중 하나를 꼽자면, 내가 퇴사를 하거나 하는 일로 더이상 같이 일하지 못하는 디자이너가 "다시 당신하고 일하고 싶다."라고 말해줄 때다. 그런 말을 들으면 '아, 내가 나름 괜찮게 일했었구나'를 느끼며 뿌듯함을 느끼곤 한다. 그러면서 새삼, 나와 잘 맞는 디자이너(그들의 입장에서는 잘 맞는 마케터)와 일하는 것이 얼마나 운이 좋으며 감사한 일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 말했던가, "디자이너와 마케터는 사이좋게 지낼 수 없다."라고.
나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공감하지 않는다.
이해와 배려가 수반된다면, 우리는 최고의 파트너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의 신입 시절, 온라인 마케팅 대행사에서 만난 첫 디자이너는 굉장히 디테일하고 섬세한 사람이었다. 콘텐츠 기획안을 절대 대충 받는 일이 없을 정도로 말이다.
어느 정도였냐면 기획안 내에 무조건 제품 누끼가 삽입되어야 하며(도형 삽입해놓고 제품 이름 써놓는 거 안됨) 오브젝트 위치 지정은 물론이고 텍스트의 위치, 컬러, 볼드, 텍스트 박스 등의 디자인 디렉팅을 모두 기획안 안에 담아내야 디자인을 시작하는 분이었다.
누군가는 "그냥 강조해달라고 하면 볼드나 텍스트 박스 정도는 알아서 할 수 있지 않아?"라고 했지만 그분은 아니었다. 기획안이 그대로, 정말 그대로 디자인으로 나왔다.
위 기획안은 내가 이전 회사에서 만든 상품 상세페이지 기획안인데 딱 저렇게 텍스트와 후기 사진 그리고 그 순서, 텍스트를 강조해야 하는 텍스트 박스의 테두리, 컬러 코드까지 모두 지정해 준 후 비로소 디자인 작업을 시작하는 분이었다.
그때 당시는 '너무 까다롭고 힘들다'라고 생각했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는 그분이 이해되기도 하며, 그분 덕분에 내가 기획안을 보다 꼼꼼히 쓰는 습관을 들인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좀 들기도 한다.
지난 글에서도, 아니, 디자이너에 관련된 언급만 하면 내가 빠지지 않고 말하는 것이 바로 레퍼런스이다. 레퍼런스를 주지 않고 마케터와 디자이너가 서로 특정 콘텐츠의 '느낌'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마치, 문과생과 이과생이 대화를 하는 듯한 우스운 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더 웃긴 건, 레퍼런스 2-3장을 보여주는 순간 서로 '아 이거!' 한다는 것이다.
이전에도 말했지만, 세 장의 보고서보다 세 장의 레퍼런스가 훨씬 빠른 이해를 돕는다.
같은 느낌의 레퍼런스여도 어떤 브랜드에서 제작했느냐에 따라 또 그 느낌이 다르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바는 명확히 담겨있으니 새로운 콘텐츠를 기획하고 있다면 기획 방향과 메시지를 전달함과 동시에 내가 생각하는 디자인이 담긴 레퍼런스를 꼭꼭. 잊지 말고 주도록 하자. 디자이너도 의견을 줄 때 레퍼런스로 이야기할 것이다. (적어도 내가 만난 디자이너들은 그랬다.)
물론 레퍼런스만 달랑 던져주라는 것은 아니다.
충분한 설명과 의도, 통일성이 필요하다.
나는 정말 운이 좋게도 능력 있는 디자이너들을 많이 만났는데, 그중 아주 짧은 기간 빌런(?)을 만나 같이 일한 경험도 있다. 우선 그녀는 디자이너라고 칭하기 미안할 정도로 그 어떤 상세페이지, 콘텐츠에도 '디자인'을 발휘하지 않았는데. 상세페이지 기획안을 주면 클립아트 코리아에 있는 PSD 파일을 그대로 받아와, 텍스트와 사진만 변경하여 그대로 사내 단체 메신저에 자랑스럽게 공유하였다. 그리고 약 한 달 뒤, 그녀를 회사에서 볼 수 없었다.
그런가 하면 디자인 빌런만 있는 건 아니다. 얼마 전 친한 디자이너가 "새로 입사한 마케터가 상세페이지 기획안을 줬다!"며 PPT 파일을 보내줬는데, 제품의 우수성을 너무나 상세히 설명하고 싶은 그녀의 진심이 담긴듯한 정말 방대한 양의 텍스트가 있었고-
그 텍스트는 모두 이미지 처리가 되어 단 한 글자도 복사할 수 없었다.
이 글을 쓰기 얼마 전, 우리 회사에 오래 다닌 디자이너가 퇴사했었다.
그는 내가 입사했을 때 우리 브랜드 SNS 채널 개편을 함께 했던 크루라서 정도 많이 들었고 이곳이 첫 회사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일도 정말 잘 했다. (프로세스가 잡히지 않은 스타트업에서 프로세스를 열심히 만드느라 애쓰기도 했다.)
오늘 이 글을 쓴 이유는 그가 떠나면서 '콘텐츠팀과 일하면서 마케터들과 일하는 것은 이런 거구나 알게 해줘 고맙다'라는, 잊지 못할 한마디를 남겨주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떠날 때 내게 좋은 기억으로 남는다는 것,
그리고 내가 떠나는 누군가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을 수 있다는 건 정말 기쁜 일이다.
그래서 내일도, 아무튼 출근해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