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대학생이지만 동아리는 아니고요, 법인입니다. (2019-2021)
2020년 겨울, 서울 본사로의 발령을 앞두고 걸려 왔던 주영의 전화 한 통이 내게는 큰 울림이 되었다. 우연히 그 무렵 메리의 기획 단원이 메리의 창립 멤버 3인의 인터뷰를 요청한 덕분에 나는 주영, 민지와 자연스럽게 약속을 잡았다. 약 2년 만의 재회였다. 우리는 오랜만의 재회를 기념하기 위해 다같이 옷을 맞춰 입고 셀프 스튜디오에서 사진을 찍었다.
<메리 매거진> 인터뷰를 마친 뒤에는 강남역 인근의 스시집에서 식사를 했다. 가장 우측 창가 자리에 재원, 민지가 나란히 앉고 맞은 편에 주영이 앉았다. 으스러질 것 같은 이 식당의 스시가 주영의 취향이라고 했다. 몰랐던 정보라서 새삼스러웠다. 그렇다고 2년의 공백기가 마냥 어색하지만은 않았다. 꽤 길었던 시간 동안 우리는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성장했다고 느꼈다. 적어도 나는 사회의 쓴 맛(?)을 경험하며 여러 방면에서 성숙해졌고, 감정을 솔직하게 다스리는 법을 깨우쳤던 것 같다. 내가 없는 동안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의 공백이 둘에게 어떻게 다가갔을지 그리고 이들이 고생했을 모습이 훤히 보여서 어쩐지 대화를 할 수록 눈물이 촉촉하게 맺혔다. '민지는 왜 우냐?'하고 묻는 주영의 핀잔이 얄미웠다. 매장이 너무 밝아서 눈물을 훌쩍일만한 분위기는 아니였는데, 스시가 제법 짭조름하다며 웃었다.
그동안 메리는 1기 프로젝트를 공모했던 주최측인 한국메세나협회와 다시 인연이 닿았다고 했다. 동아제약 박카스로부터 정기 후원을 받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전례 없는 코로나19의 후폭풍으로 문화예술계가 밑바닥까지 침체되어 연습실 대관이 어려워지자, 신촌에 스튜디오메리를 임대했다고 한다. 다행인 것은 이 모든 것이 우리가 법인이여서 가능했다고 한다. (코로나19 하의 정부 방침 상 '목적 사업'에 해당하는 활동은 다인 집합이 허용되었다. 우리는 일개 동호회가 아닌 문화봉사 서비스를 제공하는 비영리 사단법인이었다.) 이 때만큼은 '너희가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도록 법인화를 하자'고 말 한 주영의 진심이 크게 다가왔다.
단지 나의 20대 절반을 바친 단체여서 이대로 손을 떼기에 아쉽다는 생각만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내가 그리고 싶은 나의 미래를 생각하고, 나의 꿈을 고려했을 때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생각했다. 그 과정에 메리가 있었다. 갓 성인이 되자마자 창단했던 단체였고, 그래서 너무나 큰 책임감을 떠 안게 되어 도망치고 싶었다. 실제로 취업을 하며 2년의 공백을 가졌기 때문에 복귀를 결정하면서 그 큰 책임을 감당하기 겁이 났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이 단체를 더 키워보고 싶다는 용기가 더 크게 다가왔다.
메리가 7번째 생일을 맞이하던 2021년, 나는 법인의 HR 그리고 전략기획을 담당하는 조직을 신설하겠다고 밝혔다. 더 이상 메리오케스트라와 메리콰이어의 단원으로 함께하지는 않지만 그들을 위한 다양한 공연과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40여 명의 메리클로스(기획팀의 애칭이다. 오글거릴 수 있지만 산타 클로스의 그 '클로스'가 맞다.) 대학생 단원들을 총괄하는 역할이었다.
오래 전부터 민지, 주영이 했던 이야기가 있다. 청소년과 대학생에 그치지 말고 사회인, 그러니까 시니어로 불리는 세대까지 메리오케스트라가 아우를 수 있다면 얼마나 멋있을까? 상상만해도 멋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자녀부터 부모 세대까지 온 가족이 함께하는 생활예술 플랫폼이 될 수 있지 않은가.
소싯적에는 메리오케스트라에 재원이, 메리콰이어에 민지가 매 합주마다 밀착 관리를 해야지만 단체가 운영되었다. 한 5년차가 넘어가면서부터는 우리들이 대표로 존재하지 않아도 단체가 운영될만큼 기획팀 메리클로스 구성원들의 역량이 커졌고 우리는 이미 강원지부를 통해 자체 사업 구조를 전파한 이력도 있었다.
더군다나 코로나19로 인해 반강제적으로 결심하게 되었지만, 신촌에 스튜디오를 임대하여 운영하게 된 참이었다. 임대료를 충당하기 위해서라도 평일을 활용한 신 사업을 개발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지금까지 메리의 사업들은 모두 주말, 주영이 교회를 가지 않고 일정이 비어있는 때에 운영해왔으므로 평일에는 기획회의를 제외한 일정이 없었다.) 코로나19로 인해 프리랜서로 활동하던 주영의 스케줄에도 변화가 생긴 찰나, 우리는 스튜디오메리 신촌점에서 '직장인 오케스트라'를 운영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신규 사업을 운영하려하니 브랜딩 측면에서 고민이 시작되었다. 메리오케스트라, 메리콰이어에 이은 타겟의 변화다보니 이름을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부터 망설였다. 고심 끝에 '청춘'이란 단어를 골랐다. 노골적으로 '시니어'라는 표현은 지양하고 싶었고 '직장인'이란 단어는 재직 여부에 따라 단체 활동 여부가 걸려있지 않기에 배제해야 했다. 마치 메리오케스트라가 대학생 오케스트라지만, 대학 재학여부에 상관 없이 청소년이라면 누구나 단원이 될 수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청춘이란 단어를 떠올리니, 기존 대학생을 포함한 청소년 단원들을 '청년'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메리오케스트라라는 단체명을 두고 청년과 청춘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붙일 지 고민하다가, 가운데에 넣어 분류했다. 그리고 우리는 단원들을 '메리'라는 호칭으로 부르니까 이제 메리청춘오케스트라의 청춘 메리들, 그리고 메리청년오케스트라의 청년 메리들로 부르게 되었다.
신규 사업은 생각 외의 난항을 겪었다. 수년 간 오케스트라 단원 모집은 해왔지만, 이번에 우리가 타겟팅하고자 하는 청춘/시니어 연령대를 어디에서부터 모객해야 할 지 몰라서 한참을 헤맸다. 기존 대학생 단원들은 에브리타임이라거나 취업 및 대외활동 커뮤니티가 명확했고 또 그간의 단체 인지도와 모집 바이럴 확산에 대한 경험치가 있어서 수월하게 모집하는 편이었다. (물론 쉬운 것은 아니다. 매 기수를 시작하기에 앞서 단원 모집은 정말 피를 말린다.) 그런데 30-70세대, 그것도 악기 연주를 희망하는 사람들을 당최 어디에서부터 불러 모아야 할 지 감이 서지 않았다.
이 때 빛을 발한 건, 법인으로 복귀를 하며 새롭게 창단한 '전략기획팀'의 존재였다. 기존에는 주로 오케스트라나 합창 단원으로 활동하는 대학생이 메리클로스로 활동했다면, 전략기획팀은 연주나 합창을 하지 않고 오롯이 기획만을 하는 단체였다. 문화예술 분야 기획 커리어를 쌓고 싶거나, 다방면에서의 마케팅 경험을 해보고픈 청년들이 모였다.
전략기획팀의 첫 번째 과제가 주어졌다. 특명, 메리청춘오케스트라 단원 100여 명을 모집하라. 법인의 전략을 담당한다는 사명감에 불타오른 첫 번째 기수는 보기 좋게 이 미션을 성공해 보였다. 먼저, 각자의 거주지를 다르게 설정하여 당근마켓 동네홍보 게시판에 과외/클래스 항목으로 홍보했다. 생각보다 효과는 미미했다. 그래도 한 분, 두 분 지원한다는 것이 감사했다. 둘 째로, 직장인들의 앱서비스인 블라인드에 홍보 게시글을 배포했다. 이건 직장인인 재원, 민지가 도맡았다. 셋 째로, 오케스트라 각 파트 별 커뮤니티를 검색해서 등업을 하고 홍보물을 배포했다. 네이버 포털에 검색이 유입되도록 메리 블로그에도 포스팅을 여러 차례 올렸다.
마음 같아선 오프라인 마케팅을 하고 싶었지만 2021년 당시에는 여전히 코로나19로 인한 정부 방침이 강력하던 시기여서, 시니어분들을 직접 만날 순 없었다. 그렇기에 온라인 마케팅에 주력할 수밖에 없었는데, 타겟이 상주할 것 같은 여러 채널을 조사하고 홍보 소재를 꾸준히 배포하며 단원을 모집했다. 그 결과, 목표 명수를 초과하는 첫 기수 단원 모집을 성공하게 된다. 놀랍게도 메리청년오케스트라 대학생 단원보다 더 많은 인원이 지원했던 기수였다.
코로나19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2021년 상반기, 그렇게 메리청춘오케스트라 1기는 무사히 시작할 수 있었다. 대다수 직장을 다니는 30~50대 메리들이 평일 저녁 반을 이뤘고, 스케줄 근무 또는 20대 휴학생이거나 취준생인 메리들이 평일 오전 반에 대거 분포했다. 메리가 한 번 더 도약하는 순간이었다. 1070세대를 아우르는, 나이와 실력에 상관 없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생활예술 플랫폼. 재원, 민지, 주영의 <메리 매거진> 인터뷰 내용이 현실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