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합창단, 메리콰이어(2017-2018)
광화문 광장에서의 문화봉사를 기획할 무렵 주영이 새로운 제안을 했다.
“우리 합창단 만들자.”
“합창이요?”
“전부터 메리가 커지면 꼭 사람의 목소리로 공연을 기획하고 싶다고 생각했어. 악기가 전할 수 있는 하모니도 물론 아름답지만, 사람의 목소리로 가사를 전달할 때의 감동은 훨씬 클 거야.”
사실 노래하는 걸 별로 즐기지 않는 편이라 처음 합창단 기획에 대한 얘기를 들었을 때 크게 끌리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의 오케스트라 주말 합주를 방문하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어떻게 합창단 시간까지 챙길 수 있을지 겁부터 덜컥 났다. 방어기제가 제법 세게 튀어나왔다. 그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주영이 또 다른 의견을 냈다.
“합창단 대표를 민지가 하는건 어때?”
3년 동안 메리를 운영하면서 대표라는 직책은 나 하나뿐이었다. 그렇기에 개인이 짊어져야 하는 책임이 상당한 편이었다. 당시 메리오케스트라 3기부터 청년 대학생 단원 명수가 대폭 증가했고, 청소년 단체를 최소 두 곳 이상 섭외하게 되었다. 우리 단원이 80명일 경우 모두 한 학교를 방문하는 건 불가능하기도 하고, 멘토링이라는 취지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기수에 2곳의 중고등학교와 함께했고, 청년 대학생 단원은 애초에 모집할 때부터 두개 타임 중 하나를 선택해서 지원하게 했다. 그리고 지하철 역에서의 문화봉사도 각 팀 당 한 번씩 운영했다.
종합해보자면 한 기수에 2개 팀으로 나누어 청년 대학생 단원이 중고등학교 음악실을 방문하는 멘토링을 진행했다. 문화봉사라는 목표를 향해 달려가야 했기에 거의 매주 평일에 1~2개의 학교를 방문했다. 물론 청년 대학생 끼리 진행하는 주말 정기 합주도 병행했다.
문제는 내 몸이 하나라는 것이었다. 대체 불가능한 오케스트라 대표의 존재로 모든 합주에 참석하다보니 매 주 대부분의 시간이 메리의 프로그램을 관리하는 데 쓰였다. 월요일엔 기획팀 정기회의, 평일에 청소년 단체 방문, 주말에는 청년 대학생 합주를 챙기는 식이었다. 게다가 인적자원을 관리하는 명목으로 기획팀이나 오케스트라 단원들 사이의 뒤풀이 행사도 빈번하게 운영했다. 그러다보니 겁이 날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렵 주영이 새로운 사업을 제안한 것이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두 번째 대표를 언급했다. 여러 생각이 겹쳤지만 오히려 새로운 사업으로 확장을 한다면 더 힘을 내서 활력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고민은 짧았고 실행은 빠르게 이뤄졌다. 처음 메리오케스트라가 그랬듯이 ‘프로젝트’라는 수식어에 단체 명을 붙였다. 오케스트라가 이미 한글이 아니었기 때문에 합창단에 걸맞는 ‘콰이어(Choir)’라는 단어를 선정했다.
합창을 할 수 있는 시설로 청량리에 위치한 동대문청소년수련관을 섭외하는 데 성공하면서, 곧바로 ‘프로젝트 메리콰이어’ 단원 모집 공고를 냈다. 스무 명 남짓한 프로젝트 단원들을 모집하고 가창시험을 보듯 처음 모이는 오리엔테이션 자리에서 한 번씩 목소리를 내며 즉석에서 성부를 나눴다. 오케스트라를 운영한 경험을 살려 매 주 토요일에 합창 연습을 했고, 약 두 달 뒤에 문화봉사를 기획했다.
프로젝트 메리콰이어의 첫 데뷔 무대는 영등포역으로 정해졌다.
프로젝트 메리콰이어의 데뷔 무대를 성황리에 마친 우리는 공식적으로 메리콰이어 1기를 출범했다. 그간 메리오케스트라를 다섯 기수나 운영해왔기에 기획하는 입장에서는 모든 것이 일사천리였다. 수월했다고 하기엔 사실 모집이 조금 힘들긴 했다. 메리오케스트라는 악기를 배우고싶다는 의지가 있는 사람들이 새로운 취미활동에 도전을 하듯이 관심을 갖기 마련인데, 메리콰이어는 성부를 나누어 노래를 해야하다보니 보편적인 대중가요를 즐기는 사람들의 니즈와 상충되는 면이 있어보였다.
"연주하는 산타, 노래하는 산타라는 워딩 어때요?"
"음악을 선물하는 산타라는 의미에서?"
엄연히 두 개의 단체이지만 개별 이미지로 온라인 홍보를 진행했을 때 정보가 유실되거나 분산될 것을 우려해서, 하나의 포스터로 제작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다보니 오케스트라 또는 합창으로 문화봉사단체에 지원하라는 다소 복잡한 커뮤니케이션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고 어느정도의 카피라이팅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내게 된 것이다. 메리가 한 여름에도, 추운 겨울에도 산타 모자를 쓰고 문화봉사를 하는 것에 대해 기획팀에서는 줄곧 '시민관객을 위해 음악을 선물하는 산타와 같은 메리'로 스토리텔링을 하곤 했다.
"오케스트라처럼 영어를 활용하기 위해 콰이어라는 단어를 썼지만, 사실 잘 모르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아서 말이예요. 그리고 '합창'이라는 단어보다 '노래'한다는 표현을 쓰면 조금 더 친근하게 느껴지고,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은 많을 것 같아요."
그렇게 연주하는 산타, 노래하는 산타를 동시에 모집하게 되었다. 더디게 모집되긴 했지만 프로젝트 메리콰이어 단원들과 이런 저런 새로운 인연이 모여 메리콰이어 1기는 서른 명 남짓한 인원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메리오케스트라 1기의 모습과 닮아있다고 생각했다. 한 단체를 애지중지 키웠고 또 다른 차원으로 세계관이 확장되는 기분이었다. 약 4년의 시간 동안 '메리'는 제법 큰 규모의 문화예술단체가 되었고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활동을 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 쯤 이름을 들어본, 멋진 공연을 기획하는 단체로 제법 입소문이 났다.
재원이 메리오케스트라 합격자를 대상으로 단체 카톡방을 만들고 발대식 안내문을 구성하면, 민지가 메리콰이어 합격자를 동일하게 관리했다. 척 하면 척, 단체 운영 4년차가 되니 여러 번의 루틴을 경험해 본 달인이 된 것처럼 우리는 손과 발이 맞았다. 악기를 이고 삼삼오오 모이던 오케스트라 단원뿐 아니라, 설레는 표정으로 가뿐하게 합창을 하러 온 신규 합창 단원들도 모였다.
“메리오케스트라 6기, 그리고 메리콰이어 1기 발대식을 시작하겠습니다!”
그렇게 또 한 번의 기수가 시작되었다.
그 무렵, 대학교 막 학기를 앞둔 나는 우연히 한 채용 공고를 보게 되었다. 자기소개서나 기타 서류 대신, 제약 없는 형태의 포트폴리오를 제출해서 서류를 통과하면 프리젠테이션을 보고, 채용연계형 인턴십의 자격이 주어지는 전형이었다. 하루 하루 메리의 운영과 기획팀 회의를 주관하는 데에 몰두하면서도 취업 준비를 하긴 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마치 메리에서 다양한 사업에 공모하듯이 순식간에 포트폴리오를 구성해서 제출을 해버렸다. 4년 동안 단체를 운영한 스스로를 예비 마케터라 칭하고, 이미 브랜딩을 성공시킨 경험이 있는 패기로운 청년으로 서술했다. 그리고 첫 번째 서류에서 운이 좋게도, 합격을 해버렸다.
“저 합격했어요!”
최종 합격 통지문을 캡처해서 카톡방에 공유했다. 주영, 민지에게 축하를 받았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우울했다. 인턴으로 활동하는 동안 채용연계형이여서 그런지 한 달이 안 되는 기간 동안 정말 피 터지는(?) 경쟁을 했는데, 그 때마다 메리 활동이 버겁게 느껴졌다. 일반적으로 이런 식으로 사업 운영과 인턴십을 병행하진 않을 터인데, 당시 나는 한 단체의 대표라는 사명감 때문에 단체를 외면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실제로 인턴십 활동 도중에 광화문 광장에서 대규모 문화봉사를 했던 게 기억에 남는다. 그 기수에 나는 3rd 바이올린 파트를 이끌고 있어서 주말에는 단원들과 연습도 하고 뒤풀이에서 친목도 다지는 등 맡은 역할이 과중했다. 공연일은 평일 일몰 시간쯤으로 섭외되었고, 다행인지 근무지가 을지로입구역 근처여서 퇴근을 하고 광화문 광장으로 곧바로 달려가야했다. 핑크색 바이올린 케이스를 들고 출근을 해야했기에 누가 볼까봐 재빠르게 출근했던 기억이 난다.
당연하게도 주영, 민지와 나는 서먹서먹한 순간들이 제법 많이 생겼다. 인턴십은 한 달 남짓한 기간이었지만, 최종 합격을 한 이후에 나에게 찾아온 우울한 시기에 메리 활동은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리고 실제로 이듬해 1월부터는 출근을 할 예정인지라 암묵적으로 내가 단체의 대표 자리를 넘겨주는 것에 대해 논의를 하게 되었다. 2015년부터 2018년까지 단 한 순간도 단체가 내 인생의 우선순위가 아닌 적이 없었는데, 괜스레 내 자신이 부끄럽고 옹졸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숨이 막히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때 처음으로 심리학과 관련된 책을 많이 찾아봤다. 원인 모를 무기력감에 혼자의 시간을 보내면서, 많이 울었던 것 같다. 취업을 성공했고, 단체는 승승장구 하고 있엇지만 나는 굉장히 어두운 방 안에 갇혀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 해 10월, 우리는 인터뷰를 했다. 중앙일보 기자님께서 '컬처디자이너'라는 인터뷰 기사로 메리의 창립멤버들을 취재하고 싶다고 연락을 주셨다. 그간 문화봉사를 할 때마다 이런 저런 언론 매체에 메리오케스트라가 보도된 적도 있었고, 방송사에서 영상 취재를 한 적은 있었지만 우리 셋을 주인공으로 한 인터뷰 기사는 처음이었던 것 같다.
4년간 메리의 활동이 참 짧은 글에 압축적으로 담겼다. 실제 지면에 우리 셋의 사진과 함께 기획 기사가 실렸다. <“합주·합창으로 청소년과 함께 봉사"…지하철역 공연 4년째>라는 제목이었다.
(참고 기사) [중앙일보] 음악이 흐르는 지하철역, 대학생·중고생들 한마음 … 4년간 700여 명 모였죠 (2018.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