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휘 Jan 25. 2024

39년생 명례 씨의 챔피언 벨트

 누구에게나 선호 채널이 있다. 바둑, 낚시, 스포츠, 불교 방송. 명례 씨는 그 중에서도 프로레슬링을 즐겨 보았다. 너무도 포근해서 누구든 한 번 들어갔다 하면 속수무책으로 깊은 잠에 빠지게 되는 명례 씨와 호철 씨의 황금빛의 안방에는 늘 작은 TV가 켜져 있었는데, (손주인 내가 방송국에서 일을 하는 건 당연한 순리였을지도 모른다.) 그 네모난 화면은 언제나 연속극도 가요무대도 아닌, 왠지 모르게 화가 나 있는 표정으로 헐벗고 쿵쾅거리는 프로레슬러들이 차지했다. 건장한 남성들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 과격하기 이를 데 없는 몸짓을 하며 소리를 지르고, 의자를 들어 내리치고, 서로를 꺾고 누르고 비틀어대는 그 모든 행위들을 명례 씨는 시종일관 ASMR처럼 틀어놓고 있었다. 어디 가서 ‘우리 외할머니는 프로레슬링을 그렇게 즐겨보세요’ 라고 하면 그 누구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채널의 주인은 분명히 명례 씨였다. 가끔 리모컨을 슬쩍 가져가서 이 곳 저 곳 재핑해 놓아도 조금만 방심하면 TV 화면은 명례 씨의 손끝을 거쳐 금세 거친 풍경으로 돌아가 있었다.  


 명례 씨는 평소 아무 옷이나 입지 않는 멋쟁이였고, 대체로 좋고 고운 것들을 고르는 안목이 있었다. 의복에 있어서는 깔끔하고 멋스러운 것, 깨끗하고 예쁜 것, 정갈하고 아름다운 것, 단정하고 우아한 것을 좋아했다. 명절에 찾아온 손주들이 행여나 바짓단을 꼬깃꼬깃 접어 입거나, 앞머리를 일자로 자르거나, 머리카락을 치렁치렁하게 다닌다거나, 무릎과 허벅지가 훤히 보이는 반바지를 입는다거나 하면 예외 없이 조용히 손가락으로 마음에 안 드는 곳을 가리켰다. ‘오늘은 완벽하겠지’하고 거울을 몇 번이나 확인해도 늘 한 군데 이상은 미스였다. 그런 꼼꼼한 명례 씨가 세 자리 수 채널번호를 굳이 찾아가서 반쯤 벌거벗은 남자들의 격한 스포츠를 관람하는 데에는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을 일이었다.


 명례 씨가 왜 프로레슬링을 보기 시작했는지는 시간이 아주 많이 지난 후에 나의 엄마이기도 한 그녀의 셋째 딸 영미 씨가 나에게 말해주었다. 아주 옛날에 명례 씨는 낚싯대 만드는 회사에 다녔는데 덩치가 꽤 크고 고약한 성격의 남자 직원이 그렇게 매일 소리를 지르고 무식하게 굴었다고 한다. 별 것도 아닌 일에 성을 내고 콧김을 내뿜고 위협을 하는 게 일상이라서 <어떻게 하면 강해질까 하는 마음에> 프로레슬링을 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강해지기 위해 프로레슬링을 보기 시작했다니, 얼마나 귀엽고 짠한 일인가.


 기골이 장대한 서구권의 남자들이 맞고 넘어가고 쓰러지는 모습을 보면서 명례 씨는 어쩌면 덩치 큰 남자들의 약점 같은 것을 찾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호신술 학습 차원에서 봤을 수도 있다. 명례 씨가 그렇게 맹훈련 끝에 핫핑크 타이즈를 입고 그 못된 놈을 찾아가 장엄하게 초크슬램(Chokeslam)을 내리꽂으며 월드 챔피언급 피니시 무브를 해냈다면 해피엔딩이었을 텐데, 그런 드라마틱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저 세월이 흘러 손주들이 장성을 하도록 적적할 때마다 강물 흐르듯 프로레슬링을 틀어놓는 것이다. 링 위에 엎드려 상대방에게 속절없이 당하는 근육질의 남성들에게 그 무식한 사나이의 얼굴을 대입하며. 명례 씨의 상상 속에서 그는 몇 번이나 관절이 꺾이고 KO를 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 속 명례 씨는 고스톱을 치다가 피를 한 장씩 뺏어 와야 할 때 상대가 2점짜리 피 밖에 없으면 한 장을 거슬러 주는 너그러운 품이 있는 사람이다. 인자함이 마치 고봉밥 같다. 초크슬램을 하기에는 전투력이 턱없이 부족하다.


 언젠가 가족 행사 날, 이제 막 세 살이 된 증손녀와 나란히 앉아 장난감을 갖고 노는 명례 씨를 본 일이 있다. 냇가에 앉아 물놀이를 하는 아이처럼 명례 씨는 바닥에 철푸덕 앉아 증손녀와 친구처럼 어울리고 있었다. 나는 그 날 ‘사람이 나이가 들면 다시 아기로 돌아간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명례 씨의 보살핌을 받던 수많은 자녀와 손주들이, 이제는 명례 씨를 가장 소중하게 보살피고 돌봐야 할 차례가 오고 만 것이다. 받은 것에 비하면 갚을 도리가 없이 높고 거대한, 마치 고봉밥 같은 ‘사랑’이라는 부채를 어깨에 이고. 시간은 그렇게 서운할 만큼 정직하고 성실하게 바짝 우리 뒤를 쫓는다.


 여전히 명례 씨의 선호채널은 변함이 없다. 언제 재회할지 모르는 그 녀석과의 한판승을 위해 꾸준하게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고봉밥으로 손주들을 키운 건 복수의 군단을 꾸리기 위함이었을 수도 있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일을 하는데 정작 일을 하는 과정에서 누구보다 당신 스스로를 안전하게 지켜야만 했던 명례 씨의 마음을 전부 헤아릴 수는 없겠지만, 올 리 만무한 복수의 그날이 만에 하나 다가오면 나는 언제든 태그 할 준비를 해 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승리한 명례 씨에게 가장 눈부시고 화려한 챔피언 벨트를 채워 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경쾌하고 속 시원한 세리모니와 함께.



이전 01화 대머리는 수영모를 쓰지 않아도 된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