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휘 Feb 08. 2024

지금 거신 전화는


 옛날에는 집집마다 전화기가 있었다. 그래서 친구 집에 전화를 걸 때면 전화예절을 잘 지켜야 했다. 어른이 받으시면 무조건 인사부터 하고, 내가 누구인지 밝히고, 원하는 바를 말씀드려야 한다. <안녕하세요. 저 미달이 친구 의찬인데요, 미달이 집에 있어요? 미달이 좀 바꿔주세요.> 조기교육의 아름다움이다. 우리는 자동응답기에 수줍거나 다급하게 메시지를 남기기도 하고, 좋아하는 친구 집에 코를 막고 장난 전화도 많이 걸었다. <아, 거기 짜장면집 아니에요? 네 수고하세용.> 받는 사람 입장에서 잘못 걸려온 전화는 귀찮고 곤란하다. 그런데 요즘 같은 세상에 개인 휴대전화번호로, 8년째 같은 사람을 찾는 전화를 받다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 여보세요.

- 류대현 씨 핸드폰 아니에요?

- 아닙니다.

- 여보세요.

- 아 그.. 류대현님 핸드폰 아닙니까?

- 아니에요.

- 그 전화번호가 저기, 그, 이 번호가 아니에요?

- 예, 번호는 맞게 거셨는데요. 제가 이 번호를 정말 오래 써서요. 번호를 그 분이 잘못 가르쳐주신 것 같아요.

- 예.

 류대현님을 찾는 연락은 각양각색인데, 주로 모임에 나오지 않아서 찾는 전화, 건대입구역 근처에 위치한 치과,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오는 건강검진 안내 문자, 주민센터에서 오는 각종 알림 정도다. 추정을 해 보자면 류대현님은 나이가 지긋하신 할아버지였다. 처음에는 무심하게 받고 끊었지만, 혹시나 중요한 연락이나 검진 일정을 못 받고 지나치실 것 같아서 관공서, 병원에는 정정 전화를 넣어 놓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잊을만 하면 연락이 왔다. 내가 아닌 류대현님을 찾는 연락이.



 어떤 업보가 있어서 나에게 이런 연락이 끊임없이 오는 걸까. 어렸을 때 삼촌이 여자친구랑 통화하는 걸 안방 전화기로 엿들어서일까. <이휘. 끊어라.> <어떻게 알았지.. 딸깍.> 그것도 아니면 짝사랑하는 친구 집에 전화를 걸어 ‘여보세요’ 까지만 듣고 끊어서일까. (미안, 나였어.) 그러나 괴로움도 일시적이고 이런 잘못 걸린 전화도 규칙적으로 일 년에 서너번씩 받으면 익숙해진다. 한 번은 아무렇지 않고, 다섯 번은 짜증이 나고, 열 번이 되면 오히려 의아해서 더 친절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몇 년이 더 지나면 또다른 감정을 느끼게 된다. 혹시라도, 만에 하나라도, 더이상 아무데서도 류대현님을 찾는 전화가 오지 않는다면 왠지 서운하고 걱정될 것 같은 마음.


 어느 날은 퇴근하는데 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역시나 류대현님을 찾는 전화였다. 보통은 잘못 걸렸다고 하면 이내 끊는데, 이 날은 몇 번이나 다시 전화가 왔다.

- 아니 정말로 류대현 씨 전화가 아니라는 거죠?

- 네. 제가 이 번호를 정말 오래 썼는데, 몇 년 동안 류대현님을 찾는 전화가 정말 많이 왔거든요. 근데 정말로 아니에요. 제가 사실 그동안 각종 병원이랑 기관에 전화를 많이 넣긴 했었거든요. 그런데도 계속 이렇게 전화가 오네요.

 나도 모르게 하소연을 하기 시작했다. 아저씨는 알겠다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5분이 채 지나지 않아서 다시 전화가 왔다.

- 아니 아가씨, 나도 정말 이상한 게요. 제가 정말로 오랜만에 오늘 해질녘에, 정말로다가 한 몇 년만에 여기 한강 고수부지 근처에서 류대현님을 만났어요. 그래서 아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되냐, 번호를 좀 알려달라 말씀을 드렸거든요. 그래서 그 분이 오늘 저한테 번호를 정말 또박또박 일러줬는데 그게 이 번호였단 말이에요 아가씨.

 ‘한강 고수부지’, ‘또박또박’, ‘일러줬다’. 등골이 오싹했다. 도대체 류대현님은 누구인가. 60세 이상의 남성으로 추정되는, 건대입구 근처에 사시는, 단체모임은 좀처럼 나가질 않아서 주변 사람들을 서운하게 하는, 모든 공공기관과 지인들에게 지속적으로 내 번호를 알려주는, 그런 도깨비 같은 존재는 누구란 말인가. 만약 이 세상에 수호신 같은 게 있다면 내 번호를 같이 쓰는 어느 할아버지일 것이다. 아저씨는 어찌됐든 영문을 알아오겠다는 말과 함께 다시 전화를 끊었다.

 10분 정도가 지났을까. 아저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 아가씨. 제가 류대현님이랑 통화를 했어요!

- 어떻게요?

- 제가 혹시 몰라서 이 국번을요. 89를 99로 바꿔서 한 번 걸어봤거든요. 그랬더니 류대현님이 받았어요!

- 네?? 진짜 다행이에요. 어떻게 그렇게 걸어보실 생각을 하셨어요!

- 사실 아가씨. 그 분이 귀가 좀 안 좋으셔서 잘 못 들으세요. 그런데 오늘은요, 제가 그 아내분이랑도 통화를 했고 그래서 번호에 대한 이야기를 잘 해 드렸으니까요, 아가씨, 혹시라도 또 이렇게 잘못된 전화가 오면은요, 아가씨가 번거롭더라도 설명을 한 번씩만 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 어렵지 않죠.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8년간의 미스테리가 이 아저씨의 정성으로 다소 허무하게 완결이 났다. 류대현님은 본인의 휴대전화 번호를 완전히 잘못 알고 있던 것이었다. 그동안 8년 동안이나 잘못된 번호로 전화를 걸어 연락이 닿지 않았을 류대현님의 지인들과, 도통 지인들로부터 연락이 오지 않았을 류대현님이 무척 안쓰러워졌다. 이제 그들은 이어질 수 있을까.  

 정성스러운 아저씨와의 통화는 2년 전이고, 그 이후로 잘못 걸려오는 연락도 뜸해졌다. 그러나 여전히, 지난 달에도, 류대현님이 국가 건강검진 대상자라는 문자가 왔다. 아쉬울 때 등장하는 쿠키영상처럼. 조만간 또 한 번 공단에 전화를 걸어 89를 99로 수정해달라는 민원을 넣어야겠다. 그저 류대현님이 무탈하시길 바란다. 류대현님, 올 한 해도 건강하세요. 또 누군가에게 전화가 오면 제가 맞는 번호를 꼭 알려드릴게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