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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휘 Feb 22. 2024

고기는 싫은데 제육볶음은 맛있지

 햄 반찬이 없으면 밥 먹는 게 재미가 없던 시절이 있었다. 나보다 열두 살 어렸던 초등학생 동생이 “누나는 국 없으면 밥 못 먹잖아” 라고 말했을 때 뜨끔했다. 양반 납셨네. 국과 고기와 쌀밥이 있어야 제대로 된 식사를 했다고 느끼는 어줍잖은 장녀가 여기 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매 끼니 좋은 반찬을 식탁에 내기까지 엄마 아빠의 수고로움과 경제적 고민은 늘 내 것이 아니었다.


 “산채에서 정을 나누며 오래도록 같이 살았으면 좋겠어.”


 이게 왜 아직도 기억이 날까. (덧붙이자면 나는 ‘길이라는 것이 어찌 처음부터 있단 말이오’로 시작하는 장성백의 대사를 아직도 줄줄이 외울 수 있다.) 열일곱 살이었던 나는 드라마 <다모> 폐인이었던 엄마를 통해 ‘산채비빔밥’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과 그중엔 엄마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엄마는 나물을 좋아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장성백과 함께 산채비빔밥을 먹고 싶다는 이유로 그 드라마를 좋아하는 것 같아서 용돈을 모아 다모 DVD를 사 드렸다. 고기를 쌈에 싸 먹는 것도 싫은 나는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취향이었다.


 채소를 먹으면 입에서 잡초가 자라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매 번 쓰디쓴 약을 먹은 표정을 지었던 나였지만 어쩐지 지금은 우렁 강된장 비빔밥에 계란프라이를 떡하니 얹어서 벅벅 비벼먹어야만 힐링이 되는 사람으로 컸다. ‘나물을 너무 많이 무쳐서..’ 라며 무거운 반찬통을 5개씩 가져오고 풀을 산더미처럼 실어오는 엄마와 입맛이 잘 맞게 된 점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다. 상추? 콩나물? 무생채? 많을수록 좋다. 무나물은 들깨가루를 팍팍 넣어야 안심이 된다. 오늘 저녁은 열무와 봄동을 어떻게든 무쳐야 한다. 아무래도 내 안에 풀이 무성하게 자라나 숲이 된 것 같은 느낌이다. 더 많은 풀을 원한다, 더 많은 풀을..


 고기를 먹으면 속이 더부룩하고 치킨을 먹으면 뾰루지가 나고, 야식 메뉴로는 족발 보쌈보다 비빔밥이 최고라고 주장하는 나는 엄밀히 말해서 채식주의자는 아니다. 그렇다고 고기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고기는 싫지만 내가 만든 제육볶음은 하필 양념이 환상이고, 삼겹살집 회식이 그렇게 슬플 수가 없어 냉면 한 그릇에 소주를 한 꼬푸씩 삼키지만 끝내 단백질 섭취를 위해 목살 몇 점을 질겅질겅 씹는 것이다. 고기를 안 먹으려고 냉면을 있는 대로 먹었으면서 차돌된장술밥 없이는 자리를 일어날 수 없다. 지구식단 두부텐더를 카트에 담지만 저녁에 햄 김치볶음밥을 해 먹는 아이러니 같은 일이 매일 같이 일어난다. 따져 보면 잡식성일 뿐인데 스스로 베지와 논베지의 자아가 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구분하는 게 우습다. 이쯤 되면 그냥 모든 게 맛있는 사람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너의 맛도 옳고 너의 맛도 옳구나, 모든 맛이 일품이다.


 언젠가 채식을 결심한 나날들도 있었다. 며칠을 성공했을까. 너무 여러 번 시도했고 그 결말도 대단치 않아서 딱히 성과가 기억도 안 난다. 비건(채식)과 글루텐 프리(밀가루 끊기)를 동시에 선택하면 성질머리가 분기탱천해서 하늘이 두 쪽 날까봐 하나만 하기로 했는데 하필 신라면이 먹고 싶어서 실패했던 것 같다. 신라면에 들어있는 쇠고기 분말 스프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먼 옛날, 배낭여행을 하던 시기에 만난 나의 인도인 친구는 신라면이 싫다고 했다. 인도의 모든 채식 메뉴들은 웃기고 맛있었다. (웃긴 이유는 그린 샐러드를 시켰는데 접시에 오이가 나왔기 때문이다.) 아무튼 미안해 빈수 구루, 너희에게 소는 어머니잖아.


 햄버거도 맛있고 비건 퀘사디아도 맛있는 나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지금도 냉장실에는 계절별 나물 반찬과 두부가, 냉동실에는 차돌박이와 소갈비살이 여당과 야당처럼 자리 잡고 있다. 다 때려 넣고 비벼도 짜지 않을 만큼 슴슴하게 나물을 무치고, 대기업의 노하우가 담긴 소갈비양념으로 정말 기깔나는 갈비찜을 만든다. 이런 걸 중도라고 하는 걸까. 아름다운 나의 음식 국회. 나는 평화를 원한다. 그 누구도 싸우지 않고 각자 혼자만의 레이스를 했으면 좋겠다.


 달걀을 고를 때는 숫자가 1로 끝나는 제품을 고르는 것으로 동물의 복지를 생각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지만, 그럼에도 우유를 두유로 바꾸고 고기 소비량을 조금씩 줄여가는 것만으로도 나의 건강이나 지구의 건강에 도움이 된다면 만족한다. 그게 아주 티끌만한 것이라도. 나는 거창한 포부가 있어서 채식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냥 이렇게 어중간하게 괴로워하면서 살기로 했다. 주관이 뚜렷한 비건족들의 채식 밥상을 보면 부러워하기도 하고, 얼큰 순댓국과 오소리감투와 소주 조합에 행복해하기도 하면서. 연두로 간을 맞췄다가 고향의 맛 다시다를 넣었다가 하면서. 내 삶이 다하는 한 최선을 다해서 먹어댈 것이다. 매일같이 결심하고 실패하고 합리화 하면서.



[작가의 말]

어제 방송작가 총회 다녀왔는데 스테이크 진짜 맛있었습니다. 오늘 저녁은 봄동 넣고 비빔밥 해 먹을 거예요. ‘강호동 봄동 비빔밥’ 다들 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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