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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휘 Mar 07. 2024

작년에 왔던 빌런이 죽지도 않고 또 온다

 일은 잘하지만 인성이 개차반인 빌런은 출근할 때 울고 싶게 만들고, 착하고 무능력한 빌런은 퇴근할 때 지치게 만든다. 유능하고 성격이 못된 사람보다 착하고 무능력한 사람이 최악이라는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그들이 상사라는 가정이 붙으면 사실 우열을 가리기가 힘들다. 대외적으로는 인정받지만 알고 보면 후배들을 착취하고 비난하는 사람 VS 예쁜 표정 예쁜 말로 환심을 사지만 그 웃는 얼굴로 일을 다 망쳐버려서 나머지 사람들이 그 몫을 나누어 백업하게 만드는 사람. 나는 모두 만나봤고, 둘 다 싫다. 역시나 오늘도 밸런스 게임에 실패했다.


 매 년 오고야 만다. 물리쳤다고 생각하면, 그래서 잊을 만 하면, 세상은 그래도 살아갈 만 하다고 생각되는 순간, 그들은 다른 얼굴 다른 이름 다른 나이 다른 직책으로 나타난다. 감쪽같이 다른 사람의 모습을 하고서. 결국 그것들의 역할과 존재의 이유는 단 하나다. 우리에게 극심한 고통을 주기 위해, 지옥을 맛보여주기 위해, 답답해서 화가 치밀어 오르고 겁이 나서 출근조차 하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서. 어쩌면 남을 괴롭히라는 사명을 갖고 태어났을지도 모르는, 그 극악무도한 잡종들을 우리는 ‘빌런’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들은 부지런하다. 매일 아침 본인의 인성을 잘 빻아서 쓰레기 수거함에 버려두고 출근한다.


 확률적으로 모든 집단에는 반드시 빌런이 존재하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일까. 물 분자가 되려면 산소원자 1개와 수소 원자 2개가 필요한 것처럼, 마피아 게임을 마피아 없이는 할 수가 없는 것처럼, 세상이 안정화되기 위해서는 악의 세력은 필수 불가결한 것일까. 직업상 방송국은 음기와 양기가 남발을 하고 그래서 기 좀 세다 싶은 사람들이 유독 많이 모이기 때문이라며 통계학적으로 이해해보려고도 했다. 그러나 상식이 통하지 않는 행동을 서슴없이 하는 빌런들을 목격할 때면 애초에 그들을 ‘이해’하는 행위 따위가 가능한 것인지 부터 물음을 던지게 된다. 그들은 평범한 인간으로 코딩되어있지 않았다.


 빌런은 비단 방송국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업무시간에 중고거래를 하기 위해 자리를 비우는 직원, EDM은 크게 들어야 한다며 이어폰의 음량을 줄이지 않겠다는 인턴, 술자리에서 선배에게 뻐큐를 갈기는 후배, 방과 후 친구들의 싸움구경을 하며 어느 쪽이 이길지 최소 5만 원 이상의 토토를 즐기는 중학생들과 그런 자녀들을 절대 혼내지 못하게 하는 학부모들, 레슨생들의 과제물을 베껴 버젓이 자작곡을 내는 가수, 임신은 무책임한 일이라고 꾸짖으며 가혹한 스케줄로 3교대를 짜 주는 수간호사, 주소지에 적힌 아파트 동호수를 보고도 집을 찾아갈 줄 모르는 우체국 신입, 부장님에게 ‘이름이 뭐예요?’ 라고 물어보는 사원, 햄버거를 3분의 2씩이나 먹어놓고 패티의 굽기가 마음에 안 든다며 환불이나 사과를 요구하는 손님까지……. 그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모든 곳에서 마치 주인공처럼 등장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게 괴담이 아닌 실화라는 게 미치도록 웃프다.


 나는 내가 만났던 과거의 빌런들을 굳이 공공연하게 자세히 서술하고 싶지 않다. 그동안 날 괴롭혔던 모든 악마들을 이 곳에 고발하면 오히려 내 목숨이 위태로워질 것만 같기 때문이다. 신변 보호를 어필하기엔 이미 늦었다. 그들은 피도 눈물도 없다. 만약 공식적으로 호소문을 제출하면 어디선가 그걸 읽고 더 크게 분노하고 더 잔인한 모습으로 업그레이드되어 내 앞에 나타날 것이다. 밸런스 패치와 최신형 업데이트까지 완벽하게 마친 상태로. 그럼 나는 다시 레벨 1로 돌아가 돌도끼부터 던져야 한다. 얍얍……. 어? 안 맞네? 죄송합니다. (한 가지 고백하자면 나는 빌런 때문에 심지어 서른세 살까지 울었다. 서른세 살까지 우는 내 자신이 어이가 없어서 내 나이를 세어가며 울었다. 당시의 나는 연약했고, 개인적인 복수를 감행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도 그 수많은 빌런들 중에 만천하에 공개해도 무방한, 나에게 가장 조촐하고 단기적인 고통을 선사했던 다소 낮은 레벨의 빌런을 소개한다. 그(혹은 그녀)는 회의 시간에 나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내 얼굴만 보면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화를 냈다. 덕분에 나는 누군가가 나로 인해 얼굴이 빨개지고 목에 핏대가 서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봐야 했다. 간혹 저러다 고혈압 때문에 당장 기절해버리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한 가지 안타까운 건 내가 어느 부분을 고쳐야 하는지를 정확히 짚어주지 않아서 끝내 영문도 모르고 헤어졌다는 것이다. 코멘트에는 언제나 추상적인 표현과 ‘느낌’만이 있었을 뿐, 도대체 뭐가 못마땅하고 잘못된 것인지를 나를 포함한 어느 누구도 캐치할 수 없었다. 주변 동료와 선배들에게 물어봐도 대답은 하나였다. “각 팀마다 한 명씩 그냥 싫어하는 사람이 있대.”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시민이고 그 사람이 마피아야? 이렇게 대놓고 죽이는 게 어디 있어.” 결국은 그냥 서로 안 맞는 것 같으니 프로그램이 끝날 때까지만 버티라는 조언이 마지막이었다. 그러나 그 사이 나는 자존감이 바닥을 쳤다. 아이디어 회의를 너무도 좋아했던 내가, 브리핑할 차례만 되면 말을 더듬게 됐다. 더듬다 못해 아예 상관없는 단어들도 툭툭 튀어 나왔다. 촬영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냉장고’ 라고 말한다거나, 말을 하는 와중에 다음 문장이 생각 안 나서 정적이 흐르기도 했다. 아무래도 뇌의 회로 자체가 꼬여버린 것 같았다. 그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문제였다. 스스로 내 모습을 견딜 수가 없었고, 제대로 극복해 보고 싶어서 ‘말하기’, ‘화법’과 관련된 책을 수도 없이 빌려 읽었다. 그리고 정말 책에서 가르쳐준 대로 연습했다. 말하기 전에 몇 초의 시간을 반드시 세고 말하기,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기……. 아마 그 당시 썼던 노트 어딘가에 메모들이 남아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정도는 정말 낮은 레벨에 불과하다.


 남의 멘탈을 갉아먹고 사는 유형이 있는 반면 나를 지극히 분노하게 한 빌런들도 존재했다. 그들은 다채롭게 무능력하고 ‘게으름’ 자체에 유독 성실하다. 시사를 하다가 갑자기 집으로 도망간다거나, 사이비 종교에 빠져 편집을 소홀히 한다거나, ‘갑자기’ 반려견을 실외배변 시켜야 한다거나, 몸이 종합병원 수준으로 아팠다는 이유로 업무 태만을 밥 먹듯이 한다. 이토록 정성스러운 게으름이 존재한다니 영롱해서 빛이 날 지경이다. 그 와중에 레퍼토리의 창의성 부족으로 핑계를 돌려막기 하며 다시 한 번 그 게으름을 증명한다. 그렇게 그들은 꾸준히 약속을 어기고, 남의 공을 가로채고, 성격상 1.5인분까지만 일하고 싶은 나에게 본인의 일을 무자비하게 떠넘겼다. 결국 나는 2인분 3인분의 몫을 해내는 스킬이 뛰어나게 늘었다. 주말에 경험치를 2배씩 주는 PC방 이벤트처럼. 이런 방식의 레벨 업을 기대한 적은 없었지만, 결론적으로 나는 조금 더 유능하고 유연한 사람이 됐다. 그들의 무능함과 게으름이 의도한 것이든 의도하지 않은 것이든, 그 카르마로 인해 모두 감옥에 가거나 나태지옥에서 열심히 발을 굴렀으면 좋겠다. 아마 거기서도 남들의 등에 업혀 기생하려고 하겠지만.


 울고불고 비명을 질러가며 악당들에게 굴복했던 지난날들과는 달리 나는 무럭무럭 연차가 쌓이고 나이를 먹어갔다. 빌런의 고문 기술은 나날이 발전하고 다양해져갔지만 나 역시 체급이 커지고 용감무쌍해졌다. 무엇보다 어디를 가든 빌런들의 총량은 같다는 일종의 질량 보존의 법칙은 오히려 나에게 안식을 줬다. 기하급수적으로 번식을 하는 게 아니라, 최소한의 비율만큼 존재한다는 게 참 다행이었다. ‘어느 팀에 가나 꼭 한두 명은 있단 얘기지.’ ‘뭐야 그럼 그 한둘 빼고는 다 괜찮은 사람들이라는 거잖아?’ 오케이. 할 만하다. 끽해봐야 한둘 무찌르면 된다. 나는 그렇게 참고, 견디고, 비위를 맞추고, 때로는 언변과 센스로 구워삶아 보면서 파훼법을 익히기 시작했다. 술을 마시고 한탄을 하며 적신 휴지만큼이나 내공이 쌓였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아무리 대단한 빌런이 나타나도 소위 ‘좆밥’으로 인식하는 고인물로 성장했다. 그리고 나의 안위를 떠나 가끔은 누군가를 위해 정의로운 목소리를 내고, 필요할 땐 퇴마를 위해 궁극기도 쓸 줄 아는 플레이어로 무사히 진화했다. 이제 더는 내 안의 정의의 사도가 저 난폭한 빌런들을 더 이상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다. 불행이 시야에 들어왔을 때 안간힘을 쓰며 서로를 다독이는 일, 그래서 끝내 웃게 하는 그 에너지의 순환은 정말 위대하다. 우리 모두가 히어로가 아닌 인간이기에 가능한 위로와 공감의 연대. 우리가 한 편이라는 안도감. 나는 그런 것들을 사랑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나도 모른척할 수 있었다. 이제 누군가가 괴롭든 괴롭지 않든, 나의 평화만 생각하고 빠른 퇴근을 지향하는 삶을 살 수도 있었다. 지극히 개인주의적이고 안전한 삶을. 그러나 지옥에서 가장 뜨거운 자리는 도덕적 위기에서 중립을 지킨 사람들을 위해 마련되어 있다고, 단테는 서술했다. 나는 진정한 빌런은 사탄들이 널을 뛰는 가운데에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그저 그 순간이 무사히 지나가길 눈 감고 참는 방관자들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내가 충분히 겪고 괴로웠던 역사를 내가 소중히 여기는 후배와 동료들이 겪게 하고 싶지 않았고, 가만히 두고 보지 않기로 했다. 그게 나의 최소한의 의무와 양심이다. 부당함을 조용히 참아내면 빌런들은 그게 합당한 줄 알고 반가워한다. 그래서 그들이 자꾸 찌르면 찍 소리라도 내야 한다. 더 힘이 남아 있다면 짖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더 물어뜯기기 전에 짖기로 했다. 좋아하는 사람들을 내 등 뒤에 두고. 이 절규에 조금이라도 빌런이 쫄아주기를 바라면서.



 가끔 상상한다. 우리를 괴롭혔던 수많은 빌런들이 번호표를 뽑고 의자에 대기하고 있는 상상. 그들은 한 명씩 검은 방에 들어간다. 그리고 비명을 지른다. 대기하고 있는 빌런들은 식은땀을 흘리며 자신의 차례가 오지 않기를 절실하게 기도한다. 그러나 빌런들을 위한 자리는 언제나 마련되어 있다. 지옥에서도 가장 고통스러운 명당에. 나는 그게 사후세계가 아니라 현실세계였으면 한다. 부끄러움, 창피함, 곤혹스러움, 외로움, 배신감, 좌절감, 열등감 같은 건 우리가 아니라 저쪽이 느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 나는 앞으로도 눈 감고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하찮은 돌도끼라도 던질 것이다. 그 하찮은 움직임 하나에 환호하고 감동하고 힘을 얻는 순한 어린 양들이 있는 한. 얍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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