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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휘 Mar 14. 2024

나는 알코올 입스 근데 취해

 나는 좋아하는 친구들과 술에 취할 때 함께 멍청해지는 기분이 들면 유독 안정감을 느낀다. 내 인생의 부족함은 술 책 영화 음악 사랑을 채우는 방식으로 보완해 왔다. 그래서 어느 하나라도 결핍되면 균형을 잃고 휘청거리고 만다. 다행히 이것들은 상호보완적이라서 하나의 결핍을 다른 하나의 과잉으로 채워도 무방하지만,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공평하게 각각의 눈금을 지켜주면서 계절처럼 순환 사이클을 돌려야 한다.


 그런 나에게 최근 알코올 입스가 왔다. 입스란 주로 스포츠 선수들이 많이 겪는 현상인데, 간단히 말하면 압박이 느껴지는 중요한 시합을 앞두거나 불안감이 심한 상태에서 평소에 수도 없이 해 오던 기본적인 동작도 제대로 못 해내게 되는 현상을 말한다. 프로 리그에서 뛰던 선수가 ‘내가 공을 어떻게 던졌더라?’라며 어느 날 갑자기 스트라이크를 던질 수 없게 되거나 하루아침에 손가락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게 된 기타리스트의 이야기를 본 적이 있긴 했다. 숨 쉬듯 밥 먹듯 하던 동작들이 순간 낯설어지고 백지 상태가 되는, 그래서 거대한 슬럼프에 빠지게 되는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그런데 한낱 술을 먹는 데에 입스가 올 줄은 전혀 몰랐다.


 발단은 건강검진이었다. 2년 전보다 매우 엉망인 성적표를 받았다. 콜레스테롤 지수는 거의 낙제 수준이고 의학적으로 내 몸은 재수강이 시급한 지방덩어리였다. 이렇게 조금 먹고 운동을 하는데도 체지방률은 7%나 늘었다. 164cm에 53kg인 몸으로 “나 비만이래.” 라고 말하면 주변에선 코웃음을 치지만 어쨌거나 나는 마른 비만이 맞다. 이대로 가다가는 코어는 사라지고 내 몸은 둥글둥글한 지방덩어리가 되어 둥둥 떠다닐 지도 모른다. 내 혈관은 점점 끈적끈적해져 교통체증을 겪을 것이다. 엄마 아빠처럼 고지혈증 약을 평생 먹어야 할 수도 있다. 급한 대로 과자와 술부터 끊기로 결심했다. “5잔 이상은 폭음입니다.” 라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이 이해가 잘 안 가긴 해도 억지로 새겨듣기로 했다.


 그렇게 정제 탄수화물과의 전쟁을 선포한 지 한 달 쯤 됐을까. 술 약속이 잡혔다. 원래라면 어떤 술을 얼마나 먹을지, 얼마나 취할지, 집에 들어가는 길부터 잠들기 전까지 누구에게 연락해서 성가시게 굴지를 시뮬레이션하며 기분이 쿵짝쿵짝거려야 맞는데 하나도 기쁘지가 않았다. 오히려 나는 뚝딱거렸다. 술을 왜 먹더라? 어떻게 먹더라? 누구랑 먹더라? 소주잔은 어떻게 쥐는 거였지? 하이볼을 내가 무슨 맛으로 먹은 거야? 겨울의 따뜻한 사케 맛이 왜 그립지 않지? 진로와 새로를 떠올려도 마음이 설레지가 않잖아?


 맛없는 감기약을 먹을 때 입모양이 옹졸해지는 것처럼 소주 생각만 해도 얼굴이 찌푸려지는 걸 보니 나의 알코올 인생은 드디어 임종을 맞이한 것 같았다. ‘술은 쓰잖아. 무슨 맛으로 먹어?’ 라고 질문하던 수많은 나의 술찌 친구들이 스쳐지나갔다. 나는 정말 입스가 확실한 것이다. R.I.P. 사랑하는 이들과 술독에 빠져 흥얼대던 나는 그대로 광화문의 어느 건강검진센터 지하에 묻혔다. 묘비명에 LDH 콜레스테롤 수치가 적힌 채로.


 지난 주 화요일에는 먹음직스러운 숙성회를 앞에 두고 다 식어가는 맥주를 입술에 적시면서 세 시간을 보냈다. 정말로 술을 즐기는 법을 잊어버린 것 아닐까. 그래도 그 때 나눈 양질의 이야기들은 숙취보다 더한 기쁨을 주었다. 그동안 나는 왜 취해 있었던 걸까. 술 없이 하는 말들은 취해서 하는 말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딘가 구멍이 텅 비어 있어서 그 자리를 술로 채워야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고백, 약속, 기대들이 그런 취기 없이도 인심 좋게 쏟아져 나와 주었다. 가만 보면 나는 솔직해지기 위함이라는 명분으로 제정신으로부터 도망가는 방법을 택해 온 걸지도 모르겠다. 취하면 다 귀ㅇ ㅑ우니까. 취하면 다 껴안고 사랑하고 투정부리고 싶으니까. 그게 좋으니까. 그런데 이제 그런 짧은 추월이 필요 없어진 시기가 온 것 같다. 안전한 속도로 진심을 지켜가고 싶다.


 입스를 영원히 극복하는 방법은 어렵다고 한다. 지금의 내가 겪는 이 허무맹랑한 슬럼프도 지나고 나면 잠깐의 술태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여전히 우리 집에는 잭 다니엘, 제임슨, 예거마이스터, 샴페인, 원소주, 준마이 다이긴죠 등급의 사케, 자식이 300여 명이나 있고 하룻밤에 여섯 여인을 임신시켰다는 전설의 민망왕이 즐겨 마셨다는 베트남 민망주, 화이트 와인, 소주, 맥주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이 모든 암흑의 시기가 끝나면 나와 함께 광야를 달려 줄 무한하고 유해한 친구들이. 다시는 술을 예전처럼 즐길 수 없게 되더라도 특별히 큰 상관은 없다. 나는 최선을 다해 함께 멍청해질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밤새 떠들어줄 수 있다. 그것만큼은 자신 있다.


 나는 알코올 입스 근데 취해! 마신 게 하나도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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