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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휘 Feb 15. 2024

헬스장 일진

 모든 선배들의 특권은 텃세로 발현된다. 그들은 신입들의 일거수일투족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신입들이 공짜보다는 유료로, 어떠한 코칭이나 멘토링 없이 셀프로 습득해내길 원한다. 인생에 수업료가 있다면 그들이 가장 먼저 세금을 떼어 가려 할 것이다. 먼저 태어나고, 먼저 학습하고, 먼저 깨우쳤다는 이유로 그들은 기득권층이 되어 유리천장 위에 있다. 커튼 뒤에서 실수를 훔쳐보고 비웃는다. 조금이라도 신입의 살이 닿으면 비상벨을 누르고 소독처리를 해야 할 것처럼 군다.어쩌면 텃세란 일종의 명함이나 바겐세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처음 만났을 때 인사치레처럼 받아보는 것. 연중무휴의 창고정리 같은 것.


 우리 동네 헬스장에는 일진이 있다. 나는 그 거대한 조직을 저녁 GX 수업 끝나는 시간에 처음 마주쳤다.

 보통 나는 비교적 한산한 오후 시간에 헬스장 가는 걸 좋아하는데, 밤낮이 점점 기울어서 그 날은 저녁시간에 운동을 하게 됐다. 운동이 끝나고 라커룸에서 샤워 도구를 꺼내려는데 땀에 흠뻑 젖은 나이든 여성 두 분이 내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환불원정대처럼 당차고 빠른 걸음으로 그들은 본인이 쥔 번호 키에 해당하는 라커 앞으로 돌진했다.


 드르륵, 탁. 슉, 탁. 드르륵.


 열쇠를 돌려 샤워도구를 꺼내고 다시 문을 닫아 잠그는 데에는 3초도 걸리지 않았다. <강철부대>의 첫 번째 미션이 헬스장에서 옷 빨리 갈아입기였다면 우리 동네 일진 조직이 우승했을 것이다. 감탄과 동시에 불길한 미래를 직감한 나의 손도 빨라졌다. 선발대는 두 명. 본진이 이 곳을 습격하기 전에, 점령하기 전에, 어서 빨리 나도 샤워부스 한 칸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아우! 더워!”

 “진짜 힘들다.”

 “휴!”


 더운 태풍이 들이닥친다. 아직 나는 샤워용품조차 꺼내지 못한 상태. 서둘러야 한다. 조급함을 티 내지 않으려는데 땀에 젖은 스포츠브라가 안 벗겨진다. 이렇게 안 벗겨지는 걸 억지로 벗다가 팔이나 어깨가 빠지지는 않을까를 늘 걱정하지만 오늘만큼은 지체할 수 없다. 온 몸에 힘을 주어 브라를 벗어던지고 샤워부스로 향하는데 이미 10명 정도가 우르르 들어왔고 샤워부스는 절반이 찼다. 아직 [원활]. 그러나 방심해서는 안 된다. 평소 GX 수업이 진행되는 공간과 인원을 고려해볼 때 절반도 안 들어왔을 것이다. 겨우 샤워를 하러 들어가려는데 날카로운 목소리가 탈의실에 울려 퍼진다.


 “내 자리 있어?”


 

누가 봐도 두목처럼 보이는 여자가 왼팔과 오른팔을 대동하고 등장했다. 거침 없고 양심 없이 한다는 소리가 내 자리? 아니, ‘내 자리’?


 언제부터 샤워부스가 예약제로 진행이 된 걸까. KTX처럼 각자의 자리가 정해져 있는 걸까. 나도 모르는 이 조직의 ‘룰’에 의하면 이런 대화도 가능할 것이다. <저기요, B-5번에서 나와 주시겠어요? 저희 두목님 쓰셔야 하는 자리입니다.> <네 죄송합니다. 즐거운 샤워 되십시오.>


 그들만의 규칙에 쫄지 않는 나는 두목의 앞을 가로질러 당당히 ‘내 자리’를 찾아 들어갔다. 모두가 들으라는 듯 구시렁거리면서. 샤워 한 번 하는 것도 맹렬한 기세로 쟁취해야 한다는 걸 좀 더 일찍 알았으면 어땠을까. 씻는 내내 ‘드라이기는 3개밖엔 없는데 어떤 작전이 필요할까’를 걱정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나와 보니 모든 드라이기가 풀가동 중이었다. 그러나 머리를 말리고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모두가 드라이기를 옆으로 세워놓고 샤워 볼을 말리고 있다. 보송하고 따뜻한 샤워 타월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젖은 머리로 물을 뚝뚝 흘리며 귀신처럼 거울에 가까이 다가간다. 무언의 압박을 하기도 전에 그녀들은 일제히 자리를 비켜준다. 일진들은 본인의 이익을 챙기는 데에는 한없이 공격적이지만, 안하무인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어디서 주워들은 괴담처럼 샤워장에서 젊은 처자의 타투를 지워보려고 벅벅 씻어본다거나, 튀는 컬러의 수영복을 입지 못하게 하는 수영장 일진 할머니들 같지는 않다.


 자신의 자리를 맡아달라던 두목의 폰 케이스가 화려하다. 이번주 모임에 나오기 힘들다는 오른팔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한다. "언니, 탈락!" 가차없다. 조금 온순해보이는 왼팔이 상냥하게 설득한다. "엘리베이터가 고장났대." 나도 그 두목에게 말하고 싶다. "니 자리 내 자리가 어디 있어요? 님 탈락!" 그러나 이런 용기는 나의 상상에서만 발현될 뿐 현실에서 현현될 리 없다.


  머리를 다 말렸음에도 자리를 비키지 않거나, 라커 문을 가로막고 있거나, 노골적으로 알몸을 쳐다보는, 시끄럽고 제멋대로여서 미운 일진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조직도 있다. 특정 요일에 보이는 일명 <‘빅 보스’ 무리>. 연령이 훨씬 젊고 인상이 좋고 정이 많다. 그들은 운동이 끝나면 젖가슴을 내어놓고 마주본 채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휴가로 다녀온 여행에서 물은 잘 맞았는지, 저녁 메뉴는 뭘 해먹을지, 이번 주 부업은 같이 할지 말지 같은 것들을 의논하고 궁금해 한다. 그리고 그들을 이끄는 조용한 빅 보스. 빅 보스는 크다. 빅 보스는 묵묵하다. 신참을 빤히 바라보는 눈빛에도 차분히 걷는 걸음걸이에도 특유의 여유가 있다. <저를 받아주십시오!>하면 <화요일 8시 수업에서 봐.>라고 해 줄 것만 같은 인자하고 위엄 있는 얼굴. 자상한 호랑이 같다. 나는 이 빅 보스 무리를 구경하는 게 좋아서 고정적으로 저녁 시간에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빅보스 조직으로부터 나는 많은 것들을 배운다. 샤워부스를 점령하려면 라커룸 앞에서 옷을 갈아입는 행위 따위는 사치라는 것(옷을 입은 채로 자리를 찜 해두고 샤워하기 직전에만 벗으면 서두를 필요가 없다), 맨 오른쪽에서 두 번째 칸은 하수구 냄새가 많이 난다는 것, 다 쓴 아이크림을 즙 짜듯이 짜낼 때에는 수건의 마찰력을 이용하면 된다는 것, 샤워가 끝나면 로션을 바르거나 옷을 꺼내 입는 동안 드라이기를 틀어놓은 채 샤워 볼을 야무지게 말리는 스킬 같은 것들 말이다. 그녀들은 샤워에 미친 사람들처럼 굴지 않는다. GX가 끝나면 절반 정도는 탈의실이 아닌 웨이트장으로 향한다. 스트레칭을 하며 내일을 계획한다. 얼굴에 너그러움이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조금씩 체득되어 신참의 레벨과 노하우에 양분으로 쌓인다. 저렇게 살아야지, 저렇게 살진 말아야지, 같은 삶에 대한 태도가 되어.


 빅 보스가 샤워를 마친 후 조직의 무리에게 화두를 던진다.


 “키 큰 누구가 안 오네?”


 “어, 그러네.”

 “안 나온 지 한참 됐어.”

 “나두, 수업 때 누가 키 큰 사람이 들어오면 혹시나 해서 쳐다본다니까?”

 “그러고 보니까 정말 못 본지 좀 됐다.”

 “애들이 방학해서 못 오나?”


 빅 보스는 화두만 던질 뿐,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은 채 옷을 갈아입고 시크하게 탈의실을 빠져나갔다. 인사는 생략한다. 마이웨이. 신참인 나는 그 카리스마에 반해 잠자코 뒷모습을 지켜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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