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를 조금씩 잊기로 했네

2024년 4월 23일

by 또마스


나는 너를 조금씩 잊기로 했네

새로 돋는 전나무 연한 잎새를 볼 때

붉은 스웨터 팔뚝에 떨어지는 벚꽃잎 위에서

신호등을 기다리는 동안 떠올렸던 전철역의 기억 속에서

바닥을 살살 쓸며 하루치의 먼지를 모으는 중에도

매일 아침 들르던 커피집을 이제 그만 가자고 다짐하면서

수년 사이 조금씩 바뀐 제방을 걷는 중에

수리점에서 찾아온 기타에 새로운 줄을 끼우고 음을 맞출 때

주말의 고속도로 끝을 알 수 없는 정체 속에서

쓸데없는 얘기로 문자를 남기다가

옛날 사진첩 속에서 이제는 만날 수 없는 이를 바라보며

오래된 종이상자에서 부치지 못한 편지를 찾아 찬찬히 읽어보다가

그 편지를 받을 뻔 했던 녀석이 살던 남불의 햇살과 바람을 생각하다가

나는 너를 조금씩 잊기로 했다

정강이 오래된 상처에 앉은 딱지를 조심스럽게 떼어낼 때,

화장실에서 다 쓴 두루마리 휴지심을 꺼내고 새것으로 바꾸다가

이른 아침 산책길에서 맨얼굴에 부는 바람이 거칠다고 느낄 때

동창회 한다는 톡을 받아 식당 주소로 위치를 검색하다 말고

비 내리는 아침에 전화를 받아 밝고 기쁜 목소리로 인사하며

나는 너를 조금씩 잊는다.

바람은 풀잎의 솜털을 쓰다듬듯 스치다, 갑자기 차고의 지붕을 뒤집어놓았다.

감추어진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았지만, 남아있는 것도 하나도 없었다.

나는 구멍난 바지에서 빵조각을 흘리듯 잊었고

뾰족한 초침은 작은 조각 하나까지도 성실하게 거두어갔다.

나는 너를 잊었다.

내가 너를 잊기로 한 것조차 잊고,

내가 너를 잊었다는 것까지 잊었다.

2024년 4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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