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언제나 계속 되는 것
임용고시생이던 예비선생님과의 작은 약속으로 시작된 힐링여행이 열달이 지난 후 다시 약속으로 지켜지기까지의 이야기를 풀어볼까 합니다.
여행지는 앞선 들에서 이야기를 들려드렸던, 꽃피는 여름에 다시 방문하기로 했던 '박연묵 교육박물관'입니다. 이 포스팅을 위한 프리퀼로 바로 앞 포스팅을 한 것입니다. 시작해 볼까요?
이 날은 유난히 날씨가 좋았습니다.
3시간이 조금 넘게 달려 사천시에 위치한 박물관에 도착했습니다. 이제는 시골길을 달리고 산골로 들어와도 놀라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젠 당황하는 것 대신 주변의 풍광들을 즐기기까지 했습니다. 근천에 제3전투비행단이 있어서 비행기 조형물이 참 많았습니다. 첫 여행 당시에는 잘 눈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여유를 두고 달리니 잘 보이고 잘 들렸습니다.
이날 여행은 사진을 많이 찍지 않으리라고 다짐하고 나선 여행이었기에 사진이 별로 없습니다.
박물관에 들어서니 대문 옆으로 석류나무와 모과나무에 열매가 주렁주렁 달려있습니다. 나중에 다시 떠나올 때 선생님께서 몇개 챙겨주셨습니다. 차에 두면 향이 좋다고 하시면서요.
대문을 지나 마당에 들어서니, 못보던 젊은 여자선생님 두분이 뭔가를 분주하게 하고 계셨습니다. 우리처럼 방문하신 분들인가 했는데, 나중에 자세하게 여쭈어 보니 '경상남도교육청 소속 기록전문직' 직원분이셨습니다. 교육박물관 건림을 위한 교육 사료들의 색인을 만들고 위치를 파악하고 정리하는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휴일인데 이렇게 쉬지도 못하고 일하고 계시네요. 전라남도교육청에서도 얼마전에 교육사료 수집 공문이 내려왔는데 비슷한 맥략인가 봅니다.
그 분들께 선생님 계시냐고 물으니, 뒤쪽 밭에 가셨다고 해서 지난 여행에서 휑한 밭이던 뒷마당으로 갔습니다. 아니나다를까 겨울이던 지난 1월의 모습과는 완연 다르게 온갖 꽃들이 넘쳐났습니다. 선생님께서 지난번 방문때 여름에 오면 온갖 꽃들을 볼 수 있다고 하셨던게 기억이 납니다. 선생님의 자랑만큼 꽃들이 여기 저기서 가을을 손짓했습니다.
그런데 찾으러 올라가보니 선생님께서는 보이질 않으시고, 가득 피어난 꽃구경만 실컷했습니다. 이름을 아는 게 별로 없어서 속상했지만 그래도 뭔가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그 꽃들에게 일일이 인사해 주었습니다. 분명 밭에 계시다고 했는데 생각하며 터벅터벅 뒷마당에서 걸어 내려왔습니다.
그럼 도대체 선생님께서는 어디 계시는 걸까요?
다시 내려와서는 혹시나 하고 선생님이 기거하시는 본관 건물을 들여다 보니 낮잠을 주무시고 계십니다. 워낙 조용하게 움직이셔서 기록사 선생님들께서도 모르셨나 봅니다. 그렇게 한바탕 숨바꼭질을 끝내고 선생님과 드디어 만났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보자마자 금방 알아보셨습니다. 그때 여름되면 다시 오겠다고 약속을 드렸는데, 그 약속을 지키는 또 한번의 힐링여행이 시작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보자마자 그 기록사 선생님들께 소개시켜 주셨습니다. 따로 소개를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정확하게 기억하고 계신 것에 놀랐습니다. 아마도 박연묵 선생님께서는 우리와는 다른 기억 체계를 가지고 계신 듯 합니다.
인사를 나누고, 선생님께서는 집안으로 손님을 들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지난번 우리의 방문 여정을 기억하고 계신지라 이번엔 박물관 구경 대신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워낙 재밌는 말씀, 그리고 가슴을 울리는 말씀을 많이 들려주셔서 오늘은 그 내용 중에 인상 깊었던 내용을 기록해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인터뷰 형식으로 박연묵 선생님의 이야기들을 여기에 남겨보려 합니다. 교직 선배님, 그리고 인생 선배님으로서의 이야기들입니다.
일단 손수 타주신 맥심 커피를 옛날 다방 찻잔 같은 잔에 한잔 들이킵니다. 직접 전기주전자에 물 끓이시고는 이렇게 대접해 주시면서 자연스럽게 이런 저런 이야기로 시작한 이야기가 깊어지고 깊어져서 너무 많은 걸 깨닫는 시간이었습니다.
마리샘 > 선생님 너무 오랜만이에요.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박연묵 선생님(이하 박선생님) > 응, 그 동안 도교육감님도 다녀가시고, 여러 신문에 기사도 나가고 했어. 아무리 약속했어도 이렇게 먼길 찾아오기가 쉽지 않은데 대단하고 고마와.
마리샘 > 여전히 건강해 보이셔서 좋아요. 올해 연세가 어덯게 되세요?
박선생님 > 내가 올해 여든 하나야. 죽을 때 다 되었지.
마리샘 > 아직도 사모님께는 월급봉투 안드리시나요? (웃음)
박선생님 > 당연하지. 우리집은 언제나 이중 회계야. 왜냐하면 나랑 부인이랑 가치관이 달라서 하나로 합쳐질 수가 없어.
이 와중에 제가 맥북을 무릎에 놓고 기대어 글을 쓰는 통창 밖으로 비가 오네요. 아이유의 '너의 의미'를 무한 반복해 들으며 글을 써내려 가고 있습니다. 참 행복한 순간입니다. 계속 이어갑니다.
마리샘 > 가치관이 다르시다니요? 자세하게 말씀해주세요.
박선생님 > 내 나이가 올해 여든 하나인데, 죽을 때가 다 되어서야 깨달은게 있어. 뭐냐하면 여자랑 남자는 다르다는 거야. 내가 너무 궁금해서 국어사전에서 찾아봤어. 모성애하고 부성애하고. 그런데 모성애를 설명하는 말중에는 '본능적으로'라는 말이 들어있어. 부성애를 설명하는 말에는 그 말이 없고. 그러니까 여자는 태어날때부터 좋은 남자를 만나서 예쁜 자식을 낳고 그 자식과 가족들을 최우선으로 놓는 '본능'이 있는 거야. 그런데 남자는 안 그런거지. 일단 남자는 자기 좋은 일에 빠지면 아무것도 생각 안하잖아.
이를테면 맛있는 게 생겨도 자기 자식부터 챙기고, 돈이 생겨도 가족들을 위해서 쓸 생각을 한단 말이지. 하지만 나는 돈이 생겨도 내가 좋아하는 이 기록물 보관하는 일에만 쓰니 결혼해서 지금까지 평생선을 그릴 수 밖에 없지. 그래서 지금 결혼한지 62년이 되었는데 그 시간동안 한 번도 내 편이 된 적이 없어. 도통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는데 그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된거야.
마리샘 > 그렇군요. 그럼 이제 아셨으니 사모님께 경제에 대한 전권을 드리실 건가요?(웃음)
박선생님 > (저를 빤히 보시며) 아니지. 우리집은 이중 회계야. 내가 이 기록물 사업으로 버는 돈은 내가 기록물 보존을 위해서 쓰고, 농사짓고 해서 나오는 돈은 부인이 관리하는 거지. 나는 자식들 교육에 일체 관여하지 않았어. 부인이 알아서 키웠지. 그래도 다들 잘 되서 좋아.
마리샘 > 그럼 맨날 싸우는 젊은 남녀에게 해주실 이야기가 있으실까요?
박선생님 > 요즘 젊은이들은 다 똑똑하고 잘 하잖아. 이 늙은이 말이 도움이 되겠어. 그리고 요즘 젊은이들은 늙은이들 말은 안들으려고 해. 그레도 자네는 선생님이니까 한번 들어볼텐가. (자세를 고쳐 앉으시며)
남녀 관계는 말이야, 한쪽이 무조건 져야해. 안그러면 나처럼 평생을 평행선을 달려. 예를 들자면 이런 거지. 나는 서울을 가고 싶고, 부인은 대전을 가고 싶단 말이야. 그런데 둘다 고집이 세서 자기가 가고싶은 데만 가겠다고 주장해. 그러다 둘이서 반반 양보하고 타협해서 서울하고 대전에서 가까운 평택에 가기로 결정을 했다고 해봐.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타협을 한 거지만 결국은 그 어느 누구에게도 이로운 게 아니야. 어느 한 쪽이 서울로 가자고 하면 따라 가던가 아니면 끝까지 주장해서 대전을 가던가 하는게 맞는거야.
여기까지 듣고 사실 소름이 돋았습니다. 이 말씀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가 되지요? 이거 비단 남녀관계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정말 깨달은 바가 많습니다.
박선생님 > 혹시 우리 박물관에 들어오는 입구 뭐 달라진거 없어?
마리샘 > 혹시 앞에 하천 복개한 거 말씀이신가요?
박선생님 > 아따 젊은이 예리하네. 맞어 복개했어. 그런데 말야 거기 복개 공사는 하는 모습을 처음부터 끝가지 지켜봤는데 참 재밌는 걸 발견했어. 가만히 보니까 공사하는 업체에서 그 복개하는 하천 바로 앞집의 요구를 다 들어주는 거야. 정말 하나도 토 안달고 해달라는대로 다 해주더라고. 특히 조금은 무리인 부탁으로 담을 그 집의 사유지를 넘오 공유지를 넘는 곳까지 쌓아주는 거야. 그래서 공사하는 사장에게 물어봤더니 그렇게 안하면 일이 안된데. 업체 입장도 있지만 민원인의 말을 다 들어주는 이유는 그래야 일이 된다는 거야. 이것 저것 따지고 들면 자기들은 공사 기일도 못 맞추고 그렇게 되면 공사 대금도 늘어나고 수익은 줄어든다는 거야. 그래서 그것보단 좀 무리한 요구여도 민원인의 요구를 다 들어주고 공사를 마무리 짓는 쪽이 더 이익이라는 거야. 남녀 사이도 마찬가지야. 반반 물러선 타협이라는 건 정말 의미 없는 거야. 서로에게 아무 의미가 없는 쪽으로 타협을 하고 만족해하는 바보같은 일은 안해야지 안그래?
마리샘 > 저는 올해는 6학년을 맡았는데 학급 학생들이 4명이에요. 선생님께서 젋으셨을때는 어떠셨나요?
박선생님 > 그때는 교실이 너무 부족해서 오전반 오후반 난리도 아니었지. 그런데 퇴직할 즈음(참고로 선생님께서는 1990년대에 퇴직하셨습니다.)에는 주로 시골 학교에서 근무하면서 복식 수업도 하고 그랬는데, 솔직히 말하면 수업이 안돼. 교과서 펴다 끝나는 거지 뭐. 이도 저도 아니었던 것 같아.
그리고, 좀 걱정 되더라고. 이 아이들이 커서는 동창회는 할 수 있을까 싶어서 말야. 사실 우리는 아이들 가르치고 한해가 지나면 그만인데 아이들은 커서 동창회도 하고 그래야 하는데 워낙 학생수가 없어서 안될거 같아. 선생네 반도 4명이면 여자애들은 시집가고 그러면 나오기도 힘들거고 안되는 거지 동창회가.
마리샘 > 저는 오히려 수업하기는 학생수가 좋은 거 같아요.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박선생님 > 나는 그렇게 생각안해. 내가 학생수가 아주 작은 학교에서 복식수업을 해보니까 이런 느낌이야. 식었다.
식었다는 건 말야 누구하나 뭘 배워볼 의지가 안보인다는 거야. 숫자가 적으면 되려 좋아야 하는데 적은 숫자만큼 배우고자 하는 열의도 가르치고자 하는 열의도 식은거지. 그래서 옛말에 '사람은 태어나면 서울로 보내고, 말은 태어나면 제주로 보낸다'는 게 있어. 많은 사람들 속에서 부대끼며 살아야 뭔가를 배우는 거지. 경쟁이 없는 속에서는 열정이 식어 버려. 요즘은 수요자 중심이나 맞춤형이니, 개별화 학습이니 뭐니 해도 결국은 식어버린거야. 그게 제대로 되겠어? 식어버린 불판에서는 아무 음식도 익지 않아.
마리샘 > 선생님 제가 지난번에 왔을때, 이 박물관에 소장된 수많은 교육기록물들이 체계적으로 보존되어야 하겠다고 걱정했는데요, 이번에 보니까 기록사 선생님들이 오셔서 조사하고 계시네요. 어떻게 된건가요?
박선생님 > 아. 저 분들은 항상 머무르는 건 아니고 토요일, 일요일, 이렇게 쉬는 날에는 꼬박 꼬박 와서 소장된 자료의 색인을 만들고 있어. 아마도 경상남도교육청에서 교육박물관 같은 걸 만드려나봐. 그래서 어떻게 구성할지도 조사하고, 실제로 우리 박물관에 어떤 자료가 어떻게 보관되어 있는지도 조사해서 기록하는거야.
마리샘 > 잘 됐네요. 그럼 혹시 교육박물관이 생기면 이 자료들 기증하실 생각이세요?
박선생님 > 글쎄.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내가 관리하고 그 나중은 맡겨야 겠지. 근데 걱정이야 가족들도 이해해주지 못했던 내 평생의 일들인데 다른 누군가가 내 생각만큼 지키고 관리해줄지.
마리샘 > 선생님, 아까 선생님 뒷마당 밭에 계신다고 해서 '그림의 집' 올라가는 길을 다녀왔는데요, 겨울에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처럼 꽃이 엄청나던데요?
박선생님 > 거봐 꽃 많지? 자네들이 여름에 다시 온다고 해서 그런줄로 생각해지만 이렇게 정말 먼길까지 와줄줄은 몰랐어. 왠만큼 멀어야지. 이렇게 찾아준게 인연이지. 자네는 아직도 00초에서 근무하고 있는가?
연세가 많으신데도, 여전히 명확한 기억력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마리샘 > 선생님께서 필름 카메라로 찍어서 보내주신 사진과 자료들 잘 받았습니다. 아마도 선생님에게 그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기록이 없으신가 봅니다. 선생님, 이제 저는 다시 먼길 돌아가야 해서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박선생님 > 응, 그래야지. 먼길 와줘서 고마와.
사실 더 많은 이야들을 나눴는데요, 개인적인 이야기도 있고해서 다 적진 못하구요, 공통적으로 필요한 부분만 녹음해 온 것 중에서 추려 봤습니다. 특히 한 쪽이 져줘야 한다는 이야기는 소름이 돋을만큼 많은 것들을 깨닫게 했습니다. 어른들 말씀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을 얻어먹는다는데, 옛어른들 말씀 틀린 거 하나도 없습니다.
분위기가 무거운 듯 하니 가벼운 이야기 하나 하겠습니다.
출발하려고 같이 간 일행이 이 박물관의 화장실을 잠깐 빌려썼는데요, 다녀오더니 빵터져서 막 웃습니다.
사방이 유리창으로 훤히 보이고, 세면대가 없어서 화장실 뒤쪽의 개울가에 가서 손을 씻고 왔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자연친화적인 화장실이에요. 자기 평생에 이런 화장실을 언제 써보겠냐며 계속 웃습니다. 너무 재밌는 경험이라고 합니다.
늘 방문자들에게 하시는대로 필름카메라로 기념 촬영을 해주셨습니다. 그러시면서 겨울 사진하고 비교해보면 얼마나 다른지 알게 될거야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같은 장소에서 계절만 달리해서 사진을 찍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돌아오기 위해 박물관을 나서는데 선생님께서 주차장까지 같이 나오셨습니다. 그리고 차를 돌려 빠져나올때까지 멀리서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그런 선생님의 모습이 멀어지면서 생각을 해봅니다. 박물관 방명록에 기록을 하긴 했지만 또 어떤 모습으로 선생님의 기억에, 또 항상 현재 진행형인 박물관의 기록에 남을지 무척이나 궁금합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저는 이야기합니다. 삶은 계속 되는 것이라구요.
누구나 기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것이 내 가슴속에만 있는 추억이든 아니면 비밀스럽게 쓰는 일기장이든 말이지요. 그리고 그것은 어느 순간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생이 다할때까지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박연묵 선생님의 기록은 그친 것이 아니라 오늘도 현재 진행형입니다. 그리고 그 기록들을 이제는 누군가 이어서 써내려가야 합니다. 그게 우리 선생님들이 교직에 있는 동안 가져야 하는 사명의 한 종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구를 위해서가 아닌 백년을 내다보는 교육을 위해서 말이지요.
큰 힘은 못 되어 드리지만 이렇게 멀리서나마 글 하나로 선생님의 그 열정에 작은 힘을 더해 봅니다. 늘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