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얼마나 재밌는 삶을 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최근의 삶은 재미가 없는 행복이 있는 일상입니다. 행복의 정의는 지구에 사는 사람 숫자만큼 다르니 여기서 말하는 행복이란 저의 행복이겠지요. 재미는 없지만 행복한 시간들입니다. 모든 것들이 무사해서 고맙고 행복합니다. 뭔가 특별한 일, 그게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특별한 일 자체가 일어나지 않는 일상이 행복합니다. 하루하루가 시트콤 같다는 말도 하지 않습니다. 말이 씨가 되어 정말 시트콤 같은 하루가 될까 봐 겁이 나서요.
스스로 알고 있는 단점들이 있을 텐데 제 경우에는 '너무 많은 생각'입니다. 특별한 대상이 있는 게 아니라 생각 자체가 많습니다. 그렇다 보니 다음다음 그다음까지 생각해서 심하게 상대를 배려하기도 하고 나에게 일어난 어떤 일에 대해서는 최악 최악 더 최악까지 가정하고 준비를 하게 되어 피곤한 일상의 연속이기도 합니다. 누가 시킨 게 아니니 모두 제 탓이겠지요.
매일 이벤트 같은 행사가 많은 날들이지만 오늘은 오후에 학교에 행사가 있고 개인적으로는 작은 연수를 위해서 출장을 가야 하는데 두 가지 모두 제가 맡은 일이라 쉬는 시간마다 부지런히 학교를 돌며 챙겨야 할 것들을 챙겼습니다.
마지막으로 보건실에 들러 복도를 지나오다 돌봄교실 출입문에 난 수없는 나사 구멍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습니다. 언뜻 봤는데 '곰돌이' 같았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부터 그저 잠금장치 고정을 위해서 수없는 시행착오로 만들어졌을 저 구멍들이 '곰돌이'로만 보였습니다. 출장을 가기 전 우리 반 어린이들과 급식소로 향하면서 봤는데도 여전히 '곰돌이'로 보였습니다.
하루면 수십 번을 그 앞을 지나다니고 수도 없이 봤던 구멍들인데 오늘은 왜 곰돌이로 보인 걸까요. 그저 의미 없는 시행착오의 구멍들일 뿐인데 왜 귀찮게 작은 의미가 붙어 버리는지 안 그래도 생각 많은 순간들인데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아마 제가 요즘 마주하고 있는 상황들이나 삶의 순간들을 나름 긍정의 방향으로 바라보고자 애쓰고 있었던 마음의 관성 때문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마주치게 되는 순간들을 긍정적으로 괜찮다고 말하며 잘 지나가고 있는데 그 관성의 끝자락에 저 '시행착오의 구멍들'이 '곰돌이'로까지 보이게 했나 봅니다.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 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티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별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서정주 '자화상' 전문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거죠. 때론 보고 싶은 모습으로 보고 싶습니다. 막막한 현실 속에서도 내 마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는 온전히 스스로 그 방향성을 정할 수 있으니까요.
최근 출퇴근 길을 위로해 주는 랜선 친구 '김창옥 교수'의 강의 하나를 듣고 싶어서 유튜브를 실행했는데 유튜브 알고리즘이 이 영상을 가장 먼저 보여주었습니다. 무섭게 감시하는 구글이고 유튜브입니다. 최근 찾아본 영상들과 맥락을 같이 하는 영상들입니다. 퇴사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늘 있는 삶의 방향성에 대한 고민이지요. 생각 많은 자의 일상 루틴일 따름입니다.
사는 건 현실이지만
공연과 떠도는 강연 속엔 판타지가 있지요.
그 판타지를 종종 찾아 봅니다.
꼭 리얼한 현실이 늘 도움이 되는 건 아니니까요.
차를 세우고 영상을 끝까지 봤습니다. 영상이나 댓글의 전체적인 맥락은 '퇴사 후 행복 찾은 용기 있는 선생님'에 초점이 있는 것 같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냥 사는 일'에 대한 부러움이었습니다. 그냥 살아도 되는데, 충분한데요.
지나가는 모든 순간들을 따스한 시선으로 스스로 만이라도 응원하고 싶은데 그게 그렇게 어렵더라구요. 그래서 억지로, 일부러 그러려고 하는 요즘입니다. 그런 중에 그런 마음의 관성이 '시행착오의 구멍들' 마저 '곰돌이'로 마음에 판타지를 주었나 봅니다.
하루의 끝자락에 그냥 살고자 다짐해 봅니다. 그까이꺼 대충.
<2023년 11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