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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샘 Nov 27. 2023

가을 구경 : 다 때가 있다는 건

학교 운동장 주변의 단풍나무들이 이제 완전히 물들었네요.

어제 오전의 끄트머리에 운동장을 어린이들과 걸으며 남겨둔 단풍 사진입니다. 연 이틀 날씨까지 따뜻해서 더더욱 가을을 만끽했는데 웬걸 오늘 아침 출근길은 칼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어 매일 조금씩이라도 차 창문을 열고 즐기던 아침의 상쾌한 공기를 마시는 일을 주저하게 만들었습니다.




지금껏 지나온 가을의 풍경 중에서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기억에 남은 몇몇의 가을 풍경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10여 년 전에 여기서 5시간 남짓 걸리는 경주 불국사로 현장체험학습을 갔을 때 봤던 경주 불국사 안의 새빨간 단풍나무의 모습이고 또 하나는 재작년 다시 찾았던 불국사의 단풍입니다. 산행을 자체를 하지 않는 집돌이라 몇 번 나서지 않은 가을의 길에서 만난 강렬한 빨강의 가을 풍경이 공교롭게 모두 불국사의 단풍이었네요.

어제 운동장 둘레길을 걸으며 시간적으로는 겨울이지만 단풍은 이제야 완전한 가을이구나 싶었습니다. 여기저기 가을의 흔적들이 가득합니다.

그리고 도토리 실물을 처음 봤습니다. 그보다도 학교에 도토리나무가 있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처음엔 이게 도토린가 싶어 마침 지나가시던 유치원 선생님께 여쭈어보니 도토리가 맞다고 하셨습니다. 도토리 실물을 보곤 동요 노랫말이 한 번에 이해가 되었습니다.


떼굴떼굴 떼굴떼굴 도토리가 어디서 왔나
단풍잎 곱게 물든 산골짝에서 왔지

이렇게 생겨서 '떼굴떼굴' 구를 수 있던 거였습니다. 도토리에 대한 이미지는 약간 럭비공 같은 모양의 이미지여서 이 모양으로 어떻게 '떼굴떼굴' 구를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실물을 보고는 한 번에 이해했습니다.


학교 잔디 정원에 있는 정자마저 마치 가을 풍경을 위한 소품인 듯 저렇게 주저 않아 있어서 우리 반 어린이들도 스마트폰을 꺼내 연신 사진을 찍습니다. 이 가을이 선생님에게만 예쁜 건 아니었나 봅니다.

우리가 인식하는 가을이란 9월, 10월, 11월 초 정도 일 텐데 12월이 다 되어 가는 이제야 단풍은 새빨갛게 자기 빛깔을 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가을과 정작 단풍이 새빨갛게 자신의 가을 내보이는 시간엔 시간차가 좀 있는 거네요.



우리가 기대하는 가을의 풍경이란 조금은 따스하지만 선선한 바람이 불고, 단풍잎과 은행잎이 물들고 하늘은 높고 파란 그런 시간인데 단풍이 새빨갛게 물든 오늘은 그런 시간들은 아닙니다. 그래도 단풍은 새빨갛게 제 역할을 다하고 있습니다.


모든 일엔 때가 있다.

누구에게나 때가 있습니다.


공부도 다 때가 있어.
남들 공부할 때 공부하고 놀 때 놀고 해야지
남들 할 때 해야 고생 덜해.

흔히 듣는 말들인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반성해 봅니다. 왜 그렇게 그때를 밖의 기준으로만 맞추며 살아왔고 또 자녀들에게 강요하고 있는지 말이죠. 단풍이 빨갛게 물드는 계절이 딱 맞춘 기대하는 시기의 가을이 아니듯 우리의 삶에 주어진 그때라는 것도 결국 우리가 흔히 아는 '전형적인 가을의 이미지'와 다를 바 없는 것인데요.


그때를 잘 쫓아 '제때제때' 하는 사람도 있지만 또 몇몇 사람들은 반박자 혹은 여러 마디 느리게 제때를 해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추석 명절에 올라가는 과일은 보통 햇과일입니다. 햇과일이란 그해에 새롭게 열리고 수확한 과일이라는 뜻이죠. 추석에 햇과일을 선물로 주고받곤 합니다.


추석에 햇사과를 선물로 받았는데
먹어보니  맛이 별로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보통 사과에 대한 사람들의 이미지는
내 돈 주고는 안 사 먹지만 누가 주면 먹는 그런 과일 정도라고 하죠.
그런데 아이러니한 건
사과가 가장 맛있게 익는 시기는 훨씬 후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과의 그 '제때'를 모르고
내 돈 주고 사 먹긴 그렇고
누가 주면 그냥 먹는 과일로 치부해버리는 거죠.

-'김창옥 TV 채널 강연' 중에서

우리의 제때는 언제일지 아무도 모릅니다. 아직 덜 익은 우리를 그저 그런 사람으로 치부해버리면 안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너무 조바심 내지 않고 제때를 향해 조금씩 익어가는 일이 아주 중요한 거 같습니다.


그래서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라는 말은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게 노력하라는 의미도 있겠지만 또 더 깊이 들여다보면 '다 스스로의 때가 있으니 너무 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그때를 찾아 최선을 다하라'라는 말도 분명 담겨 있다고 생각해 봅니다.


학교 주변에 가득한 새빨간 단풍과 가을의 풍경을 만끽하며 모든 것들의 때와 우리네 삶의 아직 오지 않은 때를 위해서, 그리고 이제 그때를 향해가는 어린이들과도 생각을 나누어야겠다 생각해 봅니다.


어제 요즘 만들어 가고 있는 동요 앨범에 여러 사정으로 녹음이 늦어졌다고 알려오신 선생님께서 미안해하시기에 답장을 보내드렸습니다.


선생님, 미리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급한 거보다 평생 남을 음원이니 잘 녹음하는 게 더 중요할 것 같아요.

그저 모든 일엔 때가 분명히 있지만 그때가 언제인지에 대한 기준은 스스로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온전한 빛깔로 맛과 향을 낼 수 있는 그날을 기다려봅니다. 바로 그때가 우리의 '제때'니까요.


이 가을은 외롭고 또 외로운 삶에 정말 좋은 선물이네요.


<2023년 11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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