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 염지 공장이자 창고에서의 빈대살이
이전 노숙과 비슷한 이야기로 한때 창고에서 몇 개월간 살았던 시기가 있다.
그 시기는 동탄에서 서울로 걸어올라 온 바로 직후로 갈 곳이 없던 나는 당시 아버지께서 운영하던 닭공장 겸 창고의 휴게실 한편에 내 짐을 두고 퇴근 후에는 잠을 청하는 삶을 살았더랬다.
고작 몇 달이긴 하지만 이때의 생활로 인하여 한동안 트라우마 같은 게 생겼는데 우리의 환경으로 인하여 그 사람의 향기가 정해진다고 이때 알게 되었다.
치킨집을 운영하시는 아버지께서는 직접 닭을 염지하고 소스도 직접 만들어서 그걸 가게에서 활용하셨는데 지금은 개인 점포라고는 하지만 당시에는 프랜차이즈를 목표로 하셨어서 그리 운영을 하셨더랬다.
그러한 공간에서 지낸다는 것은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으나 당시 갈 곳이 없던 나로서는 다른 선택지도 없었다. 특히 매일 닭 염지가 되는 공간에서 지냈기에 몸에서는 항상 그 냄새가 배어있어 겉은 번드르르할지라도 다들 냄새가 난다며 피하기 일쑤였고 빨래가 가능한 공간이 없었기에 매일 손빨래로 연명하여 특히나 옷에서부터 닭 염지의 향이 가득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혹자는 왜 그 당시에 '아버지와 함께 살지 않았는가?'를 의문으로 던지지만 아버지께서도 한차례 하시던 사업을 접고 열심히 다른 일을 하시고 살아가시던 차에 일하시던 그곳에서도 가족경영의 폐해로 인한 임직원 대거퇴사사태 속에서 그들을 챙기기에 앞장서셨으니 그로 인해 프랜차이즈로 치킨브랜드를 론칭하셨으나 거둬들인 임직원들과 퇴사이전의 기업에서는 잘 맞았던 호흡이 새로이 시작한 프랜차이즈에서는 맞지 않았기에 결국 빚만 남긴 채 다시 한차례 주저앉게 되었더랬다.
그로 인하여 본인의 거처 역시 원룸으로 상당히 축소되어 장성한 아들과 함께 거주함에는 무리를 느끼신바 결국 아들이라고는 하지만 창고한켠을 내어주신 것으로 봐야 함이 맞으리라.
스스로 나는 돌아갈 곳이 없다고 얘기하는 것에는 이 이유에 더하여 이제는 재혼을 하신 아버지의 새로운 가정에 나 스스로 발을 붙이고자 함이 없는 것도 큰 이유가 될 것이다.
물론 나의 친모께서도 재혼을 하시어 그 가정에 관여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으니 만약 비슷한 일이 또 생긴다 할지라도 결국 돌아갈 곳이 없는 상황임에는 변함이 없다.
결국 그 창고에서의 생활도 재개발로 인한 퇴거요청에 의해 다시 한차례 떠돌았고 훗날 일전에 다루었던 노숙생활까지로 이어지게 된다.
그나마도 창고에서의 생활은 주변인들에게 냄새로 인한 거리감만 조성하였지만 숙식을 해결하는 데 있어서는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래도 아들이라고 창고 안에 있던 다양한 먹거리들을 일정량 조리해 먹을 수 있었기에 상대적으로 배를 곯을 일은 전혀 없었고 전기가 통하는 장소였기에 전기장판으로 늦겨울의 추위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니 그 얼마나 다행이랴.
이 일을 경험하기 전까지는 어찌 사람이 집이 아닌 공간에서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있었지만 얼마나 갈 곳이 없었다면 그렇게까지 살 수밖에 없었을까를 먼저 생각한다. 이때의 경험으로 인해 혹여라도 여유가 된다면 함께 일하게 될 사람들을 위해 조건 없이 잠시 지낼 수 있는 쾌적한 공간을 마련해주고 싶을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