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캐치] : 스며든 가을을 '캐치' 하다
목요일이다
그리고 밤 9시 10분..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 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
유안진 님의 '지란지교를 꿈꾸며' 라는 수필의 첫 문장이다.
이 글은 나에게 참 그럴듯한 수필로만 느껴질 뿐...
막상, 현실은...
저녁을 먹고 나면...
커피도 빨리 마시고... 뉴스도 빨리 보고... 건조기에서 와이프가 꺼내온 옷은
그 따뜻한 열기가 사라지기 전에 빨랑빨랑 개어주고 해야 한다.
나이 30대 때는 마누라가 무서워서 해야 하고 그때만 요령껏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50이 넘었는데도 이상하게 또 옷 개키는 걸... 또 해야 한다.
20년 동안 옷을 개어도 여자들 속옷은 도대체 어떻게 개어야 하는 건지 아직까지도 정말 모르겠다.
그래서 항상 여자들 속옷은 그냥 반 접어만 둔다.
'이제 대강 할 일은 다했다'... 싶어서 스마트폰으로 '오목' 게임 두며 여유를 좀 부려본다.
싱크대 쪽에서는 와이프가 설거지하는 소리가 오늘따라 굉~장히 요란히 달그락거리고 시끄럽다.
앗, 저 소리는?
맞다, '여자의 언어다!'
뭐지?
게임하지 말고 내가 뭘 또 해야 건가?
내가 뭘 잘못했나?
뭘 안 했나?
발을 안 닦아서 냄새나나?
양말은 제대로 벗어놨는데...
샤워를 해야 하나?
직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도대체 모르겠어서, 일단 내가 와이프 눈앞에서 잠깐이라도 사라져 안보이기로 했다.
'철컥!...... 띠리리릭~' 현관문이 닫히고 집을 나섰다.
언제부터인지 '암묵적인 법'처럼 우리 집 유일한 남자인 내가 하는 일이 되어버린 거!
목요일이라서 분리수거물들을 한 짐 지고 나왔다.
한 손에는 노란색 종량제 쓰레기 꽉 찬 봉투와 음식물 쓰레기로 꽈~악 찬 검은 비닐봉지...
또 한 손에는 플라스틱류 종이류 캔병류 비닐류가 담긴 커다란 비닐봉투를 든 채로
무의식적으로 엘리베이터 [내려감] 버튼을 누르고는 나도 모를 괴이한 노래를 흥얼거리며...
저~~ 아래층에서부터 올라오고 있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서있다.
성격이 쫌 이상한 앞 집의 아주머니가 하필 지금 문을 덜컥 나와서 나와 마주치지 않기를 바라며 말이다.
엘리베이터 문이 스테인리스 재질인가?
번쩍번쩍한 엘리베이터의 출입문으로 다 닳아가는 고동색 구록스 슬리퍼를 신고,
헐렁한 고무줄 반바지를 대충 입고 있는 내 모습이 반사되어 거울처럼 비춰 보이고 있다.
그 모습이 머리 위 복도 천장에 달린 LED 조명 덕분에 아주 선명하다.
엘리베이터가 14층에 올라왔고 문이 열린다.
"지하 1층~ 1층~ 지하 1층 취소" (습관적으로. 주차층 버튼을 누를 때가 있다)
잠시 후...
"딩동댕동~~~...... 1층입니다"
여자 기계 목소리가 나오고 서서히 닫히고 있는 엘리베이터 문을 뒤로하고 아파트 밖으로 나오니...
저~쪽 화단 쪽으로 군데군데 같은 우리 같은 동 주민으로 보이는 몇 명 나와 있다.
새파란 젊은 놈 한 놈...
나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두 양반...
나보다는 네다섯 살 정도 많아 보이는 한 분...
쪼그리고 앉아있는 사람도 있고..
다들.. 몇 층 몇 호의 아빠이거나 뉘 집의 다 큰 아들... 서 있는 폼들이 다들 비슷하다.
한쪽 손에는 담배불빛... 또 한쪽 손에는 얼굴을 환하게 비추고 있는 스마트폰 밝은 액정불빛...
자주 보는 풍경이지만 왠지 처량해 보이고 짠~~ 하다.
그 모습을 뒤로하고 아파트 뒤편의 분리수거 야적장으로 갔다가 다 내버리고 다시 돌아와
와이프가 도사리고(?) 있는 집으로 바로 올라가기가 뭣해서 화단 앞 벤치에 잠시 앉았다.
한 손에 스마트폰 들고 한 손에 담배를 피워대던 주민 아저씨들... 모두를 각자 집으로 들어갔는지 안 보인다.
딱 한 명의 아저씨만 남아서 한 모금 두 모금 마지막 세 모금 피워대다가는
허공에 담배연기를 남기고 집으로 들어갔다.
그 뒤쪽으로...
가로등이 비추고 있는 화양목이 쭈~욱 둘러싼 화단...
그 안으로 주목나무, 감나무, 앵두나무, 벚나무... 제법 아담하게 조경이 잘 되어 보기가 좋다..
나도 나무처럼 잠시.. 그렇게 쫌 앉아 있었다.
삑.. 삑.. 삑... 찌르. 찌르 찌르... 뾱뾱뾱뾱..
풀벌레 우는 소리가 난다..
화단 나무들 그 아래... 한해살이 화초들과 웃자란 잡초들이 뒤엉킨 풀숲 쪽에서 들리는 것 같다..
사실.. 쓰레기 봉지를 들고 나왔을 때부터 풀벌레 소리는 들리고 있었다
나이가 들어야 느끼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매해마다 여름이 아무리 더워도 8월 둘째 주만 되어도 아침저녁으로는 찬바람을 느낀다.
스마트폰으로 날씨를 본다.
현재 기온 25도.. 여름이 맞나? 엊그제 며칠 전보다는 많이 내려갔다.
낮에는 아직 아직 더워도 밤이 되면 습함이 사라진 건조해진 바람결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어디 가까이에서 풀벌레 소리가 점점 커지듯 들려온다.
5월이 아닌 8월이라서 아카시아향은 아닐 테지만 비슷한 향기가 밤바람결에 실려오는 것을
콧속으로 감지할 수 있다.
가을꽃인가 보다..
어떤 꽃의 향기 인지 사람기분을 참 좋게 만든다.
아!
얼른 집으로 올라가야지..
그리고 와이프 잔소리는 두 팔로 안고 틀어막아야겠다.
밤이 되어야 이렇게 하늘을 올려다본다.
오늘은 하늘에 별도 없다.
그래도, 조금씩... 조금씩... 계속... 계속....
메밀꽃이 피는 9월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