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줌~ 오이 비누는 이젠 희미해진 옛 추억
어김없이 아침이 밝아오면 나는 욕실로 향한다.
비누를 손에 쥐고 따뜻한 물로 얼굴을 적신다.
뽀드득 소리가 나도록 열심히 세수를 마치고 나면,
이상하게도 얼굴이 더 땅기고 푸석거리는 느낌이 든다.
피부도 나이를 먹어가는 탓일까?
요즘이야 비누 대신 클렌징 폼이나 세안제를 쓰는 사람이 많지만,
누가 살뜰하게라도 "이거 쓰세요" 하고 세안제를 챙겨주지 않는 이상,
나는 여전히 비누를 쓴다.
그래도, 비누로 세수를 하고 난 뒤의 그 뽀드득한 느낌이 좋으니
어쩌겠나.
가끔...
아내나 딸들이 쓰는 클렌징 폼이나 세안제가 세면대에 놓여 있을 때가 있다.
그때마다 호기심에 한 번씩 써보면 확실히 다르다.
얼굴 살결이 매끈하고 부드러워지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다음 세수 때는 또다시 따뜻한 물로 얼굴을 두어 번 적시고는 익숙하게 세숫비누를 잡는다.
욕실 수납장을 열면...
천연 한방 비누, 올리브 비누, 라벤더 비누, 해피바스, 헤라 등 다양한 비누들이 있다.
심지어 쌀 비누도 보인다.
시대가 좋아져서 그런지 요즘 비누들은 물기에 잘 불거나 무르지 않는다.
예전에는 비누를 만지면 마치 발뒤꿈치 각질처럼 물컹거리는 느낌이 싫었는데,
요즘 비누는 그런 불쾌감이 훨씬 덜하다.
요즘은 화장품 회사의 세안제가 대세지만, 솔직히 향기는 비누만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건 그저 나만의 고리타분한 취향일 뿐일까?
문득 향기 좋았던 예전 비누들이 그리워진다.
다이얼, 하이크림디, 인삼 비누, 오이 비누, 도브, 럭스, 알뜨랑…
그중에서도 나는 시원하고 상큼한 오이 비누 향을 특히 좋아했었다.
요즘도 오이 비누가 있을까?
오이 비누는 다른 비누에서는 느낄 수 없는 시원하고 신선한 향기가 난다.
비누칠을 할 때 풍성하다기보다는 아삭이는 듯한 거품도 매력적이었다.
그래서 나는 오이 비누를 즐겨 썼던 것 같다.
비누, 그 향기로운 기억들...
나의 오이 비누 애착은 고등학생 때부터 시작되었다.
1984년,
고1 때로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면… 흠, 라테는 말이야.
보통과(인문계 진학반)는 야간 자율학습, 일명 '야자'를 했었다.
80년대 기온은 요즘에 비하면 양반이었지만,
그래도 5월 말 6월 초여름은 당시 기준으로 꽤 더웠다.
벽면에 선풍기 한 대만 달랑 돌아가던 시절,
밤이 되어도 교실 안은 자율학습을 하기에는 좀 많이 더웠다.
그러다 보니 약속이라도 한 듯,
아니 마치 학교 지침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우리들은 저마다 세숫비누와 수건을 준비하게 되었고,
자율학습을 하다가 너무 더우면 '임간교실' 옆 야외 수돗가에 가서는...
"어푸~ 어푸~ 푸부부부~"
요란한(?) 세수를 하고 교실로 돌아오곤 했다.
아예 비누로 머리를 감는 친구도 있었다.
나 역시 그 밤에 오이 비누 향기로 시원하게 정신을 식히는 날이 많았다.
(그 당시 학교 교정 안에는 야외 수업이 가능하도록 조성해 놓은 '임간교실'이라는 곳이 있었다.
아름드리 큰 미루나무인지 느티나무 사이사이에 벤치를 만들어 학생들이 앉아서 수업을 들을 수 있었고,
그 옆에는 그 수돗가가 있었다.)
어두워진 밤, 야간 자율학습 시간 내내 수건과 비누를 들고
임간교실 수돗가로 나오는 친구들이 끊이지 않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남녀 합반이었던 우리 반 남자들은 가끔 여자 친구들과 함께 수돗가를 다니기도 했다.
여자애들은 무슨 특별한 향수 비누라도 쓰는지 향기가 너무 좋았다.
그래서인지 여자애들에게서 좋은 향기가 났다.
세수를 하고 난 후 머릿결이 젖어있는 여자애들 모습이 예뻐 보이던 건 사춘기 남자애들의 수컷 본능?
아주 좋은 향기를 가진 비누를 사용하는 것 같아 궁금했는데,
살짝 물어보니 '하이크림디'라는 비누란다.
그래서 나중에는 향기 좋은 하이크림디 비누도 많이 썼지만,
그래도 나는 오이 비누 향이 좋아서 줄곧 오이 비누를 썼던 것 같다.
이것이 나의 오이 비누에 대한 향기로운 기억...
다시 시점은 우리 집 욕실...
우리 집 여자들은 클렌징 폼이나 세안제를 사용하는데...
그렇다면? 가만…
우리 집 욕실 수납장 안의 많은 비누들은 다 내 몫인 건가?
앞으로 100년은 쓸 수 있을 것 같다.
비누 열심히 쓰고 푸석푸석해진 얼굴에는 이제 로션도 열심히 발라야겠다.
수요일의 아침이 밝아온다.
일찌감치 세수나 할까?
세수를 하고 나면 상쾌한 아침이겠지?
쿠팡에서 오이 비누를 주문했다.
4개에 3천 원. 비누가 많은데 또 샀다고 아내의 훈계(?)가 있을 것을 짐작한다.
내일 '오이 비누'가 도착한단다.
생각해 보면...
향기로웠던 추억들이...
내일 온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