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 아래란 아름다운 말
1. 행복의 문고리
‘행복의 한 쪽 문이 닫힐 때 다른 쪽 문이 열린다.’ 쏟아지는 눈물을 참으며 병원 엘레베이터 한 쪽에 붙어 있는 글귀를 눈으로 더듬어 읽는다. 열릴까, 열릴까, 행복의 문이 내게도 열려줄까. 착잡한 마음으로 서 있는 내 손을 잡는 건 언제나 그랬듯 우리 엄마.
엄마가 되는 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일 것이다. 물론 나에게도. 뜻하지 않은 임신이었고 불가피하게 인생의 적지 않은 부분을 수정해야 했지만 그럼에도 결혼에 연이어 자연스럽게 찾아와 준 아기는 크나큰 행복이었다. 예정일도 가을의 한 가운데인 10월. 우리 부부는 아기를 만날 날을 기다리며 280일을 자분자분, 그저 순리대로 가고자 했다. 아니 그러고 싶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임신을 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출산도 하고, 마치 정해진 길을 따라 가듯이 모든 것들이 순조로울 거라고 믿던 여름의 길목. 나는 너무 빨리 아기를 낳았다.
내 병실에서 열 발자국 쯤 가면 우리 아들이 입원한 신생아 중환자실이었다.
생살을 찢은 고통보다 미안함과 죄책감에 마음이 더 많이 찢어졌다. 그 옆에서 당신 딸의 고통과 슬픔을 고스란히 지켜보던 우리 엄마의 마음은 아마 나보다 더 많이 찢어지고 아팠을 것이다. 그 땐 차마 느낄 수 없었던 엄마의 슬픔이 이제야 비로소 복기되는 걸 보니, 나도 참 불효자식인 것 같다.
신생아 중환자실의 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는다. 철저히 외부인을 통제하고 감염관리를 하기 때문이다. 하루 두 번, 30분씩만 허락된 면회. 그나마도 할머니는 불가, 엄마아빠만 허락된 시간. 직업군인인 남편은 주말에만 면회가 가능했다. 아들이 입원한 114일 그 긴 시간을 우리 엄마는 꼬박, 나와 동행했다. 동행. 나는 동행이라 표현하고, 엄마에겐 기도였을 시간들. 내가 무너지지 않게 붙잡아 준 시간들. ‘이렇게 매일 오면, 어떤 날엔 한 번이라도 넣어줄까 싶어서... ’ 농담 반 진담 반 가끔 하시곤 하던 말씀. 살짝 열리는 문틈으로 까치발을 하고, 눈을 가늘게 뜨고 손자의 흔적이라도 볼 수 있을까 싶어 애쓰던 엄마. 그 때마다 매번 죄송하고 또 감사했다,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2. 산이와 나무들
그 사이 아들은 ‘산’이란 이름을 갖게 됐다. 사실 아기의 성별과 무관하게 산과 같은 성품을 가진 넓고 높고, 깊고 단단한 인품을 가진 사람으로 자라길 바라는 마음에 미리 정해 둔 이름이었다. 산이는 이름처럼 참 산과 같아서 매일 매일을 잘 견뎌주었다. 아니 잘 성장해주었다.
절반은 우리 아기의 덕분, 절반은 우리 엄마의 기도 덕분으로 아들은 다행히 한 걸음 한 걸음 퇴원을 향해 나아갔다. 모든 것이 순조롭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불행과 슬픔에 매몰되지 않고 ‘어쩌면, 그래 우리에게도 미래가’라며 내일을 내다볼 수 있게 한 건 알 수 없는 인생의 비밀이자 조금 열린 행복의 문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때, 내가 아주 조금 열린 행복의 문을 놓치지 않고 잘 붙잡을 수 있었던 건 옆에서 나보다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이 아파한 우리 엄마 덕분이다.
엄마가 항상 하신 말씀이 있다. 아기들은 엄마의 감정을 그대로 다 느낀다고. 그러니까 면회 가서 울거나 슬퍼하거나 하지 말고 밝고 긍정적인 얘기만 해주고 그런 기운만 불어 넣어주라고. 엄마의 격려대로 면회 시간 30분 동안 난 쉬지 않고 재잘댔다. 인큐베이터 뒤로 놓인 창문 너머로 계절이 변하는 모습이나 날씨의 표정들을 시시각각 중계하기도 하고, ‘나뭇 가지에 실처럼 날아든 솜사탕~’으로 시작하는 동요와 ‘반짝반짝 작은별~’도 자장가로 불러주었다. 산이는 지금도 이 두 노래를 제일 좋아한다. 그리고 항상 바깥에 할머니가 와 계시는데, 할머니가 오늘은 산이한테 사랑한다고 전해주래.. 라거나 할머니가 오늘은 강아지랑 고양이 목욕을 시켜주셨는데 산이 집에 오면 산이도 목욕 시켜 주실거래 라든가 하는 할머니 얘기도 늘 들려주었다.
살짝 열린 신생아중환자실의 문틈으로 나와 산이, 그리고 엄마는 그렇게 서로를 지탱하고 지지하고 있었다. 마치 뿌리가 연결된 나무처럼.
3. 닳아버린 연골
산이는 세상에 빨리 나온 딱 그만큼 병원에 있다가, 2017년 10월 가을의 절정에 집으로 왔다. 한 번도 집에 있어 본 적이 없었으니 돌아왔다란 말이 어색하지만 그래도 산이는 돌아온 것이다. 내 품으로. 산이의 퇴원과 함께 나는 독박육아란 전쟁 같은 현실 속으로 던져졌다. 하루하루 불안과 싸우는 시간이었다. 행여나 산이가 아프면 어떡하나, 밤에 자다가 갑자기 울면 어떡하나 머리 속으로 갖은 상황에 대해 시뮬레이션을 그려봐도 막막함이 가시지 않았다. 그 때 막연히 문제집의 해답지처럼 엄마를 찾았지만, 내 나이가 벌써 서른셋. 삼십년도 더 전에 끝난 신생아 돌보기는 엄마한테도 새삼스레 낯선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세상 모든 딸들이 그렇듯이 엄마 말고 별 답이 있을 리가. 서툰 딸내미와 여리디 여린 그 딸의 어린 아들내미 곁을 지켜주신 늙은 엄마.
엄마 덕분에 전투육아, 독박육아는 견딜만한 일상이 되었다. 삼시세끼 중 한 번은 밥을 먹을 수 있었고, 밤에 샤워도 할 수 있었고, 수시로 깼지만 침대에 누워 잠을 잘 수도 있었으니. 아주 호강한 신생아 돌봄이었다.
분유 타는 것도, 기저귀 가는 것도 밤에 선잠을 자는 것도 다 익숙해져갔지만 산이 목욕시키는 것만은 내내 어려웠다. 그 어려운 것을 엄마는 어떻게 그렇게 가뿐하고 우아하게 시키는 지. 산이가 엄마 손에만 들어가면 뽀샤시하고 말간 얼굴이 되었다. 귀에 물 하나 들어가지 않고.
어릴 때부터 집안의 온갖 수리와 AS를 담당하던 우리 엄마는 별명이 맥가이버였다. 아빠의 병환으로 자연스레 손이 필요한 모든 상황이 엄마에게 돌아간 탓이었지만 엄마는 참으로 못 하는 게 없었다. 야무지고 정확하게, 매뉴얼 같은 거 읽지 않아도 모든 고장과 비정상들이 엄마 손 앞에선 바로 잡혀지고 정상성을 되찾았다. 그건 비단 집안 곳곳의 물건들 뿐은 아니었다. 고장 난 나의 일상도, 입맛도, 건강도 엄마의 손길과 숨결이 닿아 점점 원래의 리듬과 건강함을 회복하고 있었다.
그렇게 나와 산이가 점점 일상이란 선물을 당연하게 여기게 될 무렵, 원래도 좋지 않았던 엄마의 무릎은 결국 덜컥 고장이 나고 말았다. 반월판 연골 파열. 엄마를 진단한 의사는 축구선수도 이렇게까지 심하게는 연골이 상하지는 않는다고, 과거에 교통사고 같은 거 당한 적 있냐고 물었다. 분명 걷기도 힘들었을거라고. 엄마는 의학적으로 그렇게 걷기도 힘든 다리로 손자를 목욕시키고 안고 엎고 어르고 재웠다. 왜 엄마라고 아프지 않았을까. 뿌리가 반쯤 뽑힌 나무처럼 바람이 드나들면 시리고 시렸을 그 다리로 엄마는 부처님 앞에서 절을 했다. 당신 딸과 그 딸의 아기를 지켜달라고.
구정 연휴 엄마는 무릎 수술을 위해 입원을 했다. 이번엔 내가 엄마한테 배운 대로 했다. 밝고 명랑하게. 엄마를 위해 산이의 귀여운 사진을 잔뜩 찍어다 보여 드리고 영상 통화도 자주 했다. 다행히 수술은 잘 끝났고, 엄마는 열심히 재활치료중이시다. “무릎 빨리 낫게 해야 산이 또 업어주고 놀아주지!”
4. 엄마의 무릎 아래서
‘슬하’란 말이 참 지혜로운 말이란 생각이 든다. 요즘 부쩍 뭐든지 잡고 일어나려고 하는 아들은 내가 앉아 있으면 쪼르르 기어와 내 무릎을 잡고 선다. 무릎 뼈에 딱 매달려 안아 달라고 손을 뻗는 산이의 모습을 볼 때면 벅찬 행복감과 함께 내가 엄마구나 하는 현실이 무겁게 느껴진다.
나도 그랬겠지, 엄마의 무릎을 잡고 서고, 어깨에 기대고, 넘어지고 꺾일 때마다 어김없이 내미는 엄마의 손을 잡고 지금까지 버텼겠지. 엄마의 무릎이 내 삶에 기둥이고 뿌리였겠지. 그렇게 반평생을 딸의 기둥이 되어 주느라 엄마의 무릎이 너덜너덜해진 건 아닐까 죄송한 마음이 자꾸만 든다.
지나간 시간을 돌이킬 수도 없고, 철없던 과거를 고칠 수도 없으니 내가 할 수 있는 건 지금 엄마에게 잘 하는 것, 그리고 우리 아들에게 나도 든든히 무릎을 내어주는 것 아닐까. 너무도 사랑하고 존경해서 ‘사랑’이라는 단어만으로는 그 감사함과 은혜를 다 담을 수 없지만, 또 ‘사랑’이라는 말 말고는 마땅한 말도 없어서... 엄마와 아들에게 속삭인다. “이 세상에서 제일, 1번으로 사랑하고 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