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 완 Oct 24. 2020

#17 들키지 않은 채 지나간 사춘기

 아버지의 섯부른 보증이 드러나기 전, 아버지의 잘못된 부채가 공개되기 전, 나의 큰누나가 조현병의 확진을 받기 전, 청약 대출금을 다 갚아낸 우리 집을 팔기 전, 나는 중학교에 입학했다. 나의 큰누나처럼 입학식에서 선서를 하는 영광은 없었지만 나는 공부를 곧잘 했다. 칭찬과 관심 속에서 성실하고 즐겁게 학교생활을 해 나갔다. 특히 수학이 재미있었다. 시험이 끝나고 학원에 가면 공부를 꽤나 한다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백 점은 나뿐이었다. 공부에 느끼는 재미나 성적에 대한 자부심만큼 여러 꿈을 갖게 됐다.     


 그 해 겨울이 될 때쯤 비극은 알을 깨고 나와 우리 가족을 집어 삼켰다. 감당이 불가능한 채무가 드러났다. 큰누나의 증상은 더욱 심해졌다. 이혼과 죽음, 잠적이나 도망을 예고하는 이야기들은 나의 부모가 서로 나누는 폭언에 섞여 큰 소리로 집을 떠다녔다. 갑자기 학원을 다닐 수 없게 되었다. 동네를 옮겨 낡고 좁은 집으로 이사를 했다. 벌어지는 일을 이해하기도 전에 나는 구겨진 채 비극의 알에 갇혔다. 그 때 열 네 살이었다.     


 나는 거절당하지 않으려 삶을 살았다. 걸핏하면 화를 내며 욕을 하는, 단 한 마디의 말도 통하지 않던 나의 아버지. 그리고 삶이 던져준 짐을 어쩌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살던 나의 어머니, 눈이 뒤집힌 채 칼을 들고 죽여버리겠다며 소리지르던 나의 큰누나, 나를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던 나의 작은누나를 가족으로 두었던 나는 사람과 관계를 맺는 일이 갑자기 어려워졌다. 언제든 세상의 종말을 맞아도 대수롭지 않을 것 같은 표정이었다.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친구들과, 선생님과, 심지어는 슈퍼마켓의 아주머니조차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내뱉는 말들은 나의 것들이 아니었다. 무미건조한 말들밖에 할 수 없었다. 그것은 형형색색의 말보다는 거절당할 가능성이 좀 더 낮았다.     


 시간이 지나자 나는 말을 잃었다. 나의 부모는 큰누나가 그렇게 되고 집이 기울게 된 것을 밖에 나가서 절대 말하지 말라고 일렀다. 은폐하고 감추는 것은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에 대응하는 우리 부모의 방식이었다. 이 사실들이 알려지게 되면 사람들은 너를 이상하게 볼 것이며 부모를 욕보이는 일이라고 했다. 나도 그것에 동의했다. 집과 가족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가게되면 입을 꾹 다물거나 말조심을 하거나 화제를 돌리기 위해 무던 애썼다. 내가 겪고 있는 말도 안되는 일들에 대한 토로가 토악질처럼 목구멍까지 차올라도 꾹 삼켰다. 그러는 와중에 수치심을 정확히 이해했다. 그것은 들킬 것이 많다는 것이다. 조심하지 않으면 들키고 만다. 내 모든 것을.     


 이제 나는 들키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가난을, 서로 욕을 하며 싸우는 나의 부모를,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가보면 놓여있는 큰누나의 유서를, 구석에 멍하니 앉아 있는 나의 큰누나를, 하루종일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작고 낡은 아파트에서 썩어가고 있는 나의 큰누나를, 그 옆에서 저녁을 챙겨 먹는 나를, 혼자서 케찹에 비벼먹는 밥을, 하염없이 긁어 대 피와 진물이 흐르는 나의 피부를, 말수가 없고 언제나 주눅이 들어있는 만만한 나를, 나의 사춘기를, 들키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수치심을 가꾸었다. 그 때 고작 14살이었다.    

 

 그 아이는 속내를 알 수 없는 어른이 되었다. 본인도 그 속내를 모른다고 한다. 들키지 않기 위한 노력으로, 자신도 자신에게 들키지 않는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작가의 이전글 #16 면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