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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타 Apr 18. 2017

당신은 언제까지 강자일 수 있을까?

내 안의 약자성 인정하기

"모두가 평등해야 된다는 사실은 동의하지만 페미니즘은 아닌 것 같아"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말이다. 그리고 이런 말은 주로 특정한 성별의 여러 명과 이야기할 때에 많이 들을 수 있다. 그들은 지나치게 편향된 여성주의를 비판하며 페미니즘보다는 평등을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경험은 다르다. 그들은 내가 왜 페미니즘이라는 이념에 동의하고 그것에 이르렀는지의 감정을 존중해준다. 그렇다면 나에게 질문을 던진 사람들은 왜 평등하기를 원하지만 페미니즘에는 동의하지 못할까?


페미니즘의 정의를 다시 생각해 보자. 한국여성단체연합은 페미니즘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계급, 인종, 종족, 능력, 성적 지향, 지리적 위치, 국적 혹은 다른 형태의 사회적 배제와 더불어, 생물학적 성과 사회문화적 성별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형태의 차별을 없애기 위한 다양한 이론과 정치적 의제들


나에게 페미니즘을 알고 난 뒤의 세계와 그 전의 세계는 완전히 다른 세계다. 그리고 페미니즘에 이르기까지 질문하는 일은 너무나도 쉽지만 어려웠다. 그 질문은 나의 가족,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기분을 존중하고 이해하려는 일에서 시작되었다.


"너는 편의점에 무언가를 사러 가다가 성폭행을 당하거나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라도 있어?"


한국 사회의 남성으로 자라온 나에게 이 질문은 도무지 납득하기 힘들었다. 보통 이 질문의 주체는 여성이고 답변하는 사람이 남성이 된다. 그리고 너무나도 당연하게 들리는 "아니 없어. 나는 남자니까" 혹은 "그럴 확률은 굉장히 낮은데, 너 나갔다 오기 싫어서 그러는 거야?" 혹은 더 나아가서 "왜 모든 남자가 잠재적 성폭행범이라고 생각해? 난 그렇지 않아."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타자화(너와 나는 다른 사람이다!)는 너는 여성이고 나는 남성이니까 하는 무의식적인 전제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현재 상황에 대한 회피 혹은 성별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여 되려 반박한다. 나는 이 질문을 처음 받았을 때는 분명히 위와 같은 대답을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강남역 사건 이후로는 저 질문의 무게는 지구를 절반으로 나눈 무게처럼 무거웠다. 왜냐하면 나는 질문을 한 사람과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저 질문 속에 들어있는 감정. 공포, 두려움, 분노, 불안함은 남성이라는 기득권을 가진 나에게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내가 저 질문을 다시 들었을 때의 울림이 달랐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내가 내 안의 약자성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강자가 되고 싶어 한다. 그 마음은 상황을 가리지 않는다. 신체적인 조건, 그러니까 키나 외모에서 남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고 싶어 한다. 경제적인 부분도 쉽다. 농담처럼 하는 "내 꿈은 건물주"라는 말. 나는 돈을 많이 벌 것이라는 다짐. 보이지 않는 누군가보다 높은 대학에 가고 싶어 한다. 왜일까. 이것은 강자가 되면 약자보다 강한 지위,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전제가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내가 약자라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강자가 되지 못한 낮은 위치에 있는 불안정한 감정이 든다. 흥미로운 사실은 강자성에 대한 추종은 나이가 어리고 많다고 해서 다르게 작동하지 않는다. 오히려 연령주의 사회인 대한민국에서 '나이가 많음' 또한 우월한 지위를 가지기 때문에 우리는 점점 더 우리 안의 약자성을 인정할 기회를 잃어간다. 나는 당신에게 질문하고 싶다.


당신은 언제까지 강자일 수 있을까?


나에게 내 안의 약자성을 철저히 인정할 수 있는 기회는 아이러니하게도 남자라는 성별이 대한민국 사회에서 1등 시민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관문인 '군생활' 이었다. 내가 바꿀 수 없는 2년이라는 기간 동안 누구보다 낮은 위치에서 약자의 공포를 체험해야 했던 나는 생각했다. 내가 느끼는 이런 공포는 군대를 비롯한 사회적인 구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시간이 지나 계급이 올라 내가 강자가 되어서 나의 억눌린 감정을 강자성을 통해 표출하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내가 가진 권한과 강자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약자들에게 다시 분배하려고 노력했다. 군생활로 치면 낮은 계급의 병사에게 더욱 많은 권한과 자유를 주는 일이다. 그런 시간이 지나고 난 뒤 성별에 대한 질문은 나에게 다르게 들렸다. 강자들의 강자성을 인정하지 않는 너무나도 무서운 말들. 상대방의 감정을 무시하고 맥락을 잃은 표현들. 나도 모르게 그런 말들을 내뱉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나는 내가 언제든 약자가 될 수 있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내가 약자가 되었을 때 피어오르는 공포, 두려움, 분노, 불안함은 나를 고통스럽게 한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다. 이때부터 나의 말하는 방법도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상대방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일이 얼마만큼이나 이기적인 말하기라는 것 또한 깨달았다. 상대방이 감정을 그대로 내뱉고 내가 그 호흡을 같이하는 일은 내가 상대방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해결해주는 일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을.


당신은 언제든지 약자가 될 수 있다.


내 안의 약자성을 인정하는 일은 고통스럽다. 불안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덮어놓아 그것이 강자가 되면 해결될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은 틀렸다. 불안함을 해소하는 것은 내 안의 약자성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한다. 나는 내 주변 사람과 우리 사회가 모두 약자의 마음에 공감하고 배려할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원한다. 이런 사회가 된다면 경제적인 불합리함은 너무나도 쉽게 해결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것이 당신들이 말하는 "모두가 평등해야 한다는 사실"과 같을 것이다. 당신들이 전제한 평등은, 지금 남성이 강자이고 여성이 약자인 구조를 전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평등이다. 허구한 날 OO녀 라는 신문기사, 섹시함과 귀여움을 강요당하는 여자아이돌, 몰카 범죄의 피해자 대부분이 여성이라는 사실, 출산과 출산 이후 경력단절은 오로지 여성의 책임인 사회. 당신은 정말로 남성이라는 성이 강자라고 인정하지 않는가? 


앞서 말한 페미니즘의 정의를 다시 생각해 보자. 강자가 강자임을 인정하고 내가 언제든지 약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 남성이 더욱 공감하고 배려해야 하는 일은 당연하다. 단순히 공감하고 배려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성별로 인한 차별이 없는 평등한 사회를 위해 실천해야 한다. 당연하게도 우리는 이렇게 약자성을 인정하는 관점을 여성주의라고 부른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은 계속해서 약자였으며 여성들은 자신의 약자성을 인정하고 모든 일에 접근하기 때문이다. 여성주의의 '여성'은 여성이 당신보다 우월해서 여성주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여성이 '약자'이기 때문에 여성주의의 관점을 가지자고 주장하는 것이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이 없고 어쩌면 강제적으로 행동해야 하는 상황, 목숨의 위협을 받는 현실의 주인공이 나라고 인정하는 일은 너무나도 힘들다. 내 자신이 창피하다고 느낄 수도, 그냥 슬플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구조적인 문제라는 것을 아주 쉽게 잊고 그저 나 개인적인 부족함 혹은 상대방(강자)의 부당함을 탓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 일이 어려운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나는 당신에게 이런 감정적 고통스러움을 부탁한다. 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없는 평등한 세상을 위해서.


당신의 약자성을 인정해 주세요.
부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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