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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타 Feb 10. 2018

Orange Is the New black

Season 1


이 글은 Netflix Origianl "Orange Is the New black"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으니, 내용을 알고 싶지 않으신 분은 글을 읽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갑자기 무언가 봐야겠다라는 마음이 내 안에서 솟아올랐고 넷플릭스에 덜컥 가입했다. 친구가 추천했던 Orange ~~가 떠올랐고 딱히 고민하지 않고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신 차려보니 에피소드 1이 끝났고 1이 끝난지도 모른 채, 시즌2 첫화를 보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말았다.


군대 생각이 났다

시즌 1의 리치필드 교도소는 정말로 내 군생활을 떠올리게 했다. 그 경험이 자랑스럽지도 않지만, 너무나 흡사해서 적어본다. 나의 의지가 그리 포함되지 않은 2년간의 무급에 가까운 노동은 정말 감옥 같았고 갖힌 공간에서 벌어지는 온갖 일들이 너무나도 똑같아서 깜짝깜짝 놀랄 정도였다. 그리고 재소자들이 감옥 밖의 사람들에게 받는 취급과 그들이 사회와 느끼는 단절은 말보다 먼저 가슴을 먼저 찔러왔다. 가장 고통스러웠던 장면은 역시 감옥 밖의 남자친구 '래리'와의 관계가 끝이 없는 우연으로 망가져가는 일이다. 제 시간에 전화를 걸거나 받지 못하는 일. 감옥에서 벌어지는 온갖 말도 안되는 일들과 감옥만의 룰, 전혀 다른 세상에 사는 듯한 사건들에 채프먼(교도소식 이름으로 하자)은 감옥 밖의 래리에게 감정적 도움을 호소하지만 래리는 그저 웃어 넘긴다. 밖에서 그렇게 서로 사랑했던 둘이, 서로에게 공감할 수 없는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의 그 사이의 커다란 벽. 슬프게도 나는 갖힌 채프먼 쪽에 공감했고 그녀가 말로 래리에게 불평하지 않았지만 넘을 수 없는 '벽'을 만난 그 표정을 느꼈을 때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다.


정의란 무엇인가?

시작하자 마자 작가는 가슴에 질문을 팍팍 꽂는다. 주인공이 감옥에 간 이유를 처음부터 상세히 설명하지 않고 그냥 감옥에 넣는데 의도적인 것 같다. 그리고 감옥의 처참한 일상을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그리고 시간만 나면 각각의 인물들의 과거를 병렬적으로 늘어놓으면서 그 사람이 감옥에 오게 된 이유를 설명한다. 그리고 그 이유들은 정말 하나같이 "bullshit"이다. 이 드라마는 대사를 통해서 "난 정말 별 것도 아닌 일로 여기 왔어" 라고 설명하기도 하지만 얼마나 별 거 아닌 일인지 개인의 서사를 통해서 설명한다. 처음에 감옥의 문화와 지나치게 성격이 거칠다고 생각하는 인물들은 사실은 모두 각자의 이야기가 있다. 각자의 이야기를 알고 난 뒤에는 주인공 '채프먼' 입장에서 '공격'으로 느껴지던 인물들의 행동들이 반대로 상처받은 이들의 몸부림으로 바뀌어 보였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정말로 잘못한 사람이 없다. 그리고 이 프로그램은 약자, 그 중에서도 여성들이 얼마나 끔찍한 현실에 처해 있는지 보여준다. 남자인 친구와 같이 도둑질을 하다가 혼자 걸리고 남자인 친구가 도망가는 장면, 낙태를 6번째 하는 자신에게 농담을 하는 간호사를 총으로 쏜 펜사터키, 아 고통스러워서 더이상 상상할 수가 없다. 그리고 '멘데스'라는 교도관을 통해 보여주는 끔찍한 성추행과 성폭행은 계속해서 이 사회에서 없어지지 않는 강간문화를 정확히 그려낸다. 나는 '재현자의 윤리'에 관심이 많아서 썩 좋은 연출이라고 느껴지지 않았지만 결국 그가 반복해서 내뱉는 '남자다움'의 지독한 공허함을 그려냄으로써 오히려 그의 남성성을 조소하는 일을 해낸다. 


결국에 나와 타인은 다른 존재다. 온전히 다름을 인정해야지만 같아질 수 있다.

채프먼은 계속해서 "남들은 나와 같은 거야"라고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렇지만 그 가정은 너무나도 쉽게 허물어진다. 그녀가 '당연하게' 여긴 것들은 타인에게 하나도 당연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나쁘지 않은 선택을 하는 듯한 주인공을 교도소의 친구들은 아주 질색한다. 그리고 후반으로 갈 수록 그녀의 타인과의 관계는 계속해서 허물어져 가는데, 마치 그녀의 행동은 하나의 악의도 없어 보인다. 사실은 그게 가장 끔찍한 점이다. 그녀는 계속해서 '잘못을 해결'하려는 방법으로 무언가에 접근하지만 그녀가 정말로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지는 잘 모르겠다. 어떤 면에서는 그녀에게 연민도 생기지만 계속된 그녀의 느긋함은 보는 나조차 질리게 만들었다. 한 마디, 한번 더 생각할 수 있는 상황에서 그녀는 너무나도 쉽게 자신이 편한 쪽을 선택한다. 그녀의 '순수함'은 그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작동하는 것은 너무나도 명백했다. 그녀는 계속해서 남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그런 그녀에게 동료들은 충고한다. "해결할 수 없는 일도 있는 법이야", "그냥 받아들여". 나에게 이 말들이 교도소 생활한 사람의 조언이라기보다는 채프먼에게 '다름에 예민해지라'는 채찍으로 들렸다.


페미니즘 단어 한 번도 안 썼는데 페미니즘 드라마

드라마가 감옥에 오게 된 개인들의 배경과 감옥에서의 사건들을 한 올 한 올 기워넣는 장면은 소름이 돋았다. 여성들이 겪는 온갖 차별과 억압, 범죄의 위협을 한꺼번에 압축해서 교도소로 보내버렸다. 나는 계속해서 이런 느낌이 들었다. 정말 잘못한 사람은 누구일까? 감옥에 갖힌 이 여성들? 이 여성들을 범죄로 내몬 이들은 대체 누구인가? 덤으로 성소수자, 트렌스젠더에 대한 혐오도 (지나치게..??) 사실적으로 그려내는데 이 혐오를 그대로 보는 일은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어느 지점에서는 사실 작가가 시청률을 위해 소수자성을 의도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일까? 싶을 정도로 심했다. 교도소의 '거친 언행'으로 포장한 자극적인 말들은 쉬이 넘어가기 힘든 혐오의 용어였고 아이러니라는 것은 결국 무언가 때문에 교도소에 오게 된 모든 '소수자'들이 모두 '소수자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시즌 후반부에는 이것을 극복하려는 시도도 한다. 그렇지만 실패하지.


울었던 장면은 테이스티가 다시 '오렌지'색 옷을 입고 감옥으로 돌아온 장면이다. 왜 다시 왔냐고 남들은 힘들어 죽는데 별것도 아닌 일로 돌아오냐고 테이스티를 찰싹 때리는 친구에게 "아무도 날 재워주지 않고 일자리도 없고 이게 뭐하는 건가 싶어. 최소한 여긴 밥과 네가 있잖아?"라고 반문한다. 그 누가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까?


이 영화에서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일들이
'당연하지 않은' 세상이 되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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