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감정은 어디에서 오는가
하루 하루 뉴스 보기가 두렵다. 피해자들의 인터뷰가 있다고 그러면 이제 영상은 볼 자신이 없다. 피해자가 겪어 낸 지옥을 상상하는 것 만으로도 눈물이 난다. 쉬이 다시 칠해지지 않는 내 안의 '남성'의 기억들은 더더욱 나를 괴롭힌다. 그리고 가족이든, 내가 속한 조직이든 여전히 '남성'이라는 성별로 존재하는 나의 정체성은 내가 지금의 구조를 만든 가해자인가? 하는 계속된 물음을 부른다. 아버지 뻘 되는 남성들과의 관계맺기는 보통은 쉽게 '남성연대'를 형성하는 식으로 발생한다. 이제 그 나이 이상의 남성을 보는 일도 두렵다. 그들이 투표한 나라, 그들이 만든 나라, 그들이 그렇게 지키고자 했던 자신들의 세계가 이렇게 추악하다는 사실은 그들은 인정할 수 있을까.
이런 고통의 절정은 안희정의 위력에 의한 성폭행이 폭로되었을 때였다. 나는 안희정을 싫어한다. 그의 '표를 의식한' 듯한 성소수자 지지 표현들과 진보진영이라는 이름 아래서 명백한 수구의 언어를 구사하는 발언들을 지난 민주당 경선 때 듣고 뜨악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윤택의 때만 하더라도 끝까지 발뺌하는 가해자들의 그 뻔뻔함 때문일 것이라고 연극계의 '뿌리깊은 부정' 때문일 것이야 하면서 실제로 존재하는 문제를 마주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안희정은 달랐다. 뉴스를 접하고 머리가 멍하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차기 대선' 주자로까지(동의하지 않는다) 삼기도 할 만큼 지난 민주당 경선 때 많은 지지를 이루어냈던 사람. 성소수자를 지지하고 페미니즘 책을 읽는다는 사람. 대한민국의 한 도의 도지사를 맡고 있는 사람. 과거 노무현 정부 때부터 '젊은' 이미지를 유지하며 정치인으로 활동하는 사람. 이런 사람의 성폭행과 그가 남긴 메시지의 내용은 충격을 넘어서 분노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는 정확히 나의 아버지의 나잇대다.
폭로 다음 날은 일에 집중할 수도, 내가 무엇을 해야 할 지조차 몰랐다. 박근혜 때와 같달까. '엄청 부패했겠지', '권력 가지니까 마음대로 하네' 투덜대면서도 실제로 박근혜의 수많은 끔찍한 일들이 정말로 사실로 드러나 모든 이들의 입에 오르내릴 때 충격은 아직도 생생하다. 지금도 그렇다. '뭐 중년 남성들의 젠더 감수성은 말 다했지', '어떻게 미투 운동에 저런 식으로 이야기하나' 라고 이야기하면서도 그들과의 연대를 단칼에 거절하지 못했다. 가끔은 자식의 정체성으로, 사회 초년생의 정체성으로 그들이 권력을 가졌다고 믿고(실제로도 그렇지만) 그들을 존중하려고 했던 내 모습이 수없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이제는 단언하고 말할 수 있다. 당신들을 틀렸다. 당신들은 지금의 끔찍한 구조를 만든 '방관자' 혹은 '가해자'의 일부에 불과하다. 피해자들은 수없이 외쳐 왔지만 그 누구도 그것을 제대로 듣고 구조를 개선하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방관자들이 만든 이 세상이 너무 싫다. 나는 반성하지 않는 가해자들과 연대하지 않을 것이다. 남성우월주의, 가부장제 구조의 일부가 되지 않으려고 발버둥칠 것이다. 내가 살고 싶은 세상은 대단히 5G 인터넷이 빠른 세상도 아니고 몇십 층짜리 거대한 아파트로 가득찬 세상도 아니다. 나는 이런 끔찍한 뉴스가 들리지 않는 세상을 원한다. 차별과 혐오가 없는 세상을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