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코로나가 잠잠해지고 유럽 여러 나라의 입국 제한 조치가 풀리자마자 여행을 계획하고 바로 항공권을 예약하였다. 무계획의 배낭여행으로 지중해 북부 연안을 다녀 보려고 파리 드골공항에서 마르세유행 기차를 탔다. 공항 기차역에서 좌석 예약을 할 때는 아무런 말이 없었는데 플랫폼에 들어온 기차의 표지판에는 마르세유 대신 리옹으로 되어 있다. 차장에게 마르세유행 기차가 맞는지 물으니 이 차는 선로 사정으로 오늘만 중간지점인 리옹까지만 간다고 한다. 여행 첫째 날 첫 번째 호텔 예약부터 어그러졌다. 기차 안에서 급히 스마트폰으로 리옹의 호텔을 예약하고 밤늦은 시간에 구글 지도를 따라 리옹의 호텔에 도착하니 비즈니스 호텔이라 프런트 직원은 없고 경비원만 입구를 지키고 있다. 당연히 영어는 안 통했다. 35일간의 도시 여행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마르세유에서 지중해를 따라 서쪽으로 프랑스 남부, 스페인, 포르투갈, 다시 스페인 그리고 프랑스로, 가는 곳을 정하면 기차를 예약하고 숙소를 예약하며 이동했다. 혼자 다니는 여행은 시작에서부터 귀국 비행기를 탈 때까지 예측불허의 일이 수시로 벌어진다. 생각지도 못한 일들을 그때그때 해결하면서 다니는 여행의 맛은 짜릿하다.
이번 여행은 골목길을 걸어 다니며 도시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여행이다. 골목길이나 한적한 거리를 걸으면서 그 도시의 분위기를 음미하는 행위를 플라너 flâneur 라고 한다. 프랑스어 사전에는 플라너를 빈둥거리는 사람 또는 한가롭게 거닐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되어있지만 시인 보들레르는 거리를 배회하는 행위라는 표현으로 사용하였다. 도시의 문화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려면 도시의 골목길을 천천히 걸어 보는 것이 좋다. 골목길은 도시의 내면을 보여주는 곳으로 그곳 사람들의 생활공간이자 많은 물건들이 불규칙하게 놓여 있고 심지어 개와 고양이들까지 함께 살아가고 있다. 골목은 도시민들의 삶의 터전이긴 하지만 방문객들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골목의 카페와 음식점, 빵집과 과일가게에서 주민들과 이방인들의 다양한 모습과 표정을 만날 수 있다. 골목길에는 계단도 있고 작은 광장도 있으며 도시의 문화와 역사를 읽을 수 있는 조각상이나 설치물도 있다. 골목은 저마다 나름의 모습을 지닌다. 현재의 모습은 물론 과거를 유추할 수 있는 것들을 품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골목에서 그 도시의 문화를 만나고 역사를 만난다. 나는 오래된 유럽 도시의 골목길을 이방인으로 다가갔다. 도시의 역사를 품은 낡은 골목길은 도시를 살아온 사람들의 시간과 공간이 뒤섞여 있고 나와 같은 이방인들이 수시로 들락거리며 도시의 문화를 이루어 내는 곳이며 내가 이번 여행을 통해 만나 보고자 하는 곳이다.
이 책은 남프랑스와 스페인, 포르투갈 여러 도시의 골목길을 매일 3만 보 가까이 걸으며 얻은 느낌과 사진으로 엮었다. 내가 관심을 가지고 시선을 고정해서 담은 사진 중 일부로는 개인전을 준비하였다. 이 책은 여행기와 개인전의 사진집 역할을 겸할 수 있도록 편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