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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마루 Mar 20. 2023

정신과 진료실에서 전하는 이야기

58. 가족이 아픈 이들에게: 생각보다 느리게 가야 할 수도 있습니다.

  마음이 아프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지 상상해 보신 적 있으신가요?


  남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넘기는 사소한 자극들이 하나하나 신경 쓰여서 옴짝달싹 못한다면 어떨 것 같으세요? 시도 때도 없이'널 죽여버릴 거야' '쓰레기 같은 놈'과 같은 소리가 들린다면 어떤 느낌일까요? 나만 쫓아다니고 미행하는 사람이 있으면서 나를 해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는 것 같다면요? 아무리 노력해도 기분이 롤러코스터를 타고 때로는 구름 위를 떠다니는 것 같다가 때로는 지하 30층에 내려가 있는 것 같다면요? 아무리 잊으려 해도 같은 기억이 반복해서 떠오르고 생생한 꿈에 시달려서 모두가 잠든 새벽 2시에 섬찟 놀라 잠에서 깬다면요? 갑자기 심장이 터질 것 같고 숨이 멎을 것 같고 죽을 것 같은 공포가 찾아온다면요? 아무리 유혹에 빠지지 않으려 해도 자꾸 나의 생각을 사로잡으면서 하면 안 되는 일을 부추기는 참기 어려운 욕구가 있다면요? 


  그리고 이런 느낌이 아주 오랜 기간 내 삶을 따라다닌다면요?


  글을 쓰면서 제 마음도 함께 답답해집니다. 이런 느낌을 경험한다면, 우리는 그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평소의 두 배, 세 배, 아니 열 배 이상의 에너지가 필요할 것입니다. 남들이 심호흡 한 번 할 때 다섯 번을 해야 할 것이고, 새로운 곳에 갈 때면 더 주저하게 되며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고 신경이 곤두서서 무엇을 할 때도 노력이 많이 필요할 거예요.


  대개 급성기 증상이 지나가면 겉으로 보이는 어려움은 많이 줄어듭니다. 3개월, 6개월, 1년이 지나면 훨씬 편안해 보일 수도 있어요. 실제로 회복기를 잘 거쳐가면 마음의 근육은 훨씬 단단해지지만, 이러한 경험의 기억이 쉬이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언어의 기억이 아니어도 몸의 기억으로 남기도 합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움찔'하게 되지요. 특히 소위 '만성 정신 질환'의 경우, 겉으로 드러나는 증상은 많이 줄어도 내면의 혼란스러움이 완전히 소실되지는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훨씬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 용기가 필요합니다. 


  가족은 때로 답답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시간이 지났는데 아직도 그런가 싶을 것입니다. 의지가 박약하다, 게으르다는 생각이 들어 재촉하고 싶어 집니다. '너무 다 받아줬나?' 후회가 들 수도 있습니다. 만약 가족 여러분이 당사자가 스스로의 책임을 대신 져준 것이 아니라면 그런 후회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각자 삶의 속도가 다릅니다. 당사자가 당사자의 속도로 삶을 스스로 살아가기에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과 여유가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특히 아프기 전에 성취가 높고 기대가 컸던 경우일수록 이 부분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생각보다 느립니다. 하지만 제대로 가고 있다면 반드시 해낼 수 있습니다. 가족에게 필요한 것은 그것을 믿는 용기입니다. 지금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지 헷갈릴 때가 있을 것입니다. 반드시 주치의나 전문가와 상의해 보세요. 한 사람의 생각보다는 두 사람, 세 사람의 의견이 모였을 때 훨씬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생각보다 매우 느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걸음이 느리다고 목적지에 못 가는 것은 아닙니다. 걸음이 느리면 땅을 더 꼭꼭 밟아가며 많은 것을 보고 느끼며 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성입니다. 올바른 방향으로 가기 위해 우리의 속도를 조금 낮춰야 할 때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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