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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마루 Mar 28. 2023

정신과 진료실에서 전하는 이야기

65. 생각보다 많은 것이 타고납니다

  타고난다는 것, 누군가에게는 그리 기분 좋은 말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넌 네 아빠(엄마)의 나쁜 점만 물려받았니.'

  '시가(처가)에 비슷한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있어요.'

  '저이 아버지가 그렇게 술을 마시다가 돌아가셨어요.'

  '난 이렇게 타고나서 어쩔 수 없어.'


  이런 말을 들어서 기분 좋을 리가 없으니까요. 그럼에도 타고난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유는 우리가 무엇을 타고났는지를 알아야 대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들을 보면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부모의 잠버릇을 닮거나 부모의 습관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모가 그 습관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서 훨씬 주의했더라도 말입니다). 저희 아이는 돌이 되기 전부터 발톱이 조금만 자라 살에 닿기만 해도 손으로 뜯어댔어요. 손톱은 별로 건드리지 않는데 말이에요. 제 남편이 아주 똑같은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편이 소위 말해 '가스래기'를 잠시도 가만두지 못하는 성격이거든요. 저는 아이가 정서적으로 불안정한가 싶어서 걱정이 되었는데, 세돌이 가까워지도록 그럴만한 다른 징후가 없는 것을 보니 아마도 태생인 것 같습니다. 뭐가 묻으면 바로바로 닦아달라고 하는 것도 비슷한 것 같고요.


  한편 저는 '일을 사서 하는 스타일'입니다. 정신과 수련을 하며 '내가 인정욕구가 많아서 일을 사서 하고 인정을 받고 싶은가 보다' 싶었습니다. 가끔은 이런 제가 너무 힘들어서 '아무리 오래 치료해도 마음의 병(과도한 인정욕구)이 낫지 않는다'며 자조적으로 스스로를 놀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친정어머니가 '나는 아무리 힘들어도 일단 집 청소를 다 해놓고 깨끗해져야 마음이 편해져'라고 하시는 말씀을 듣고 무릎을 탁 쳤습니다. 그러고 보니 생전에 제 외할머니도 남편을 일찍 잃고도 엉덩이가 바닥에 닿을 새 없이 항상 부지런히 일하셔서 일찌감치 허리가 구부러지셨습니다. 그제야 '이게 뭔지는 몰라도 유전되는 성질인가 보다' 하고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날 이후, 낯선 일에 도전해야 할 때마다 '또 일을 벌여서 스스로를 괴롭히는구나'라는 생각보다 '나의 유전자가 새로운 도전으로 나를 이끌었구나'라고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진료실에서도 이런 이야기를 정말 많이 듣습니다. '나는 정말 우리 엄마(아빠)처럼 살고 싶지 않은데' '그 굴레를 벗어나고 싶은데' 잘 안 돼서 스스로를 미워하는 분이 많습니다. 제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결함이나 해결되지 않은 내적 갈등 때문이라고 자학하기도 하고, 그런 환경을 물려준 부모를 원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자학도, 원망도 해결은 아닙니다.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물려받습니다. 그것을 비난하지 않고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비로소 다음에 어떻게 할지 결정할 수 있게 됩니다.


  타고난 성질이 매우 마음에 들지 않거나 반드시 고치고 싶더라도,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내가 그런 부분이 있다'는 것을 비난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고쳐서 변하더라도 가끔 우리의 마음이 괴롭거나 조바심이 날 때는 오래된 습성이 치고 올라올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타고남을 부인하는 대신 '그랬구나' 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가끔 원치 않는 실수를 반복하더라도 '으아, 난 틀렸어'라고 자학하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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