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다시, 운동화 끈을 바짝 매고.
복직 전 마지막 달, 어린이집 3개월 차이던 둘째가 많이 아팠다. 그전 달에는 수족구로 고생하고, 이번 달에는 돌발진이었다. 열이 가라앉자 짜증이 급격히 늘었고, 항생제를 두 번이 바꿔야 할 정도로 오래가는 중이염까지 왔다. 기관엔 보내지 못하고 집에서 둘째를 케어하면서 복직의 시계는 째깍째깍 흐르고 있었다.
’이 녀석, 엄마가 회사에 가는 걸 아나?‘
덕분에 둘째와 보내는 시간이 길어졌다. 아이를 사랑하는 것과 기관에 보내는 것은 다르다.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어떤 기관에 보낼지 고심하는 것이지, 아이를 사랑하지 않아서 기관에 보내는 것이 아니다.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을 더 귀하게 쓰기 위해, 잠시 떨어져 있는 것이다. 둘째는 엄마와 더 있고 싶은 것 같았다.
내심 조금 일찍 복직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아이들이 기관에 잘 적응하고 낮에 여유로운 시간이 생기니 어딘지 빈 느낌이었다. 시간이 빈 것은 아니었다. 아이들이 없으면 크고 작은 집안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에 더해 이제 회사로 돌아가고 나면 다시는 손대지 못할 것 같은 창고와 책장과 옷장들을 하나씩 정리하고 있었다. 요가 수업에 가고 책을 읽었다. 하지만 어딘지 마음이 비어있었고, 이제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일을 하고 싶은, 아니, 일을 해도 마음이 편하겠다는 생각은 두 아이가 함께 놀 때 많이 들었다. 첫째는 유치원에서 돌아오면, 오늘 동생은 뭘 했는지 꼭 묻고 동생과 놀고 싶어 했다. 물론 ‘엄마와 놀고 싶어요’는 빠지지 않는 단골멘트지만, ‘00야 놀자~‘라는 말도 제법 나왔다. 갓 돌이 된, 걷지도, 알아듣지도 못하는 동생임에도 말이다. 그렇게 둘이 놀게 두고 식사 준비도 하고, 잠깐 앉아서 커피도 마셨으며, 신문도 봤다. 언제든 상황에서 빠져나올 수 있어야 하므로 책을 읽거나 본격적으로 운동을 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게 한숨 돌릴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것이 소중했다.
‘이제 회사에 돌아가도 되겠네.’
빈 시간을 채울 준비가 된 것 같았다. 정확히는 빈 시간이 아니라 빈 마음이다. 잊고 살았던 나의 일부를 찾으러 갈 시간.
사람은 누구나 단 한 가지의 모습으로만 살지 않는다. 관계 속에서 누군가의 딸 혹은 아들이며, 누군가의 배우자이며, 누군가의 부모이며, 누군가의 친구이며, 누군가의 이웃이며, 누군가의 동료이며,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일원이고, 우주의 일부이다. 엄마로 사는 일은 가슴이 벅차고 만족스러우며 큰 기쁨을 주지만, 너무 그것에만 집중되어 있으면 부러지기 쉽다. 하나의 단단한 실로 매달아 둔 것보다, 여러 개의 얇은 실로 매달아 둔 것이 더 유연하게 살아남을 수 있다. 여러 역할을 하는 것은 때로는 벅차고 힘들지만, 그 역할들이 나의 나됨을 지탱한다. 너무 벅차게 무리할 필요도 없고, 모든 역할에서 완벽해야 한다고 고집 피울 필요도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엄마로서 완벽할 필요도 없는 것 같고, 직장에서 (물론 철저해야 하지만)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에 불필요하게 마음을 쓰느라 소진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벌써 복직하고도 세 번의 월급을 받았다. 그간 틈틈이 글을 쓰고 수정하고 올려왔는데, 마지막 글을 올린 이후 영 글 쓸 시간을 내지 못했다. 이미 육아휴직이 끝나버려서일까, 아직 하고 싶은 이야기는 남아있는 것 같은데 움직일 힘이 영 나지 않았다. 목차를 찬찬히 살펴보았더니, 두 번째 육아휴직을 한 사람으로서 꼭 하고 싶은 이야기는 거의 한 것 같았다. 이제 글을 보내줄 시간이 되었다.
부족함이 많은 글을 읽어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나의 부족함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견뎌내고 함께 지내는 시간을 웃고 즐거워 해준 남편과 아이들에게 감사하다. 글의 영감이 되어준 주변 사람들, 여러 상황에도 감사하다. 다시 직장에 돌아갈 수 있음에 감사하다. 아침에 출근하면 메시지 하나 제대로 보내지 못할 정도로 바쁜 나를 이해해 주는 남편과 부모님께 감사하다. 집에 오면 환한 얼굴로 뛰어와 안아주고, 놀다가 졸고 있는 나를 이해해 주는 아이들에게 감사하다. 나의 빈 공간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두 아이를 케어해 주시는 이모님께 감사하다 (심지어 첫째는 종종 ‘엄마‘와 ’ 이모’를 헷갈린다. 이 얼마나 기쁜 신호인가). 부족함이 많은 나를 이해해 주고 오히려 품어주시는 환자분들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이 모든 분 덕분에 일을 다시 하겠다고 용기 냈고, 다시 할 수 있어서 (얼마 지나지는 않았지만) 기쁘다.
이제 다시, 운동화 끈을 바짝 매고 달려갈 시간. 양손을 잡은 두 아이의 속도를 배려하고, 내 마음을 찬찬히 살펴가며, 함께 가는 모든 이들과 보조를 맞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