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_(가족들께) 언제 치료 이야기를 꺼내야 해야 할까요?
도박을 끊고자 하는 의지(意志)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는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 변화할 준비가 안 된 사람에게 '이건 병이니 치료를 받아야 한다'라고 다그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거부감과 반발심만 키울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타이밍은 반드시 찾아옵니다. 어떤 때일까요?
첫째, 그간의 일을 후회하고 있을 때입니다. 도박 빚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 되었을 때, 법적인 문제가 생겨서 혼자 힘으로 해결하기 어려울 때, 더 이상 돌려 막지 못하고 막다른 골목에 들어섰을 때입니다.
둘째, 심적으로 동요하고 있을 때입니다. 예를 들면 도박 문제가 있던 다른 사람에게 벌어진 위험한 상황이나 자살 시도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은 경우가 이에 해당될 수 있습니다. 또는 그간 잘 숨겨왔다고 생각한 채무가 딱 들키거나, 도박을 은폐하기 위해 해 왔던 거짓말이 드러났을 때도 그럴 수 있습니다.
셋째, 호기심을 보일 때입니다. "대체 거기(도박센터, 상담, 병원 등)는 왜 가는 거야?"라는 질문은, 비록 말투는 퉁명스러워도 도박 없는 삶에 대해 마음의 문이 아주 살짝 열린 신호입니다. 또는 집에 가져다 둔 브로셔를 읽은 흔적이 있거나 (대화를 통해 나타납니다), 책을 들춰보는 것도 이에 해당됩니다. 그럴 때는 주저하는 마음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도박을 하지 않고 사는 삶에 대한 궁금증이 들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지금이 바로 그 때라면, 뭐라고 말해야 할까요?
너 말 잘했다, 도박중독이 병이래, 그래서 병원에서 약도 먹고 치료도 받으면 좋아진대, 입원할 수도 있대, 그러니까 가자.
이렇게 말하면 당사자가 바로 "어 정말? 알았어. 가자"라고 따라올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 겨우 문틈으로 빛이 새어 들어오는 단계입니다. 이때 억지로 문을 열려고 달려들면, 상대는 겁을 먹고 문을 더 굳게 걸어 잠그게 됩니다.
그럴 때는 이렇게 이야기해 보세요.
당사자: "내가 대체 왜 그랬을까.. 아 짜증 나.."
가족1: "그게 바로 병이야. 그러니까 병원에 가자." (x)
가족2: "많이 속상했겠네. 마음이 복잡할 텐데, 내가 도와줄 일이 있을까?" (o)
당사자: "그 사람, 빚 못 갚아서 결국 죽었대. 에이 x...."
가족1: "거봐, 도박은 결국 죽는 병이라니까. 너는 언제까지 버틸래?" (x)
가족2: "저런.. 안타깝네.." (o)
당사자: "대체 도박센터는 왜 가는 거야?"
가족1: "그걸 아직도 몰라서 물어? 병인데 네가 치료받지 않으니까 나라도 다니는 거야." (x)
가족2: "응 거기 가면 마음이 편해져. 그리고 내가 어떻게 해야 할 지도 감이 오고." (o)
당사자: "나도 한 번 가볼까?"
가족1: "그래! 당장 예약할게!" (x)
가족 2: "오, 그렇게 생각해 줬다니 고맙네. 네가 원한다면 내가 같이 알아봐 줄 수도 있고, 아니면 네가 편한 시간에 직접 연락해 봐도 좋아. 어떻게 하고 싶어?" (o)
여지를 조금 남기고, 계속 궁금해하게 만들어주세요. 조바심을 내서는 절대 해결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이런 대화가 여러 번 번 더 쌓이고 나서야 비로소 "센터에 나도 가 볼까?"라는 말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그런 말이 나올 때 뭐라고 대답할지 미리 고민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의 대답에 어떻게 반응할지도 다양하게 상상해 보고, 그에 대한 답도 미리 마련해 두시기 바랍니다. 중요한 회의를 앞두고 회의에서 무엇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할지 미리 생각하는 것처럼, 당사자에게 하고 싶은 말도 평소에 미리 생각해두셔야 합니다.
"선생님은 가족 중에 도박자 없잖아요. 그 하루하루가 얼마나 피 말리는지 아세요?"
네, 저는 아직까지 가족 중에 도박자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고통에 공감하고자 노력하고는 있지만 저는 아직 겪어본 적이 없는 고통이 맞습니다. 하지만 중독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로 일하면서 확실하게 깨달은 것이 있다면, 중독 치료에서 가장 큰 적은 '조급함'이라는 것입니다. 중독은 정신질환 중에서도 재발이 매우 잦은 병입니다. 재발될 때마다 가족이 소진되어 나가떨어지는 일은 허다합니다. 하지만 재발이 잦다고 조바심 내며 '이번에는 반드시 뿌리 뽑겠다'며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어서 해결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시간을 내 편으로 삼고, 타이밍이 올 때까지 기다리며, 지금 해야 할 일을 해나가며 살아남을 때, 회복을 함께 맛볼 수 있었습니다. 그 하루하루를 살아남으려면 일단 내가 평온해야 합니다. 아무리 조바심을 내도 절대적으로 시간이 걸리는 일이 존재합니다. 내가 원하는 때 비를 내리게 할 수 없듯이, 내가 원하는 때 당사자의 '때'가 오도록 조작할 수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