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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마루 Feb 07. 2023

정신과 진료실에서 전하는 이야기

25. ‘도리’를 지키자고요?

  여러분의 삶에서 ‘이렇게 해야 해’라는 규칙은 몇 개나 있나요? ‘아침에 몇 시에 일어나야 해’ ‘식사는 이렇게 해야 해’ ‘직장에서는 이렇게 행동해야 해’ ‘부모로서 자식에게는 이렇게, 자식으로서 부모에게는 이렇게 대해야 해’와 같은 나름의 규칙은 모두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원칙과 규칙은 삶의 예측성을 높이고 위기를 대처하는 데 있어서 필요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사람으로서 지켜야 하는 원칙과 규칙을 ‘도리(道理)’라고 표현하는데요,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종종 이 규칙을 자기 자신과 남에게도 강요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살다 보면 여러 가지 일이 생기고 가끔은 그 도리를 지키지 못할 상황이 발생합니다. 예를 들어 갑자기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평소처럼 넉넉하게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상황이 된다면, 자신의 상황에 맞춰서 제사를 지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가장이 이 도리를 온 가족에게 강요하며 집안 살림에 어울리지 않는 제례를 지내려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형제가 갑자기 어려워져 우리 집에도 큰돈을 빌려달라고 하거나 곧 망할 것 같은 일에 보증을 서 달라고 한다면, 형제 된 도리로 무조건 그렇게 해줘야 할까요? 친구가 나쁜 일을 하자고 유혹하는데 친한 친구 된 도리로써 거절하지 못하고 함께 참여해야 할까요? 새벽에 일어나서 수행하는 나만의 루틴이 있는데 그날따라 가족 중 누가 너무 아파서 옆에서 계속 간호해야 한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어떤 상황에서도 무조건 도리와 루틴을 지켜야 할까요?


  저는 도리 때문에 많은 것을 잃게 된 가정과 개인을 진료실에서 많이 만납니다. 그 제사 때문에 온 가족의 관계가 엉망이 되고, 그렇게 서버린 보증 때문에 온 가족이 길바닥에 나앉을 처지가 되며, 친구의 권유를 거절하지 못해 같이 마약에 빠지고, 새벽 루틴을 지킨다고 가족의 위중한 상태를 지켜보지 못해 갈등이 생깁니다. 제가 ‘굳이 그렇게 했어야 하나요?’고 물어보면 ‘그게 도리니까요’라고 답변하시는 분이 너무 많았습니다. 이 말은 너무 많은 사람을 창살 없는 감옥에 가두고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특히 한국의 중장년 어른들에게는 이 도리가 족쇄와도 같을 때가 너무 많았습니다.


  도리를 무시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의 본질과 원칙을 지키고 때에 따라 유연하게 조율될 수도 있다는 유연함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제사를 지내는 것은 조상을 기리고 위하는 마음이 본질일 것이고, 형제가 어려워졌을 때 돕는 도리를 지킬 때 남을 도우면서 내가 망하는 것은 이치가 아닐 것이며, 나쁜 유혹을 거절하지 않는 것은 친구를 위하는 마음이 아닐 것입니다. 루틴을 지킨다고 주변의 욕구를 무시하는 것은 관계를 해치는 지름길일 것입니다.

  도리를 지키되 도리의 본질과 원칙을 잊지 마시고 경직된 도리 때문에 소중한 것을 잃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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