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진료실에서 전하는 이야기

26. 마음의 비상금 마련하기

  비상금은 ‘뜻밖의 긴급한 사태에 쓰기 위하여 마련해 둔 돈’입니다. ‘비상(非常)’이라는 단어 자체가 평소와 다르다는 뜻이지요. 평소와 다른 일은 평소에 항상 일어납니다. 언제 일어날지 모를 뿐, 항상 일어나고 있습니다. 갑자기 아프기도 하고, 갑자기 사고가 나기도 하며, 갑자기 스마트폰이 망가지거나 갑자기 예정되어 있던 이벤트가 취소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비상금은 항상 준비해야 합니다.

  비상금은 어떻게 마련하면 될까요? ‘비상사태’가 일어나기 전에 마련해야 됩니다. 그런데 언제 비상사태가 일어날지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평소에’ 준비하고 있어야 하고 가장 마지막까지 남겨둬야 합니다. 많은 재테크 책에서 돈을 모으기 시작할 때고 가장 먼저 ‘3개월치 생활비’를 비상금으로 비축해 두라고 합니다. 갑자기 아파서, 갑자기 사건이 터져서 일을 중단해야 할 때 조급함 때문에 위험한 일(예를 들면 말도 안 되는 이자의 불법 대부업체에게 돈을 빌리는 것 등)을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마음의 비상금은 왜 필요할까요? 비상사태가 되면 마음의 자원도 빠르게 고갈되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비상금은 ‘마음이 위기상황일 때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위험한 일(위험한 수준의 음주, 도박, 약물 사용, 충동적이고 후회가 남는 과소비,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기는 말, 위험한 성관계, 자살이나 자해와 같은 충동적이고 자칫 잘못하면 돌이킬 수 없는 행동 등)을 하지 않도록 돕는 위기 대처 행동입니다. 종잣돈과 다르게 구체적인 ‘행동’인 이유는, 위기상황이 닥치면 마음속에 생각할 공간이 쪼그라들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실행할 일종의 매뉴얼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종잣돈처럼 마음의 비상금도 평소에 연습이 필요합니다. 위기 상황에 자동으로 터지는 에어백처럼 자동으로 실행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행동의 대표적인 예로 심호흡 10번(또는 3번, 또는 단 한 번이라도), 믿을 만한 사람에게 전화하기, 따뜻한 커피나 차를 한 잔 마시기, 이어폰으로 노래 듣기 (외부 감각을 일시적으로 차단해 줍니다), 잠자기(잘 수만 있다면 잠은 최고의 비상금입니다), 달콤한 디저트 먹기, 평소에 좋아하는 장소에 가기, 격렬하게 달리기,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기, 자연경관이 좋은 곳에서 잠시 산책하기, 열정적으로 청소하거나 빨래하기와 같은 것이 있습니다. 특히 오감을 바로 만족시키는 일(커피, 디저트, 목욕, 노래와 같은 것)은 즉각적인 안정 효과를 줍니다. 심호흡은 마음의 속도를 느리게 하고 상황을 관찰할 여유를 만들어 줍니다.

  마음의 비상금 목록에 술, 마약, 도박은 없습니다. 약물에 취해버리면 오히려 판단력을 흐리기 때문입니다. 다만 병원에서 처방받은 비상약이 있다면 비상금처럼 쓸 수는 있습니다. 또한 마음의 비상금은 돈처럼 셀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양할수록 좋습니다. 왜냐하면 처한 상황에서 원하는 일을 바로 할 수 없을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비상금을 요긴하게 쓰면 일단 마음에 공간이 생기고, 그다음에 어떻게 할지 숙고할 여유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마음의 비상금은 무엇이 있습니까? 위의 목록은 정답이 아닙니다. 목록을 참고하셔서 당신의 비상금 목록을 최소 5가지 이상 만들고, 평소에 미리미리 준비해 보세요. 심호흡 연습을 하고, 전화 상대에게 평소에도 전화를 걸어 편안하게 해 두며, 좋아하는 찻집과 디저트 가게 목록을 정리해 두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