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루마루 Feb 09. 2023

정신과 진료실에서 전하는 이야기

27. 관점을 바꿔야 할 때

  진료실에서는 ‘이미 많은 시도를 해 본 사람’을 만납니다. 특히 어떤 습관의 변화에 대해서 자신이 해 볼 만한 일은 다 해봤다는 경우가 많습니다. 술만 마시면 필름이 끊기고 사고가 나는 분은 평소 주종이나 주량을 정해놓고 마시려 하거나, 함께 마시는 사람이나 장소를 제한하거나 (혼자서만 마시거나 반대로 가족과만 마시거나), 특정 상황에서만 마시거나 (예를 들어 여행이나 가족 행사와 같은 이벤트), 심지어는 더 이상 술을 사지 못하게 하기 위해 주머니를 비워놓고 마시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조절이 안 되고 사고가 반복되면 병원에 옵니다. 팔짱을 끼고 앉아 ‘내가 해 볼만한 건 다 해봤는데, 정말 아직도 해 볼 게 있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쩌면 그 속내는 ‘이제 어쩔 수 없어요, 이걸 나라는 사람의 한계로 여기고 살아야 되는 거 아니겠어요’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요, 그것을 인정해버리고 나면 스스로에게 ‘술을 적당히 마시지 못하는 무책임한 사람’이라는 낙인을 찍는 셈입니다. 자포자기하고 정신줄을 놓고 술을 마시고 다음날 후회하기를 반복합니다. 계속 자신을 미워하면서 ‘어쩔 수 없다’고 한탄하면서 말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술을 적당히 마시지 못하는 사람’과 ‘무책임한 사람’을 구분해야 합니다. 술을 책임감 있게 마시지 못한다면 무책임한 사람이 맞습니다. 하지만 술을 아예 마시지 않는다면요? 무책임한 사람이 될 이유가 없습니다. 이러한 관점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술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다고요? 맞습니다. 아마도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을 것입니다. 특히 독한 술이 값싸고 음주로 인한 실수에 너그러운 한국 문화의 특성상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행동이 항상 당신의 삶을 망가뜨리는 방향으로 작용하고 있다면, 문화적 배경이나 고정관념과 상관없이 그 행동을 이어갈 이유가 있을까요? 무책임한 음주만이 아닙니다. 폭식, 절제하지 못하는 쇼핑, 끝없는 SNS 몰두, 그리고 그 끝에 오는 자기혐오가 모두 이에 해당됩니다. 앞서의 사례는 ‘술을 조절하기 위해 거의 모든 시도를 해 본’ 사람이지만, ‘술을 마심으로써 벌어지는 사고를 막기 위해 모든 시도를 해 본’ 사람은 아닙니다. ‘필름이 끊기고 발생하는 사고’를 막기 위해, ‘자기혐오’를 막기 위해 어떤 행동을 ‘조절’할 게 아니라 아예 끊어야 할 때인 것입니다.


  술을 마셔야 할 만 가지 이유가 있더라도, 폭식과 SNS를 계속할 수밖에 없는 수백 만 가지 이유가 있더라도, 그 행동을 멈춰야 할 단 한 가지 이유가 명확하다면 우리의 관점을 바꿔야 할 때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정신과 진료실에서 전하는 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