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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마루 Mar 13. 2023

정신과 진료실에서 전하는 이야기

53. 한계 선택(marginal selection)


  경제학 용어 중 한계 효용(marginal utility)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소비자가 어떤 물건(재財)를 1 단위만큼 추가해서 사용했을 때 얻는 효용(만족도)이라는 뜻입니다. 이때 다른 물건의 소비는 동일하다는 가정이지요. 예를 들어 제가 커피가 너무 마시고 싶어서 커피숍만 있다면 한 잔에 만 원이라도 사서 마시겠다고 생각했다고 봅시다. 한 잔에 만 원인 커피숍을 만나 값을 지불하고 마시고 나니 두 번째 커피숍을 만났는데 여기는 7,000원인 거예요. 만 원이라면 사 먹지 않을 텐데 아까보다 싸네, 하면서 한 잔을 더 마십니다. 세 번째 커피숍을 만났는데 이번에도 같은 7,000원이라면 굳이 사지 않겠지요. 하지만 3000원에 판다면 한 잔을 더 마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저는 커피를 충분히 마셨습니다. 그러니 아주 저렴한 네 번째 커피숍을 만나도 더 이상 커피를 사서 마시지 않겠지요. '커피 마시면 2000원을 더 줄게'라고 해도 안 마실지도 모릅니다. 바로 이 개념이 '한계 효용'입니다.


  한계 효용의 핵심은 '앞선 소비와의 연결성'입니다. 즉 이전의 경험에 따라 우리는 특정 물건에 기꺼이 지불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비용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 개념을 보고 문득 떠오른 것이 '한계 선택(marginal selection)'입니다. 이런 용어가 실제로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생각하는 한계 선택이란 '사람이 선택을 내릴 때 온전히 자유 의지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 사람의 경험이라는 근거라는 한계 위에서 내려지는 선택'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에게 온전한 자유 의지라는 게 정말 존재할까'라는 생각에서 떠오른 개념이었습니다.


  정신과 진료실에서는 각종 폭력의 역사와 현장을 만나게 됩니다. 저는 '폭력은 절대로 용인할 수 없다'는 입장인데, 이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저도 어쩔 수 없어요'라는 답변을 자주 듣게 됩니다.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왜 어쩔 수 없다는 거지? 피하면 되잖아, 경찰에 신고하면 되잖아, 도움을 요청하고 집을 나오면 되잖아.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경우가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가해자가 내 생계를 책임지고 있거나, 집에 나뿐 아니라 아이들도 있어서 나만 어떻게 해서 될 일은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때로는 경찰에 신고한 적도 있지만 오히려 그 후폭풍으로 더 거센 폭력을 만나기도 합니다. 특히 안타까운 것은 어려서부터 상시 폭력에 노출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폭력에 대해 만성적인 무력감에 압도당하여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아무리 '집을 나와라, 경찰에 신고해라'라고 말을 해도 이들에게는 폭력에 대한 한계 선택이 정해져 있습니다.


  이런 경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한계 선택의 개념을 역이용해서, 아주 작은 새로운 경험을 통해 한계 선택의 범위를 넓혀볼 수 있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과거에 비추어해 볼 수 있는 아주 작은 시도를 함께 찾아 도전해 보도록 격려하거나, 반대로 아주 작은 안정감과 평온함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더 큰 안정감을 위해 기꺼이 도전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정도라면 내가 해볼 수 있는 선이야' '폭력에서 벗어난다는 게 이런 느낌을 주네'라는 경험을 연결하고, 그 경험에 행동 선택을 연결하는 것입니다.


  한계 선택을 할 때 중요한 것은 이 상황을 함께 바라봐 줄 한 명이 더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건 내 영역 밖이야' '불가능해' '나하고는 맞지 않아' '어차피 난 틀렸어'와 같은 생각이 떠오를 때, 우리는 좁은 시야에 갇혀버립니다. 터널 밖에서 '여기 밖이 있어' '이 정도라면 어때?' '이런 느낌은 어때?'라고 계속 이야기해 주고 같이 고민해 줄 누군가를 꼭 찾아내시고 도움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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