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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건우 Sep 30. 2018

작품집-여자를 찾습니다

1975년 11월 20일

여자를 찾습니다 – 1975년 11월 20일 발간     

    이 소설집은 김주영의 첫 번째 작품집이다. 1975년 11월 20일 발행되었고, 김주영이 1971년 ‘공식’ 데뷔한 이래 여러 지면에 발표한 단편을 모은 단편소설집이다.     


단편-마군우화-1973년 10월 신동아 110호     

1) 말더듬이 바로잡기

마규석 군은 미성물산에 입사하고 은밀하게 두 가지 일을 착수했는데, 하나는, 자신의 촌스러움을 없애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회사 직원들에 대한 탐색과 진단이었다.

마 군은 도시인의 생활에 맞게 블랙 커피를 마시고, 술집에서 팁을 주며, 맛있는 집들을 외우고 다니는 등 자신에게 배어 있던 촌뜨기 기질을 하나씩 없애는 한편, 회사 직원들을 한 명씩 탐색한 결과, 영업 상무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골이 텅텅 빈’ 사람들이어서, 조금만 노력하면 자기도 과장이나 상무가 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마 군은 맨발로 열심히 뛰어 훌륭한 영업 실적을 올렸다. 영업 상무도, 사장도 마 군의 뛰어난 영업 능력을 인정하게 되었고, 마 군 역시 자신의 실력에 자부심을 가졌다.

그리고 마 군은 판매과장 오상철을 가장 먼저 경쟁 상대로 골랐다. 오상철 과장은 나이도 많고, 말더듬이에 공장 사환으로 시작해 판매과장에 오른 능력 없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마 군은 오상철 과장에게 접근해 술도 사고, 오 과장의 모교 야구경기에 함께 가거나, 심지어는 여자를 사는 것까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해 마침내 오상철 과장의 마음을 여는 데 성공했다.

오상철 과장이 없는 자리에서는 오 과장을 비호하고 있었지만 내심 오 과장을 밀어내기 위한 작전은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 군은 오 과장이 가끔 공장에 몰래 다녀오는 것을 발견하고, 공장에서 물건을 빼돌리는 비리를 저지르고 있다는 단서를 발견한다.

마 군은 오 과장이 물건을 어디로 빼돌렸는지 확인하고 사장이 출장에서 돌아오길 기다려 전화를 걸었다. 사장은 마 군과 만나자고 했고, 마 군은 사장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 날 저녁 사장은 직원 회식을 알렸고, 마 군은 부푼 마음을 품고 회식에 참석했다. 느즈막히 오상철 과장이 회식 자리에 나타나 마 군을 불러내 근처 다방으로 데러가 마 군에게 흰 봉투를 건넸다. 봉투에는 ‘마규석 형 송별금’이라 씌어 있었다. 마 군은 충격을 받았고, 오 과장은 사실을 알려주었다.

오 과장이 공장에서 몰래 빼내 건네 준 물건은 사장의 첩이 운영하는 가게였던 것이다.      

2) 사팔뜨기 바로잡기

마 군의 형 마규달 씨는 고향 면사무소 농산계 서기로 일 하고 있지만 사팔뜨기를 하고 있어 마 군은 형을 창피하게 생각한다. 

마 군이 회사 미성물산에서 해고당하고 보름이 지난 어느 날, 아버지가 위독하시다는 전보를 받고 밤차를 타고 고향에 내려 갔다. 그러잖아도 회사에서 해고되고 그 동안의 경험을 밑천 삼아 사업을 시작해 볼까 생각하던 마 군은, 아버지가 가진 재산에서 사업 자금을 얻어내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 집에 도착해 보니, 자리에 누워 앓고 있는 아버지 앞에서 형과 형수가 대책 없이 지켜보고 있는 것을 본 마 군은 형 내외에게 신경질을 부리고, 택시를 대절해 서울의 큰 병원으로 모시고 간다.

마 군은 대학병원에 근무하는 동창의 힘을 빌어 아버지의 병환에 차도가 있게 되었다. 그렇게 아버지가 퇴원해도 좋다는 통보를 받은 날 저녁에 시골 사는 형이 서울에 올라 온 것이다. 

다음 날, 형과 함께 병원에서 아버지 퇴원 수속을 밟는 동안에도 형은 그저 조용하고, 묵묵히 서 있을 뿐이었다. 

집에 돌아와 마 군의 형은 아버지를 수발해 온 아내에게 은근한 목소리로 여인숙에 나가서 자자고 말한다. 마 군은 그 말을 듣고 형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만, 형 마규달 씨는 당당하게 ‘이런 좋은 날 한번 안 하고 언제 하노?’ 하면서 마 군을 똑바로 바라본다.

순간, 마규달 씨의 사팔뜨기는 사라지고, 자신의 교활한 의도가 부끄러워진다.     


단편-도깨비들의 잔칫날-1975년 4월 월간중앙 85호     

한명수는 40대의 백수로, 홀홀단신 홀아비다. 그는 재산도 없고 학벌도 없었지만, 누가 봐도 신사로 정중하고 보수적인 사내였다. 그는 양복을 말끔하게 차려 입고 구두가 반짝거리게 닦은 다음 집을 나섰다.

그는 먼저 수첩을 보고 오늘 열리는 전시회를 확인했다. 신문회관과 신세계화랑에서 전시회가 있다는 것을 확인한 그는 신문회관 쪽으로 향했다. 출근시간이 지난 서울의 거리는 한산했고,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피곤한 모습을 보면서 남모르는 우월을 느끼기도 했다.

가족이 없어 번거로울 일도 없고, 결혼을 하지 않아 마누라와 아이에게 시달릴 일도 없고, 재산을 모아야 할 이유도 없으니 그는 다른 사람의 삶을 비웃을 수 있었다.

그는 버스에서 내려 무교동 골목을 걸어 신문회관 방향으로 ‘정중하고도 준엄한 체모’로 걸어갔다. 하지만 그는 배가 고팠다. 신문회관 화랑에서는 외국에서 귀국한 젊은 화가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었는데, 축하 모임에는 화가의 가족, 친지는 물론 미술비평가, 신문기자들까지 사람들로 북적였다.

한명수는 자연스럽게 전시장으로 들어가 사람들 속에 섞였다. 누구도 한명수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인사를 하면서 맥주도 마시고 케이크도 먹었다. 사람들은 음식에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한명수가 눈에 띄지 않게 음식을 먹을 때,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전시장 입구에서 안내장을 나눠주고 있던 여자였다. 한명수는 주눅이 들기는커녕, 여자를 무시하고 천천히 전시되어 있는 그림을 감상했다.

한명수가 다시 맥주를 따라 마시자 여자가 다시 그를 힐끔 쳐다봤다. 한명수는 위기 의식을 느끼고 당당하게 그 여자 쪽으로 걸어가 안내장을 달라고 했다. 그는 안내장을 보면서 작품에 대해 아는 척을 했고, 안내장을 건넨 여자는 놀라면서 다방에서 차를 대접하고 싶다고 말했다.

여자는 한명수에게 ‘케이크 부대’의 한 사람인 줄 알았다고 말하고, 말하고, 두 사람은 서로 오해가 풀렸다고 기뻐하며 헤어졌다. 한명수는 그 전시장에서 나와 도로에 있는 신문 게시판에서 기사를 훓어보고 문화면의 기사에서 전시와 관련한 내용을 수첩에 적었다.

그는 중간에 한 곳의 전시관을 더 들르고, 두 개의 신문 게시판을 읽고 오후 느즈막히 신세계화랑으로 향했다. 그는 오늘 저녁을 얻어 먹지 못할 것이라는 막연한 불안을 느꼈다. 그가 그림을 보고 있을 때, 뒤쪽에서 한 부부가 그림을 선택하지 못해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한명수가 그들의 대화에 자연스럽게 끼어들어 그림을 선택하는 데 조언을 해주었다.

그림을 사려던 사람은 한 기업체 사장이었는데, 한명수가 추천해 주는 그림을 구입하고, 한명수를 집으로 초대했다. 그들의 승용차를 타고 가면서 사장 김일진이 건전한 사고방식을 가진 기업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집에 도착해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한명수는 자신이 알고 있는 알량한 지식으로 사장 부부를 사로잡았다. 그림 이야기를 한 다음, 김 사장의 사업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명수는 너무도 정직한 사람 앞에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으면 안 되는 압박을 느꼈다.

화장실에 다녀와서 한명수는 김 사장 부부에게 자신은 사기꾼이라고 고백했지만 김 사장 부부는 믿지 않았다. 한명수는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 두 사람에게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지만, 김 사장은 그저 술에 취해 하는 행동으로 이해했다. 끝까지 김 사장은 한명수를 사기꾼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단편-즉심대기소-1974년 11월 월간 세대 136호     

나와 은주는 풍기문란 죄로 파출소 즉심대기소에 들어왔다. 파출소까지 왔지만 어떻게든 철창 안에 갇히는 건 막아보려 했지만, 늙다리 순경은 내 부탁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즉심대기소는 철창이 드리운 좁은 공간으로, 그곳에는 이미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열 댓 명이 들어 앉아 있었다. 우리가 들어가자 어디선가 야비하고 음란한 말이 들려오고, 구역질 나는 냄새가 퍼져왔다.

은주는 훌쩍거리며 있었고, 나는 은주를 달랠 수도 없이 안절부절하고 있었는데, 그때 한쪽에서 여자들 목소리가 들렸다. 여자들은 울고 있는 은주를 면박했다. 

그 여자들은 술집 작부거나 몸을 파는 여자들로, 맞대거리를 했다가는 봉변을 당하기 십상이어서 나는 은주 옆에 조용히 앉았다. 잠시 뒤에 늙다리 순경이 들어와 백묵으로 좁은 방 가운데 선을 그어 남자와 여자를 분리해서 앉게 했다. 은주도 내 손을 잡고 있다가 어쩔 수 없이 여자들이 있는 곳으로 옮겨가야 했다.

술집 작부와 몸을 파는 여자들은 은주를 구석에 앉혀 잘 보이지 않게 했다. 나는 그녀들이 그래도 양가집 규수인 은주에게 존경심을 갖고 보호해준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창피를 당하고 나서 나하고 절교를 할까봐 걱정이 되었다. 순찰 경찰에게 잡히기 전에 둘이 달아나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온갖 잡놈과 잡년들이 풍기문란으로 재판을 받는 곳에서 그들과 함께 저 아름다운 은주를 법정에 세워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어떤 중년의 사내는 소변이 마렵다는 핑계로 경찰을 불러 은근히 와이로(뇌물)를 내고 빠져나갈 궁리를 했으나 늙은 경찰의 타박에 다시 들어오곤 했다.

밤이 깊어가고, 모두들 잠이 들어 코고는 소리까지 들릴 때, 어떤 여자가 나지막히 노래를 불렀다. 온갖 잡스러운 인간들이 모인, 더러운 장소에서 듣는 그 노래는 그러나 왠지 아름다웠다.

아침이 되고, 즉심대기소에 있던 사람들이 밖으로 나와 법원으로 가기 위해 웅성거리며 모였다. 남자와 여자가 따로 모여 차를 기다리고 있을 때, 한 여자가 나에게 다가와, 다른 여자가 은주를 데리고 도망갈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경찰이 잠시 한눈을 판 사이 곰보딱지 여자가 은주의 손을 잡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은주는 나를 향해 빨간 혓바닥을 날름해 보였다. 깔끔한 판타롱 아가씨가 갈데 없는 작부하고 도망을 치다니, 나는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단편-모범사육-1975년 7월 문학사상 34호     

내가 원장실에 들어서자 늑대같은 원장은 캴캴거리며 웃었다. 그가 웃을 때는 배불뚝이 국회의원이나 안경잽이 부인들이나 수녀들이 왔을 때 뿐이었다. 원장실에는 40대 여자가 앉아 있었고, 그 여자는 양자를 고르러 온 것 같았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선택되지 못한 나를 불러 낸 것은 이상했다.

여자는 나를 한동안 관찰하더니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겠다고 결정했다. 나는 조금 불안했다. 이 보육원을 한시라도 빨리 빠져나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이렇게 아무런 조건도 없이, 질문도 하지 않고 데려가는 것이 어딘가 석연치 않았기 때문이다.

여자는 원장에게 흰 봉투를 내밀었고, 나는 막상 보육원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해서 ‘난 안 가, 씨팔’하고 소리를 질렀다. 원장은 그런 나를 보고 윽박질렀고, 여자는 자기 집 냉장고에 아이스크림이 있다고 유혹했다.

나는 여자의 차를 타고 정릉의 숲속에 싸인 아담한 주택에 도착했다. 50대의 가정부가 나와 대문을 열어주었고, 여자는 가정부에게 나를 목욕시키라고 했다. 나는 목욕을 안하겠다고 욕을 했지만, 여자가 냉장고를 열어 보여주며, 목욕을 하면 마음껏 먹을 수 있다고 말하는 통에 목욕탕으로 걸어들어 갔다.

목욕을 하고 나와 소파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을 때, 대문에서 경적이 울리고, 여자가 두 아이를 데리고 들어왔다. 그 아이들은 쌍둥이였으며 마치 계집애들 같았다.

여자는 자기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나와 함께 놀라고 이야기를 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와 복습, 예습을 끝낸 다음 하루에 두세 시간만 함께 놀아주면 나머지는 잠을 자든, 냉장고에서 맛있는 것들을 꺼내 먹든 내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두 쌍둥이 녀석은 그림을 그리거나 바이올린을 켜는 것은 잘 했지만, 사내아이들이 노는 놀이는 하나도 할 줄 몰랐다. 학교에서도 운동장에 나가서 노는 일이 없다고 했다. 나는 두 녀석들에게 보육원에서 놀던 가락으로 숨바꼭질, 병정놀이, 돌차기 등을 가르쳐 주었다.

석달이 지나자 두 녀석은 제법 사내아이처럼 행동했다. 두 아이의 엄마인 여자도 만족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내 마음은 불안해졌다. 언제 이 집에서 쫓겨나 다시 보육원으로 돌아갈지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꾀를 내어 두 아이들에게 다시 옛날처럼 소꿉장난을 하거나 조용한 놀이를 하도록 유도했다. 하지만 두 녀석은 이제 나 만큼이나 왕성한 사내아이로 변신했고, 나의 회유는 실패했다. 그러던 어느 날, 보육원 원장이 나타났고, 나는 진땀을 뻘뻘 흘리며 끌려갔다.    

 

단편-휴면기-1971년 10월 월간문학 35호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집’은 낡고 음울한 장소였으며, 그곳을 드나드는 사람은 홀아비 요령잡이인 황 서방뿐이었다. 주인공 소년의 집 행랑채에 살고 있는 황 서방은 곳집 주변을 콩밭으로 일구었지만, 노루가 콩잎을 따 먹어 밭이 망가지면, 아들 ‘뚝이’에게 화풀이를 해대곤 했다.

전쟁이 일어나고, 학교도 문을 닫자 어른들도, 아이들도 마을에 나와 돌아다니질 않았고, 주인공은 ‘뚝이’와 가깝게 지낼 수밖에 없게 된다. 주인공 소년과 뚝이는 날마다 뒷산을 다니며 놀았다. 개미집을 찾거나 부수거나 독거미가 먹이를 잡는 모습을 지켜보곤 했다.

그러다 황 서방이 콩밭 한켠에 덫을 놓는 것을 보았고, 노루가 잡히길 기대했지만, 노루는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패주하는 인민군들이 마을을 지나갔다. 

그러던 어느날 숲속에서 소년과 뚝이는 황 서방과 마을 주민 몇이 밀도살하는 장면을 몰래 보게 된다. 숲속에서 소를 잡는 장면을 보고 두 소년은 오줌을 싸고 만다.

그 순간, 소년은 콩밭에 뛰어든 노루를 발견하고, 노루는 비행기 소리와 그림자에 놀라 뛰어다니다 ‘곳집’으로 뛰어든다. 노루를 가둔 두 소년은 콩잎을 따서 노루에게 주지만, 노루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노루가 곳집에 갇혀 있기 사흘째 되던 날, 두 명의 인민군이 곳집에 숨어 들었다. 인민군은 노루를 볼모로 소년들에게 마을에서 먹을 것을 구해 오라고 명령하고, 소년은 감자를 훔쳐 인민군에게 가져다준다.

밤이 지나고, 두 소년은 다시 곳집을 찾아가는데, 인민군이 노루를 잡아먹으려고 하자 뚝이는 쇠갈퀴를 들고 인민군을 공격한다. 하지만 인민군의 단검에 뚝이는 죽고, 노루는 인민군 품에서 도망쳐 산으로 달아난다.     

‘곳집’은 상여를 보관하는 집을 말한다. 요즘에도 시골에서는 전통 방식의 장례를 치르는 곳이 많은데, 매장 문화가 발달했던 조선시대에는 마을마다 상여를 보관하는 장소가 있었다.      

이 작품은 작가 김주영의 공식 데뷔작이다. 단편 ‘휴면기’가 ‘월간문학’ 신인작품상에 당선되면서 김주영은 정식으로 ‘작가’의 이름을 얻게 된다. 1971년 9월 3일자 경향신문에는 ‘월간문학 신인작품상 발표’가 실렸고, 문협기관지인 ‘월간문학’에서 3개월에 한 번씩 모집하는 신인작품상에 소설 ‘휴면기’로 김주영의 이름이 실린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단편-외출-1975년 소설문예      

나는 전과 5범의 도둑놈이다. 마누라는 청량리 뒷골목에서 몸을 파는 여자로, 유산을 너무 많이 해서 임신이 어려운 여자지만, 내가 감옥에 갔을 때는 청량리로 가서 몸을 팔며 기다리다, 내가 출소하면 다시 살림을 차리는 여자로 아내로서의 덕이 있다.

아내는 내게 도둑질도 먹고 살 정도로만 하고, 너무 많이 하지는 말자고 말하는 양심 있는 여자이기도 하다. 우리 둘은 남들이 보기에 ‘도둑질로 연명하는 개떡같은 부부’지만 부부의 정은 돈독하다.

내가 도둑질을 하기 위해 북아현동 일대를 답사하던 중, 깨끗하고 밝은 새집을 발견했다. 집주인과 식모의 말을 엿듣고는 남편이 집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집주인 여자는 미스코리아 뺨 치게 아름다웠고, 나는 나도 모르게 집주인 여자의 남편에게 질투를 느꼈다. 

나는 당장 그 집을 털기로 결심하고 그날 새벽에 담장을 뛰어 넘었다. 잠긴 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간 나는 불켜진 안방문을 열어 보고는 혼자 잠을 자고 있던 집주인 여자를 발견하고 흑심을 품는다. 그날 도둑질을 하지 않고, 집주인을 강간한 나는 내일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집으로 돌아온다. 아내에게는 거짓말을 하고.

다음 날 다시 그 집에 찾아간 나는 집주인 여자가 경찰을 부르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둘째 날도 여자를 강간했지만, 여자는 내일 남편이 돌아온다는 말을 한다.

나는 더 이상 그 여자를 만나지 못했지만, 그 집 주위를 서성이며 더 이상 도둑질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40여 일이 지나고, 다시 그 집 근처를 찾았을 때, 마침 외출하던 그 집의 가족과 맞닥뜨렸다. 

나는 그들을 미행했다. 그 가족은 비원으로 나들이를 했고, 음식점에서 냉면을 시켜먹었다. 그리고 여자를 남겨 놓고 남편과 아이가 먼저 택시를 타고 사라졌고, 여자는 혼자 한참을 걸어서 어느 산부인과 앞에 도착했다.

나는 순간, 저 여자가 내 아이를 임신했다는 확신이 들었다. 여자는 병원 앞에서 오랫동안 망설이다 병원으로 들어섰다. 나는 충동적으로 병원으로 뛰어들어가 여자의 뺨을 때리며 안된다고 소리질렀다. 여자는 울면서 살려달라고 했고, 나는 그녀를 끌어안으며 좋아한다고 말했다.     


단편-도둑견습-1975년-한국문학 1975년 4월호(통권 18호)     

폐품집적소 한쪽 구석에 있는 마이크로버스 폐차에 한 가족이 살고 있다. 나(이원수)와 엄마, 그리고 의붓아버지. 내 아버지는 ‘쐬주만 들이켜다’ 죽었고, 그나마 이 마이크로버스에 살 수 있었던 것도 엄마가 수납실 최씨에게 몸을 주는 대가였다.

고물장수인 의붓아버지는 ‘양창자 같은 골목길’만 다니며 고물을 수거하는데, 의붓아버지는 꼭 나를 데리고 다니며 고물장사를 했다. 그 전에는 나도 구두통을 매고 변두리 주택가를 다니며 구두를 닦았는데, 어느날 의붓아버지가 내 정수리를 쥐어박더니 내일부터 나를 따라다니라고 했다.

나는 싫다고 했지만, 의붓아버지는 ‘통대구 같은 눈깔을’ 굴려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따라나섰고, 며칠 따라다녀보니 그가 왜 나를 데리고 나왔는지 눈치를 챘다. 의붓아버지는 고물을 엿이나 돈으로 바꿔주기도 했지만, 사람이 없는 집에 들어가 돈이 될만한 물건들을 훔쳐 내왔다.

게다가 의붓아버지는 그렇게 훔친 멀쩡한 물건들을 전부 망치로 깨뜨려 고물을 만든 다음 폐품집적소에 넘겼다. 멀쩡한 물건을 그냥 팔면 훨씬 많은 돈을 받을 수 있겠지만, 의붓아버지는 무조건 고물로 만들어 헐값에 넘긴 것이다.

그날도 고물을 사러 돌아다니다가 의붓아버지가 어느 집에 들어가 물건을 훔치려고 할 때, 건장한 두 사내가 마침 의붓아버지가 들어간 그 집으로 들어갔다. 결국 의붓아버지는 도둑질이 들통나 ‘여물통이 당나발이 되도록’ 얻어맞다가 줄행랑을 놓았다.

그 사내들은 나에게 다가와 한패냐고 물었고, 나는 깡다구 좋게 그들에게 대들었다. 그들은 나를 그냥 두고 사라졌다. 나는 집에 들어가기가 싫었다. 의붓아버지가 나를 저주하고 때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가 물건을 훔치러 집안으로 들어간 뒤, 사람이 나타나면 신호를 해주는 것이 내 일이었는데, 오늘은 신호를 하지 못해 의붓아버지가 두드려 맞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붓아버지는 의외로 나를 보고 웃었다. 내가 두 사내 앞에서 쫄지 않고 당당하게 큰소리 치는 걸 숨어서 봤다는 것이다. 나는 그날부터 의붓아버지를 정식으로 ‘아버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날 저녁부터 아버지는 앓기 시작했다. 낮에 두들겨 맞은 것 때문인 듯 했다. 나는 병원에 가서 간호사에게 왕진을 와달라고 했지만, 그 간호사는 나를 쓱 훓어보더니 의사가 안 계신다고 했다. 나는 쇠꼬챙이를 꺼내 간호사를 위협해 집으로 데려왔다.

간호사는 아버지에게 주사를 놓고, 이틀치 약을 놓고는 돈도 받지 않고 부리나케 돌아갔다. 아버지가 며칠 앓아 누워 있는 동안 나는 혼자 리어카를 끌고 고물장사를 나갔다. 나는 문이 열린 빈 집을 발견하고 안으로 들어가, 낮잠을 자고 있는 식모를 위협한 뒤 그 집에서 값나가는 물건을 리어카에 담아가지고 돌아왔다.

내가 아버지에게 그 일을 말하자, 아버지는 나는 진짜 아들로 인정했고, 앞으로도 더 열심히 하라고 격려했다. 나는 기회가 될 때마다 식모가 있는 집에 들어가 물건을 강탈해 왔다. 

하지만 폐품집적소의 최주사가 집에 나타나 집 주위를 둘러보곤 해서 아무래도 불안해졌다. 어느 날 아침, 리어카를 끌어내려 할 때, 엄마가 달려와 경찰이 나를 찾는다고 했다. 그동안 내가 저질렀던 도둑질이 들통난 것 같았다. 나는 그 길로 도망했다. 하루를 시내에서 보내고, 저녁이 되어 집에 돌아왔지만 집안 살림이 모두 바깥으로 나와 있고, 엄마와 아버지는 길바닥에 나 앉아 있었다.

최주사가 인부를 시켜 마이크로버스를 해체하고 있었다. 우리집은 사라졌고, 나는 주머니에서 쇠꼬챙이를 꺼내 최주사를 향해 달려갔다.     

이 작품은 작가가 데뷔하기 전인 1960년 무렵 쓴 습작 소설이다. 1991년 11월 20일 대림기획에서 발행된 소설집 ‘추억의 노래’에는 작가의 노트에 이렇게 쓰여 있다.

 ‘도둑견습은 데뷔 초기의 작품이다. 그 시절에는 어린이를 주인공으로 하거나 화자로 등장하는 일종의 성장소설을 많이 썼다. 이 작품은 발표되었던 당시 얌전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병주 선생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반응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단편-악령-1975년-신동아 1975년 4월호(통권 128호)     

중산층이 모여 사는 이촌동은 도로는 반듯하고, 쓰레기 하나 보이지 않는 깨끗한 골목, 집마다 ‘윤기나는 승용차’를 가지고 있고 늘 조용하고 아늑한 마을이다.

여자들은 현모양처이고 남자들은 퇴근시간이 되면 일찍 집에 돌아와 단란한 가정, 행복한 가정의 모범을 보이고 있었다. 밤이면 불빛이 은은하게 비추고, 피아노 소리가 아름답게 골목을 흘러가는 완벽한 마을이다.

나라에 태풍이나 홍수, 화재 등으로 이재민이 발생하면, 이 마을에서는 파출소에 전화해 구호품을 가져가라고 했고, 이름도 알리지 않고 선행을 하는 선량한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다.

이 마을의 아이들도 군것질을 하지만, 지저분한 구멍가게에서 불량식품을 사 먹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시내 일류 제과점에서 사 온 빵이나 계란 쿠키, 캔디 등을 먹으며 놀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반듯하고 깨끗하며 조용한 이 마을에 한 장사치가 나타났다. 늙은이 황가는 지저분한 외모에 불량식품이 분명한 오뎅 솥과 튀김 통을 싣고 아들인지 손자인지 알 수 없는 열한두 살쯤 먹은 맹호라는 아이를 데리고 다녔다.

당연히, 누구도 이 지저분한 리어카에서 불량식품을 사 먹지 않았다. 주인의 심부름을 나온 식모가 보다 못해 딱하다는 듯이 이곳에서는 장사가 안 된다고 일렀지만, 도리어 맹호에게 면박만 당하고 말았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도록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지만 황가는 아침에 나와 연탄불을 피우고, 오뎅을 삶고, 튀김을 튀겨 놓고 손님을 기다렸다. 온종일 허탕을 치고 저녁이 되면 다시 식은 튀김을 챙겨 집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열흘이 지났을 때, 이 마을의 부모들은 아이들이 황가의 리어카에서 불량식품을 사 먹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이들은 당연히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 리어카를 봤지만 무관심하게 지나쳤다. 아이들을 불러 세운 것은 맹호였다. 맹호는 아이들에게 오뎅이며 튀김을 먹으라고 했다. 아이들은 돈이 없어 먹을 수 없다고 했고, 맹호는 돈이 없어도 좋으니 외상으로라도 먹으라고 반공갈, 반협박을 했다.

아이들은 어쩔 수 없이 오뎅을 먹었고, 맹호는 아이들에게 윽박질렀다. 부모들에게 알리면 그만두지 않겠노라고. 그렇게 조금씩 아이들이 협박과 공갈 속에서 리어카의 불량식품을 먹는다는 소문이 퍼졌고, 마을 주민들은 파출소에 그 리어카를 신고했다.

파출소에서 순경이 나타나 황가에게 리어카를 끌고 사라지지 않으면 잡아들이겠다고 을러대자 황가는 어쩔 수 없이 리어카를 끌고 그 골목에서 사라졌다. 

마을은 다시 평온을 찾았고, 아이들도 반듯한 생활 속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몇 주일이 지나자 아이들이 다시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시간이 늦어지는 것은 물론, 옷이 더러워지거나 팔다리가 긁히거나, 눈물자국이 남아 있었다. 마을은 다시 시끄러워졌다.

부모들은 학교에 전화를 걸어 담임 선생님에게 아이들이 왜 이렇게 이상하게 변하는지 물었지만, 학교에서는 절대 그런 일이 없다는 말만 돌아왔다. 교양 있는 부모들은 아이들을 다그치지 않았지만, 아이들은 어느새 부모의 품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다는 것을 불안하게 느끼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조금씩 거칠어졌고, 숙제도 하지 않았으며, 머리에 혹이 나거나 눈두덩이가 시퍼렇게 멍이 든 채 집에 들어오곤 했다. 아이들 때문에 교양 있고 사이좋은 부모들도 부부싸움을 하기 시작했고, 엄마는 아이를 때리고, 아버지는 술을 마시고 들어와 술주정을 하기 시작했다.

마을은 질서가 무너지고 동네 파출소는 신이 났다.

마을이 이렇게 타락하게 된 원인을 밝혀낸 것은 어느 똑똑한 식모 덕분이었다. 담배 심부름을 나온 식모는 마침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는 버스를 보았고, 버스에서 내린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골목 어귀에서 한 아이와 만나는 것을 보았다. 그 아이는 바로 맹호였다.

아이들은 맹호를 보고 좋아했고, 맹호를 따라 골목을 달려갔는데, 그곳에는 바로 황가와 리어카가 있었다. 아이들은 리어카에서 오뎅과 튀김을 사 먹었다.

맹호는 아이들을 데리고 공터로 가서 잡아 놓은 쥐에 휘발유를 붓고 불을 붙였다. 작은 불덩이가 된 쥐는 공터를 가로질러 달리다가 불에 타 죽었다. 맹호와 아이들은 그 처참한 장면을 보고 휘파람을 불며 사라졌다.     


중편-여자를 찾습니다-1975년-서울신문 연재-1975년 6월 9일 시작-8월 9일 끝.     

나는 스물여덟의 직장인이다. 돈도 벌고, 못 생긴 것도 아닌데, 지금까지 연애를 한 번도 못 해본 것이 억울하다. 나는 애인을 만들기 위해 여자대학교 앞으로 하숙을 옮길 작정을 한다.

아현동 산동네에서 하숙집을 구하던 나는 ‘하숙 안 칩니다’라는 쪽지가 붙은 집을 보고 호기심에 벨을 눌렀다. 집주인 아주머니를 만나 거절을 당하고 돌아서려는데, 주인 아주머니가 차 한 잔 하고 가라며 붙잡았다.

차를 마시며, 주인 아주머니는 집에 여자들만 있어서 시골에서 선생 노릇을 하는 남편이, 남학생을 하숙으로 들이라는 말을 했노라고, 남학생이라면 하숙을 치겠다고 했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렀으나, 여유 있는 척 하면서 다음 주 일요일에 하숙을 옮기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지금 있는 하숙집의 물건들은 모두 버리고, 깨끗한 이부자리와 옷, 책 들을 회사에서 가불한 돈으로 구입했다.

지방으로 답사를 갔던 하숙집 딸이 밤늦게 집에 도착한 날, 내가 문을 열어주었고, 딸은 상상했던 것처럼 예쁘고 삼삼했다. 나는 아버지에게 거짓 편지를 보내 30만원을 보내달라고 했고,  며칠 뒤 아버지가 직접 돈을 가지고 하숙집으로 찾아왔다.

아버지는 당신이 봐 둔 며느리감이 있다면서 얼른 시골에 내려오라고 했다. 아버지가 다니는 외장의 여인숙집 딸이었는데, 나는 죽어도 싫었지만 아버지에게 돈을 받아내기 위해 조만간 고향에 내려가겠다고 거짓말을 했다.

돈을 받아 하숙집으로 돌아온 나를 맞이한 건 하숙집 딸 미연이었고, 돌아오는 일요일에 함께 야외로 데이트를 하러 가기로 했다.

다방에서 만난 미연은 친구들이 있다며 미안해 했지만, 나는 네 명의 여성들과 함께 택시를 타고 정릉으로 놀러갔다. 택시비며 음식값은 모두 내가 지불했고, 놀이를 하면서도 술래가 되어 시키는대로 다 했다.

그날 이후 미연은 나를 유혹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나는 참고 기다렸다. 그 사이 혼자 고급 레스토랑이며 카페에 다니면서 그동안 몰랐던 고급문화를 돈 써가면서 배웠다.

어느 일요일, 미연의 친구가 찾아와 셋이 덕수궁에 갈 기회가 생겼다. 나는 먼저 조선일보 스카이라운지에서 근사한 점심을 샀고, 덕수궁에서도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하숙집 딸 미연과 가까워질 무렵, 시골에서 아버지가 올라왔고, 혼자가 아닌, 며느리감이 될 여자를 데리고 온 것이다. 아버지는 같은 하숙집에 칠례를 맡기고 내려갔다. 나는 좋아하고 있는 미연과의 관계가 틀어질까봐 칠례를 골탕 먹여 내려가도록 작전을 세웠다.

미연과 함께 칠례를 데리고 서울 구경을 나간 나는, 술도 먹여 봤지만 실패했고, 창경원에서 물개 구경을 시켜주면서 고민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회사 사장이 나타나 수금한 돈 5만원을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다. 곤란한 상황을 해결한 것은 의외로 칠례였다. 칠례가 돈을 대신 갚아주고 미연도 다른 친구와 사라지고 나서, 나와 칠례는 비원에서 소주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다 잠이 들었고, 동이 트는 새벽이 되어 깨어난 나는, 잠든 나를 안고 있던 칠례에게 진한 감동과 사랑을 느꼈다.     


‘여자를 찾습니다’는 중편으로 ‘서울신문’에 먼저 연재되었던 소설이다. 1975년 6월 9일 첫 연재를 시작한 이 소설은 당시 인기 있던 70년대 작가들의 중편소설 연재 릴레이의 하나였다.     

 

이 소설은 그 해 8월 9일까지 모두 53회를 연재하고 완결되었고, 곧바로 영화로 만들어지게 된다. 같은 해 11월 20일자 동아일보에 보도된 내용을 보면, ‘바보들의 행진’으로 흥행에 성공한 하길종 감독이 새로운 영화로 ‘여자를 찾습니다’를 만들기로 했다는 보도가 있다.

[기사] 히트작 ‘바보들의 행진’을 내놓았던 하길종 감독이 지난 8일 크랭크인 된 ‘여자를 찾습니다’(김주영 원작)에서 다시 메가폰을 들고 있다. 귀국 후 ‘화분’, ‘수절’, ‘바보들의 행진’ 등 일련의 문제작을 감독했던 하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는 연출 방향을 혁신하겠다면서 ‘가능한 한 재미있는 상업영화의 샘플을 만들어 한국영화의 질적 향상에 이바지하겠다’고 대단한 의욕.     

    ‘여자를 찾습니다’는 이후 영화로 만들어져 1976년 3월 19일 개봉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흥행에 실패한다.      

여자를 찾습니다 – 책세상-2007년 8월 10일     

김주영 최초의 소설집이었던 ‘여자를 찾습니다’는 2007년에 ‘책세상’ 출판사에서 새로운 판형과 편집으로 다시 나왔다.      


    작가의 말-새로 펴내며     

소설 <여자를 찾습니다>는 1975년에 출간된 나의 첫 작품집에 수록된 작품이다. 그보다 먼저 중앙의 한 일간지에 연재가 되었는데, 이 제목이 그 당시에 많은 독자들의 시선을 끌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30년 전, 그리고 그 은유의 시대에 대담하게도 ‘여자를 찾습니다’라는 다소 저급하거나 직설적인 단어를 소설 제목으로 삼는다는 것은 용기가 필요했다. 이 소설은 대체로 우리 사회가 농경시대에서 산업화시대로 급속하게 이전되면서 노출되기 시작하는 온갖 부조리한 사회적 현상들을 비꼬거나 비아냥거리거나 혹은 질타하는 내용들을 담고 있다. 비평가들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풍자소설인 셈이다. 그러나 풍자이건 아니건간에 소설이란 모름지기 그 시대를 담아내는 인간들의 모습을 진솔하게 그리고 거기에서 어떤 교훈 하나라도 건져내겠다는 노력이 스며 있기 마련이다. 이 소설에 나타나는 인물들 모두는 일테면, 역사의 배면이나 행간에 배설되어 그 존재의 의미가 뚜렷하지 못했던, 사회적으로 약자의 편에 선 이들이었다. 그럼에도 삶의 욕구나 혹은 올곧게 살아가려는 욕구에 있어선 누구 못지않은 열정을 가진 그런 인물들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 후 30년이 흘러간 지금에 이르러서도 나는 그들을 여전히 사랑해서 보듬어 안아보고 싶은 것이다. 그들이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2007년 7월 김주영.     

또한 책 뒷부분에 작품 해설로 정주아의 ‘도시 속 악동의 불순한 생명력’ 제목의 평론이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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