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환상의 빛>
얼마 전 tvN에서 방영하는 특강 프로그램 "어쩌다 어른"의 이동진 편을 봤다. 이동진 씨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그리고 존경하는 영화평론가다. 그는 본인이 제일 좋아하는 영화를 소개하며 강연을 시작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1995년 데뷔작 <환상의 빛>. 시간의 소금기가 배어 있는 작품이라고 이동진 씨는 말했다. 며칠 전 무슨 영화를 볼까 고민하다 문득 생각이 나서 보기로 했다.
영화 초반부에는 평범하고 아늑한 부부의 모습이 그려진다. 유미코(아내)와 이쿠오(남편)는 소소한 일상을 나누며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 함께 자전거를 페인트 칠하고, 출근길에 이쿠오를 집 앞까지 배웅해주고, 어떤 날에는 몰래 이쿠오가 일하는 공장까지 찾아가서 깜짝 데이트를 청하는 유미코. 그런 유미코를 보며 이쿠오는 다정하게 싱긋 웃는다. 혹시 그 웃음 속에 슬픔이 있었던가. 뒤늦게 자문해보지만, 잘 모르겠다.
<환상의 빛>은 조용하고 미학적인 영화다. 대사가 많지 않고 장면 전환이 느리다. 그래서 미술 작품을 찬찬히 감상하듯 삶의 여백을 물끄러미 응시하게 된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일본의 풍경은 너무나 고요하고 아름답다. 하루키의 소설을 읽는 듯한 아득함이 밀려온다. 특히 「상실의 시대」와 분위기가 비슷하다. 두 작품이 비슷한 주제를 담고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 날, 유미코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남편을 배웅하고 집에서 3개월 된 아기를 돌보고 있었다. 야밤에 찾아온 경찰이 남편의 사망 소식을 전한다. 이쿠오가 열차에 치여 죽었다고. 그가 매일 출근길에 자전거를 타고 달리며 무심히 바라보던 그 열차에. 마지막 순간에 그는 달려오는 열차를 향해 걷고 있었다. 열차가 오는 걸 보면서도 계속 걸었다. 이쿠오는 자살했다.
영화는 계속 이어진다. 남편의 죽음이라는 큰 사건이 있었음에도 유미코는 슬픔을 억누르고 '그 이후'를 살아간다. 몇 년 후에는 바닷가에 사는 타미오라는 남자와 재혼을 한다. 그와의 결혼생활은 나름대로 괜찮아 보인다. 유미코는 점차 바닷가 생활에 적응하고 아들과 딸이 커가는 모습을 보며 행복해한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지금까지 한순간도 떠나지 않은 질문이 있다. 그날 그는 왜 그랬을까. 이쿠오는 왜 자살한 걸까. 대체 왜?
난 정말 모르겠어, 그 사람이 왜 자살했는지. 왜 기찻길을 따라 걸었는지. 한번 생각하면 멈출수가 없어요. 그 사람이 왜 그랬을까요?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서있다. 옆에서는 정체모를 무언가가 타오르고 있는 초저녁의 바닷가. 그곳에서 유미코의 감정이 폭발하는 이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다. 마침내 그녀가 이쿠오의 죽음 이후 단 한 번도 꺼내지 않은 그 물음을 타미오에게 던졌을 때, 그가 내놓은 대답(아마도 이 영화 최고의 명대사임이 분명한)을 들으며 나는 왜 영화의 제목이 '환상의 빛'인지 깨달았다.
아버지가 전에는 배를 탔었는데, 홀로 바다 위에 있으면 저 멀리 아름다운 빛이 보였대. 반짝반짝 빛나면서 아버지를 끌어당겼대. 누구에게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빛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그리고 왜 '환상의' 빛인가? 명확한 답안은 없다. 나는 어렴풋이 느낄 뿐이다. 삶은 환상과도 같아서 떠남에는 이유가 없다. 떠난 이들은 사라졌지만 사라지지 않은 채로 물안개처럼 희미하게 남아 우리의 환상 속을 부유한다. 왜 죽는 걸까? 반대로 왜 사는 걸까? 영화의 결론은 자칫 심미주의나 허무주의를 지향하는 것으로 오해되기 쉽다. 그러나 <환상의 빛>은 무언가를 말하려는 영화가 아니다. 그저 보여주는 영화다. 인과관계를 설명할 수 없는 일들로 뒤덮인, 어쩌면 그저 무심한 우연의 연속일지도 모르는 우리의 삶을. 그 아득한 풍경을.
인생은 이유 없는 상실로 가득한 여정인 것 같다. 앞으로 나는 얼마나 많은 상실을 마주하고 또 겪어야 할까. 그 모든 일들에 이유를 찾으려고 발버둥 치진 말아야겠다. 합리적 이유 따윈 없을 때가 많으므로. 때로는 이유가 없다는 사실이 위로가 된다. 영화 속 대사처럼 누구에게든 일어날 수 있는, 그런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