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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정 Oct 22. 2019

흔적을 붙들다, 사랑

사랑하는 사람을 복제하려고 그림이 시작되었다

“사랑을 남겨놓으려고 기를 쓰는 몸짓이 사랑이다. 곧 사라질 그림자라도 몇 번을 따라 그리며 그 사람을 선명하게 돋우려고 정성을 다하는 것이다. 그것이 사랑의 깊이고 사랑의 수명이다.”


 새파란 스무 살의 가을, 어른 여자 하나가 실기실을 나서는 나를 붙잡았다. 혹시 서양화과 학생이냐고 물었다. ‘그렇다’는 내 대답에 반색하는 그녀, 사진 하나를 내밀며 그림을 그려 줄 사람을 찾는다고 했다. 자기는 직장인인데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을 찾아서 여기까지 왔다고. 내가 다닌 학교는 언덕이 꽤 높다. ‘비 오는 날 정문에 들어가면 후문까지 비 한 방울 맞지 않고 나온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비좁고 샛길이 많아 복잡하다. 거기에 전국에서 제일 과(科) 종류가 많다는 미대는 그 언덕의 꼭대기 건물 뒤에 하나둘 겹겹이 숨어 있다. 매해 새내기 오리엔테이션마다 ‘길을 잃지 않고 우리 실기실 찾아가는 법’을 안내할 정도로 복도가 난잡하다. 보나 마나 그녀는 험난한 여정을 통과해 구석진 서양화과 실기실까지 찾아온 것이다.  

 여자가 내민 사진은 아쉽게도 선명한 형상이 아니었다. 아날로그 필름 중에서도 자동카메라로 찍은, 게다가 플래시가 터져 눈에서 붉은 불이 나는(아날로그 필름을 써본 사람만 기억하는 비극) 상태였으며, 그마저도 흔들려 윤곽이 번진 상태였다. 물론 그 상태로 실루엣만 뿌옇게 잡을 수는 있겠지만 그건 그녀가 여기까지 찾아오며 기대한 퀄리티가 아닐 터, (게다가 그녀는 세밀하고 날카로운 펜화를 원했다) 내 얕은 실력과 뾰족한 양심으로는 도저히 그 아르바이트를 수용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 거절을 표하면서 여자의 절박함을 읽었다. 흐릿한 사진 속 그 남자는 분명 여자가 깊이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복제하려고 그림이 시작되었다. 그리스 문화의 발상지인 코린트(Corinth) 시키온(Sicyon)에는 오래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기원전 600년 경, 아름다운 여인 디부다테스(Dibutades)는 한 청년과 사랑에 빠졌다. 두 사람은 함께 살기로 약속했지만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전쟁이 터지고 남자는 군대로 끌려가야 했다. 디부다테스는 슬픔에 젖어 마지막 저녁을 맞았다. 그를 집에 불렀다. 정성스레 차린 식사를 마치고 술을 한 잔 하고 남자의 손을 잡아끌어 자기 집 벽 앞에 앉혔다. 깊은 밤 어두운 방, 작지만 센 등불 하나를 놓고 비스듬히 그를 기대게 했다. 남자의 옆얼굴이 검게 비쳤다.  

 여자는 숯을 가지고 남자의 실루엣을 따라 그렸다. 이마에서 코로 내려가는 고귀한 선, 인중에서 입술로 떨어지는 의지력,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배어 나오는 입술 사이사이, 단단한 턱 선이 여자의 손끝에서 흐른다. 흔들리는 목선이 쇄골로 이어진다. 어깨를, 팔꿈치를, 손목과 손가락을 잇는다. 남자는 흔적으로 남았다. 이제 그녀는 그를 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는 내일 사지(死地)로 떠난다. 그가 없어도 이 벽에 기대면 그와 맞닿을 수 있다. 그가 떠나도 이 벽을 바라보면 그의 얼굴이 떠오를 수 있다. 


 이 애틋한 흔적 이야기가 고대로부터 전해오는 ‘회화의 기원’이다. 대(大) 플리니우스(Gaius Plinius)는 말한다. “벽에 비친 그림자의 윤곽을 본뜬 것이 그림의 기원이다.”라고. 그는 『박물지』에 이 사랑의 이야기를 실었다. 그리고 수많은 화가들이 이 사랑의 흔적을 선명하게 재생했다. 나는 그중에서도 플랑드르 화가인 조제프 베누잇 수뷔(Joseph Benoit Suvee)의 작품을 좋아하는데, 두 사람의 그림자가 하나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Joseph Benoit Suvee, 「The Invention of the Art of Drawing」, oil on canvas, 267×131.5cm, 1791. Groeni

 어두운 방을 밝히는 강한 램프의 빛, 남자는 여자를 부둥켜안았다. 여자는 남자에게 기대 그 사람의 얼굴을 그린다. 여자의 흰옷은 그림의 모든 빛을 그러모은 듯 빛나고 남자는 그녀의 그늘 아래 머문다. 여자는 내일 떠나야 하는 그 사람을 숨겨놓고 싶었을 것이다. 여자는 벽 쪽으로 얼굴을 길게 뽑고, 그녀의 목덜미가 빛난다. 손끝까지 빛이 흐른다. 남자는 영문을 모른다, 왜 이 여자가 팔을 뻗는지. 그리스 조각처럼 눈이 깊고 코가 높은 남자의 얼굴은 빛을 가른다. 정확히 절반으로 나뉘어 빛과 그림자의 영역을 구분한다. 아아, 이 빛이 남자의 얼굴 반쪽을 선명하게 그릴 것이다. 


 수뷔는 이 그림을 1791년 살롱전에 출품한다. 관객은 그림의 강력함에 매료되었다. 빛과 어둠의 극명한 대비가 만드는 긴장감과 선명한 그림자, 시각적 긴장감을 주는 변각구도, 어두운 옷을 입은 남자와 흰옷을 입은 여자의 대비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강력한 감정 때문이었다. 사랑의 흔적을 남기고픈 여자의 단호함과 이 순간마저도 그녀의 온기를 붙들고픈 남자의 간절함이 절절하게 흐른다.  

 사랑의 감정을 부르는 도파민 호르몬은 3년에서 5년 사이에 서서히 소멸된다고 한다. 그 어떤 열렬한 사랑도 10년을 넘기기 힘들다. 사랑이 아니라 정(情) 때문에 산다고 하는 부부의 이야기는 정설(定說)이 된 지 오래다. 그러니 사랑이란 제아무리 강력해도 일종의 환상이다. 빛이 사라지면 그림자가 소멸하는 것처럼. 못내 서글프다.  


 그러나 나는 단언한다. 사랑은 흔적을 붙드는 것이다. 사랑을 남겨놓으려고 기를 쓰는 몸짓이 사랑이다. 곧 사라질 그림자라도 몇 번을 따라 그리며 그 사람을 선명하게 돋우려고 정성을 다하는 것이다. 그것이 사랑의 깊이고 사랑의 수명이다. 그 옛날, 내게 흐릿한 사진을 가져온 여자가 원했던 것은 흔적이었다. 선명하지 않은 남자의 흔적을 선명하게 남기고 싶었던 것이었다. 디부다테스와 꼭 같은 마음이다. 


사랑은 입이 없어도 가슴으로 충분하다. 맥박으로 다른 사랑을 부른다. 이 사랑에 감동하는 사람이 그 사랑에 손을 내민다. 디부다테스의 아버지 부다테스(Butades)는 도공이었다. 매일 슬피 벽만 보느라 꼼짝 않는 딸을 보고만 있을 수 없던 아버지는 청년의 그림자를 따라 진흙을 붙인 후 떼어냈고 가마에 구워 딸에게 주었다. 남자의 얼굴을 한 타일을 만든 것이다. 딸은 이 남자의 모습을 어루만지며 슬픔을 견뎌냈다. 이것을 ‘조각의 기원’이라고 부른다. 새삼 스무 살의 내가 아쉬워진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해볼 것을, 뿌연 목탄이나 연필로 그려준다고 제안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녀가 바랐던 것은 실낱같은 도움이었을 테니. 흐릿한 사진이 조금 나아진 걸로도 그녀는 충분했을지 모른다. 부디 그때 그 사진을 들고 온 여자는 오래 슬프지 않았기를, 누군가의 도움 없이도 그 남자의 마음을 얻어서 오래 붙들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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