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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정 Oct 22. 2019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나요?

슬픔도 사랑의 일부다

"그림 속의 여인은 사랑 때문에 너무나 고통스럽지만 결국 사랑 때문에 살아갈 것이다. 이제부터는 그를 사랑했기 때문에 살아갈 것이다."


옛 직장에서의 일이다. 옆자리에서 일하던 동료 민정씨가 어느 날 점심을 못 먹겠다며 사무실에 홀로 남았다. 하루 종일 모니터를 보며 웹디자인 시안을 뽑아내던 날들이라 ‘낙이라고는 오직 점심시간’뿐이라던 동료의 모습은 의아했다. 이틀도 지나지 않아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녀는 남자친구 부모님의 반대로 갑자기 실연을 당했고 충격으로 아무것도 먹히지 않는다고 했다. 물만 마셔도 토한다고, 몸이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소연했다. 실장님을 비롯한 여러 명의 직원들은 모두 그녀를 걱정했다. 당장 마감이 코앞인 프로젝트가 두어 개 밀려있을 때였다. 일주일 동안 민정씨는 축 쳐진 채로 출근했고 두 번의 야근까지 해냈다. 힘겨운 열흘이 지난 후에야 그녀는 겨우 우리와 함께 점심식사를 할 수 있었다. 민정씨를 다독이는 동안 깨달은 것이 있다. 사람은 언제든 사람을 떠나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사람이 상처를 입으면 저렇게 휘청거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사람은 휘청거려도 쉽게 쓰러지지 않는 끈질긴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대개 사랑이 행복하고 기쁜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의 완성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양 생각하여 한순간 사랑에 빠지는 것을 고대한다. 그러나 나는 사랑이 대개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삶 자체가 대체로 어렵고, 그 사이사이 기쁜 순간들이 잠시잠깐 존재하며, 그 순간의 힘으로 삶을 지탱해나간다고 믿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이 어렵고 고된 일이라면 사랑 역시 어려운 일이다. 하물며 죽음 같은 이별의 슬픔을 겪는다면 오죽할까. 


 비판적 리얼리즘의 창시자 중 한 명, ‘러시아의 호가스’라 불리는 탁월한 풍속화가 파벨 안드레야비치 페도토프(Pavel Andreevich Fedotov, Павел Андреевич Федотов, 1815-1852)는 군인의 아들이었다. 사실 페도토프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그리기를 좋아했다. 은퇴한 장교였던 그의 아버지는 가난한 가정 형편 때문에 아들이 안정적인 직장을 갖기를 원했고 아들은 이에 크게 반항할 수 없었다. 페도토프는 모스크바 제1 군인학교를 졸업하고 곧이어 상트 페테스부르그의 근위대에서 복무한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그에게는 예술인의 피가 흘러 드로잉과 수채화를 배우기 시작한다. 밤마다 다니던 미술 아카데미에서 실력은 나날이 늘었고 특히 초상화를 잘 그려서 군대 내에서 인기를 끌었다. 군대 화가로서 확고히 자리도 잡았다. 


 참 이상하게도 예술의 매력은 현실의 눈을 가린다. 페도토프는 안정적인 군대를 그만두고 그림에 집중하고 싶었다. 제대 후에는 초상화에 몰두하면서 돈을 벌었다. 어린 시절부터 가난한 러시아 민중과 가까이 지내서였을까, 유화에 전념하면서는 화가 특유의 일상성과 풍자성이 그림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캔버스에는 치밀한 색을 구성한다. 인생의 황금기인 삼십대의 일이었다. 1844년에서 1852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화가는 가진 재능을 활활 불태웠다. 


1849년에는 아카데미 전시회에서 큰 성공을 거둘 정도로 명성을 얻어가던 어느 날 화가의 심장은 뛴다. 한 사회주의 서클을 만나게 된 것. 그는 여기 뛰어들어 뜨거운 비판 의식을 불태운다. 여기는 바로 페트라세프스키 모임, 도스토예프스키 사형 해프닝의 원인이 되었던 바로 그 서클이다. 자연스레 화가의 그림은 더욱 풍자적이 되었다. 추악한 부르주아는 부끄러운 줄 모르고 제 악행을 자랑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애처로이 빛났다. 민중의 슬픔은 약간의 우스꽝스러움에 더불어 더 처연하게 드러났다. 모순은 진실을 강조하고 본질은 칼날처럼 빛난다. 서유럽의 혁명 사상, 부르주아의 탄생과 신분제의 혼란, 가난한 농노의 고통과 해방에의 열망 등이 그림에서 피어난다. 안타깝게도 페트라세프스키 서클은 화가를 사회에서 고립시켰고, 정신적 압박을 심하게 주었다.  


 페도토프를 설명할 때 ‘색채의 고골리’라며 흔히 동시대의 작가 니콜라이 고골리를 소환한다. 고골리 역시 유머와 풍자를 사용해 관료사회를 조롱하고 사회를 비판하며 인간의 속물성을 비웃는다. 화가 역시 ‘붓솜씨가 좋은’ 스토리텔러였던 것이다. 


화가는 1852년에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정신병원에서 사망한다. 그의 사망 1년 전 작품인 「미망인(未亡人)」은 사별의 고통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이 그림은 화가의 그림 중에서도 죽음을 주제로 하여 특히 애처로운 작품이다. 러시아 트레챠코프 박물관 15번 룸에 함께 전시된 같은 제목의 그림 두 장은 아이를 낳기 전과 후의 이미지다. 페미니즘의 입장에서는 ‘남편을 따라 죽지 못한 여자’라는 뜻을 가진 이 단어를 맹렬히 비판하지만, 사랑의 입장에서 나는 ‘사랑하는 이를 죽음에라도 따라가고 싶은 사람’이라는 의미에 동의한다. 진실로 사랑하는 이를 잃은 이라면 남성이든 여성이든 ‘미망인’이라는 이름표를 자기 왼쪽 가슴에 기꺼이 붙이리라. 

 검은 상복의 여자 하나가 힘없이 콘솔에 기댔다. 여자는 콘솔 위의 사진 하나를 오래오래 물끄러미 바라보았을 것이다. 여자의 등 뒤, 이미 그녀가 지켜보았던 사진의 주인공은 아무래도 깊이 사랑했던 반려자였던 것 같다. 촛불을 켜서 그 사람을 기념하고 아픔을 눌러 기도했으리라. 참 이상하다. 여자는 사진에 등을 돌렸는데도, 여자의 표정은 힘이 없어 사그라질 것 같은데도 눈길 끝에는 남자의 얼굴이 어른거리는 것 같다. 여자가 그리워하는 사람은 이제 만날 수 없다. 그래서 이 사진만이 유일한 사랑의 통로이다. 이제 사진을 통해서만 그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어떡하나, 이 뱃속에는 아이가 있는데. 어떡하나, 나 홀로 이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하나. 그리운 이여, 무어라도 말해 주어요.’ 여자는 그리움에 매달린다. 그러나 그는 대답하지 않고 여자는 돌아서 눈물을 참는다. 조금 진정된 가슴을 다독이다 또다시 사진을 바라본다. 그리움은 너무나 아픈 것이지만 이 그리움에 매달려야만 그의 얼굴을 겨우 볼 수 있다. 사진밖에 없는 여자는 이제부터 사랑 없이 살아야 할 것이다. 


『자기 앞의 생』에서 모모가 하밀 할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사람이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나요?” “살 수 있지, 슬프지만.” 하밀 할아버지의 대답은 정답이 못 됩니다. 살 수 있다면 결코 슬프지 않습니다. 생각하면 우리가 생명을 저버리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한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한다는 것은 기쁨만이 아닙니다. 슬픔도 사랑의 일부입니다. 마치 우리의 삶이 그런 것처럼. 

_신영복, 『담론』, 돌베개, 2015, P.418


 ‘슬픔도 사랑의 일부’라는 말씀에 깊이 공감한다. 고통도 사랑의 일부가 아닌가. 이별과 죽음은 여러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직접적인 것은 고통이다. 죽음에는 결코 되돌릴 수 없는 이별이 있고, 이별에는 죽음과도 같은 고통이 있다. 이별을 겪은 사람은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나을 수 있으리라 괴로워한다. 그런 사람에게는 인간이 해줄 수 있는 어떤 위로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만은 정확하다. 사랑은 대단하고 놀라운 것이지만 사랑의 감정이 인간보다 크지 못하다는 것이다. 사랑 때문에 죽을 것 같은 감정이 들지만 사랑의 감정이 사람을 죽이지는 못한다. 그걸 알고 나면 사랑을 더욱 감싸 안게 되고, 사랑은 다시 태어나 훨씬 담담해진다. 


이것이야말로 사람의 강인함이며 사랑의 위대성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진실한 사랑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을 파멸로 이끌지 않는다. 인간을 죽을 것처럼 괴롭히더라도 결국에는 인간을 살리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페도토프의 「미망인」 그림은 한 장이 아니다. 화가는 같은 제목의 그림을 세 장 그렸다. 흡사한 공간과 흡사한 포즈의 같은 여성이 그림 안에 섰다. 다른 것은 단 하나, 부른 배와 꺼진 배뿐이다. 그는 사랑의 흔적을 남기고 갔고, 그녀는 사랑의 흔적을 간절히 품었다. ‘사랑하는 이를 따라 죽지 못한 이’는 시간을 통과해 살아남았다.  


 그림 속의 여인은 사랑 때문에 너무나 고통스럽지만 결국 사랑 때문에 살아갈 것이다. 이제부터는 그를 사랑했기 때문에 살아갈 것이다. 사랑은 사람을 결국 살아가게 한다. 언제나 사랑은 우리가 아는 ‘사랑’ 이상이다. 사랑은 어떠한 경우에도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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