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irls Be Ambitious!
본 글은 양귀자 소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의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0.
나는 원래 책이나 영화를 보고 별점을 매기지는 않는다. 그 날의 기분이나 컨디션 혹은 상황에 따라 객관적이지 못한 판단을 내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히 이 소설에 4.5라는 별점을 주고 싶다. 결말 때문에 1점 깎고 싶었는데, 그러기엔 이 소설이 시사하고 담고 있는 내용이, 문장 하나하나가 가슴에 박힌다.
모 커뮤니티에서 '페미니즘 입문서'라는 말을 보고 호기심이 생겨 구입한 책인데 입문자가 읽기엔 다소 거칠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든다. 92년도 소설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파격적이고 계몽적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90년대 초반이어서 가능했던 스토리라고 본다. '82년생 김지영'을 보고도 (실제로 봤는지도 모르겠음) 부들거리는 현재에 이런 작품이 나올 수 있을까? 이 책이 출간 당시 베스트셀러에도 오르고 2년 뒤 영화화된 것으로 미루어보아 여성들 뿐만 아니라 남성들도 많이 봤을 텐데 그때의 반응을 알 수 없어 아쉽다. (영화화된 시점도 내가 태어나기 전임)
또한 이 소설의 유일한 오점인 결말 역시 90년대 초반임을 생각하면 아주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지금 나오는 여성 소설들 역시 비슷한 결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 마음에 쏙 드는 작품은 내 또래의 작가들 혹은 내 뒷세대의 작가들에게서 나오지 않을까 싶다.
#1.
앞에서 결말 얘기를 몇 번 했기 때문에 결말에 대해 먼저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 책은 총 7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뒤에 남겨진 기록이 붙어있다. 각 장은 주인공 강민주의 노트에 적힌 말들로 시작한다.
마지막 7장의 제목은 이 책의 제목과 동일하다. 그리고 '모든 금지된 것은 유혹이고 아름다움이다. 죽음조차도.'라는 민주의 노트로 시작한다. 이 문장을 읽자마자 직감했다. 민주는 죽는구나. 누구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게 아니라 자기가 죽는구나. 문제는 어떻게 죽느냐는 거지. 조용히 책장을 넘기다 "용서하세요..." 남기의 말을 보자마자 피가 식었다. 저 toRl 때문에 죽는구나.
민주는 세 가지 실수를 했다. 첫째, 백승하를 사랑하게 된 것. 둘째, 황남기를 사랑한 것. 셋째, 김인수와의 만남을 가진 것.
이 세 남자는 결국 각자의 방식으로 민주를 소멸시켰다. 백승하는 민주가 이성보다 감성을 사용하게 만들었다. 사랑은 그런 것이다. 이 부분이 너무 아쉽다. 민주는 백승하를 남자가 아닌 사람으로 대했다. 그렇기 때문에 본래의 목적을 잃게 된 것이다. 소통은 쌍방향이라 길들여지는 것도 일방적일 수 없다. 백승하를 사랑하게 된 민주는 결코 자신의 계획을 성공할 수 없었다.
민주가 황남기에게 느끼는 사랑은 백승하와는 다르다. 가족에 가까운 사랑이다. 하지만 남기가 민주에게 느끼는 사랑은 그런 게 전혀 아니었지. 이런 남기의 마음을 알고도 사랑으로 품어주었기에 민주는 죽음을 맞이했다. 마지막 페이지에 담긴 남기의 말은 어이가 없다. 무식한 놈이 신념을 가지는 것만큼 무서운 게 없다더니, 남기가 딱 그 짝이다. 하지만 남기가 민주 곁으로 가게 된다면 민주는 몇 번 걷어차 주고 결국은 남기를 받아들일 것이다. 그래서 더욱 아쉽다.
김인수, 전형적인 '외않만조?' 민주는 인연을 끊기 위해 이 인간 같지도 않은 김인수를 만났지만, 결국은 그것이 독이 되어버렸다. 민주는 김인수를 죽였어야 하는데, 아 아깝다. 마지막에 결혼을 전제로 만났다는 개소리까지 너무나도 전형적이다. No means No. 스토킹은 범죄고요, 싫다는데 지속적으로 연락하고 집 앞에 찾아오고 그러지 좀 마세요. 민주는 왜 김인수를 살려뒀을까.
#2.
2021년을 맞아 살면서 처음으로 필사를 시도해보았다. 책을 더럽히는 걸 싫어하는 나에게 필사는 혁명 같았다. 마음에 드는 구절을 따라 쓰고 (너무 많아서 탈이었다) 그때그때 떠오르는 생각들을 쓰고 각 장이 끝날 때마다 느낀 점을 썼다. 지금부터는 필사 공책에 적은 내 생각들을 여기에도 몇 가지 공유하려 한다.
- 절망의 텍스트 (1장)
초판이 92년인데 여전히 비슷한 부분이 많다는 사실이 통탄스럽다. 특히 이혼을 두려워하는 기혼 여성들. 이 시대에는 경제권이 없으니 더욱 종속당하기 쉬웠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것만이 해소의 전부인 그들에게 답답함보다는 연민이 느껴진다.
그래도 한 가지 발전한 게 있다면 '탈코르셋'이다. 물론 이 시대에 코르셋 강요가 덜했음은 알지만, 그래도 자매들은 지금같이 더 어려운 상황에서, 그러니까 절망의 텍스트를 지워버렸다.
냉소적인 주인공 성격 때문에 몰입보다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배울 점이 많다. 잘생기고 다정한 남자에 넘어가지 않고 본질을 보는 통찰력. 계획적이고 규칙적이며 꼼꼼한 삶. '예의'를 중시하는 모습에서 묘하게 나와 닮은 모습.
하지만 너무 냉소적이라 그 모습이 마치 오만하게 느껴진다. 다른 여성들을 밑으로 보는 듯하다. '너넨 가부장제의 노예야.' 하고 선을 긋고는 자신은 저 멀리 날아가버리는 느낌이랄까. 깨인 사람이 우매한 대중을 보는 형상이랄까.
(1장이라 그렇다. 나는 2장부터 강민주를 사랑하게 되었다. 혹자는 그를 사이코패스 혹은 소시오패스라 일컫는데 민주는 공감 능력이 뛰어나고 약자를 위한다. 앞선 반사회적 인격장애는 혐오를 일삼는 그대들이 아닌지?)
- 외줄 타기, 혹은 대결 (3장)
강민주의 자신감이, 자존감이, 똑똑함이, 철두철미함이, 사람을 꿰뚫어 보는 능력이, 그리고 그것을 이용할 줄 아는 것이 좋다. 나는 그래서 그의 오만함까지도 사랑한다.
- 금지된 것들과의 대화 (4장)
이 장을 관통하는 주제는 아무래도 가정 폭력이 아닐까, 싶다. 민주도 말했듯 으레 폭력이란 하면 할수록 죄책감은 옅어지고 재미만 남는다. 그 재미를 남자들만 즐겨왔다는 게 너무 아프다. 애초에 시작되지 않았더라면 결코 알 수 없었을 감정들. 역겹다. 슬프다. 분하다.
남성과 평등해지는 것, 이건 야망이 아니라 했다. 나는 그들의 위에 군림할 것이다. 모든 여성이 그럴 수 있도록 힘쓸 것이다. 동일 노동 동일 임금, 동일 범죄 동일 처벌, 이런 차원을 넘어설 것이다. 그런 게 이상하지 않은 사회가 도래하기를 바란다.
- 여자와 남자 (6장)
강민주는 이성적이고 냉철해 보이지만, 그가 겪은 어린 시절의 폭력은 결국 그가 고통받은 모든 이에게 연민을 가질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3.
이 책을 스무 살이 되기 전 읽었으면 과연 어떻게 생각했을까 궁금하다. 나는 불의를, 특히 나에게 행해지는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격이라 아주 어릴 때부터 여성 혐오에 민감했다. (당시엔 페미니즘이나 여성 혐오라는 단어도 몰랐지만, 한국식 가부장제를 매우 혐오했음) 그러던 중 내가 고3이 되던 해, 메갈의 시초가 된 메르스가 유행했고 새내기가 되던 해, 강남역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나는 내가 지각하기 전부터 언제나 페미니스트였지만, 어쩔 수 없는 가부장제의 노예라 온건한 페미니스트였다. 그러니까, (부끄럽지만) 여혐 안돼요 남혐 안돼요를 외치던 사람이었다. 심지어 강남역 살인사건에 매우 분개했고 페미니스트로 나를 정의 내렸음에도 메갈은 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랬던 내가 래디컬 페미니스트가 된 계기는 어떤 남자 때문이다. 덕분이라고 해야 맞겠지.
스무 살 가을, 대학에서 페미니즘 교양을 들었다. 토론 수업이라 학우들끼리 의견 교환도 활발하고 발표도 자주 했다. 그때 내 인생을 바꾼 사람이 등장한다. 그 남자는 맨 앞에 나와 래디컬 페미니즘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조선을 건국한 건 온건 개혁파가 아닌 급진개혁파였다, 세상이 바뀌기 위해서는 급진적인 개혁이 필요하다, 그 뒤로도 여러 얘기를 했지만, 내 가슴에 꽂힌 저 두 문장은 내 인생을 바꾸기에 충분했다.
리버럴이 옳다, 래디컬이 옳다, 이런 류의 얘기는 아니다. 우리는 같은 목표를 향해 가고 있으며 자신에게 맞는 속도가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를 비난하거나 해서는 안된다. 특히 남들보다 앞서 간다는 이유로는 더더욱. 우리의 적은 내부에 있지 않다.
이 말을 꺼낸 이유는 이 책을 읽고 불편함을 느껴도 괜찮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다. 언젠가는 이해할 날이 올 것이니까. 내가 만약 스무 살이 되기 전 이 책을 읽었다면 나도 그랬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