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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구 Nov 04. 2020

초록색 무테안경

내가 알던 사람, H오빠 이야기

 아저씨,라고 불러도 H오빠는 사람 좋은 웃음 지으며 "나 아저씨 아니야, 오빠라고 불러줘." 할 뿐이었다. 철없는 어린애들의 짓궂은 말도 그냥 웃어넘기곤, 한 번도 소리 지르거나 화내는 모습을 못 봤다. 

 어느 토요일, 교회에서 내 나이 또래 아이들과 놀고 있는데 H오빠가 다가와서 같이 놀자고 했다. 나는 초등학생, 오빠는 지금 생각해보면 20대 초반쯤 되었을까. 오빠는 평소에 안경을 쓰는 사람이 아닌데 그날은 무테안경을 쓰고 왔다. 렌즈가 연한 초록색인 멋쟁이 안경이었다. 그런 안경은 처음 봐서 한 번 써봐도 되냐고 물어보자 H오빠는 흔쾌히 빌려줬다.


 시력이 좋지 않아서 어린 나이에도 나는 도수가 한참 들어간 두꺼운 렌즈 안경을 써야 했다. 두꺼운 렌즈에 빨간색 금속테 안경, 아님 얼굴 위에서 안경의 존재감을 무자비하게 드러내는 까만 뿔테 안경만 써봤던 내가 처음 만난 무테안경. 테 없이 작은 유리알 한 쌍이 작은 금속 연결고리로 이어져 있는 게 다였다. 심지어 렌즈가 초록색.

 존재가 충격적인 초록 안경을 쓰고서 바라본 세상은, 희미했다. 도수가 없는 안경이었기 때문이었다.

 왜곡이 없는 렌즈를 얼굴 위에 올려놨기 때문인지, 아님 안경 본연의 기능이었던 멋이 제대로 작동했는지, 새로운 안경을 쓴 내 얼굴을 보고 H오빠도, 같이 놀던 친구들도 다들 예쁘다고 해줬다. 나는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다음번 안경을 바꾸러 갔을 때, 아빠를 졸라서 은색 반무테 안경을 쟁취했다. 무테 안경은 초등학생인 내가 관리하기는 좀 힘들 거란 말에, 타협해서 얻어낸 결과였다.


 H오빠는 군대에 갔다. 20대 초반 남성의 무난한 선택이었지만, 10대가 아닌 모든 남자는 다 아저씨라고 생각했던 나는, 군대에 갔으니 이제 정말 아저씨인 H오빠에게 편지를 써 보냈다. 분명 별 내용은 없었을 것이다. 군대에서 건강하게 지내고, 잘 훈련받고, 아프지 말고, 남은 얼마간의 시간 뒤에 전역하면 만나자고. 그리고 마지막엔 당연하다는 듯이 '충성!'을 붙였다. 그게 모든 군인의 인사법인 줄 알았다.


 기대한 적도 없는데 H오빠에게서 답장이 왔다. 원래부터 가지런한 필체는 아니지만 애써 또박또박 써 내려간 흔적이 보이는 편지였다. 볼펜 색도 초록이었던 것 같다. H오빠는 자신이 어떤 훈련을 받고 있는지, 누구누구 얼굴이 보고 싶은지, 반복되는 일상 속에 자신이 무엇으로 낙을 삼아 살아가는지 차곡차곡 적어 보냈다. 매점에 가고, 병뚜껑 따기, 딱지 치기 같은 작고 유치한 게임으로 즐거움을 얻는 나날들. 그리고 마지막으론 오빠가 속한 부대의 인사는 '충성' 이 아닌 '진군'이라고 알려줬다. 진군.


 전역을 하고서 H오빠는 교회에 인사를 하러 왔다. 그때 나도 얼핏 얼굴을 봤던 것 같다. 그렇지만 엄마를 따라서 꼬박꼬박 일요일이면 교회를 갔던 나와는 달리, H오빠는 뜨문뜨문 얼굴을 비췄다. 그 사이 나는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됐다. 

 그러다가 가끔은 H오빠가 교회에 오면 어색하게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딱히 예전처럼 같이 노는 건 아니었지만. 어느 날은 오빠가 어떤 모르는 언니를 데리고 교회를 오기도 했다. 얼핏 어른들 얘기를 듣기로는, 아직 식은 올리지 않았지만 오빠는 곧 아빠가 된다고 했던 것 같았다. 

 정말로 H오빠는 아저씨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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