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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구 Jan 07. 2021

짝꿍

내가 알던 사람, B에 대한 이야기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대체 뭘 알길래 싶지만, 초등학교 고학년만 되어도 반에는 하나둘씩 연애를 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2반의 누구랑 우리 반에 누구랑 사귄대. 그런 얘길 들으면 누구와 누구의 얼굴을 각각 떠올려보고, 그 둘이 손을 잡고 같이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 모습이 꽤나 괜찮게 느껴지면, 둘이 잘 어울리네, 역시 사람은 끼리끼리 만나나 봐 라고 말하곤 했다.


 그냥 친구들을 만나서 사귐을 맺고 무탈하게 지내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내가, 단 한 사람을 정해서 그 사람과의 둘만의 친밀한 시간을 만들어 보겠단 생각을 할리가 없었다. 초등학생인 나에게 남자 친구니 여자 친구니 하는 호칭과 관계는 낯간지럽고 부끄러워서 일단 내 인생과는 상관없는 것들이었다. 지금은 왜 그랬나 조금 후회가 되기도 하지만.


 B를 떠올리게 된 건 몇 년 전 TV에서 한참 유행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온 사람의 이름이 B와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꽤나 잘생긴 외모와 나쁘지 않은 실력을 갖고 있었고, 그 프로그램에서 1등을 하진 못했으나 꽤 좋은 성적으로 마무리했다. 얼굴이 뭔가 낯익은 것 같기도 해서 인터넷에 B의 이름을 쳐보기도 했다.

 하지만 TV에 나온 그가 내가 알고 있는 B라는 확증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책장 저 아래 구석에 박아뒀던 초등학교 졸업사진첩까지 꺼내보았다. 그리고 B의 얼굴을 찾았다. 하얗고 멀끔한 얼굴에 얇고 긴 눈, 깔끔하게 자른 스포츠머리, 단정한 옷차림.


 초등학교 6학년이 되어서 처음으로 B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동안 다른 반에서 상위권 성적을 받았던 학생 이랬는데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건 나도 그 애 입장에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나와 같은 무리에 있던 애들은 B가 담임선생님의 편애를 받는다며 B는 마마보이에 범생이고 재미없는 애라고 말했다. 여자 화장실 구석에 창문 아래의 벽에 기대서서 애들과 같이 그 얘길 듣던 나는 고개를 끄덕끄덕 했지만 마음속으론 B의 웃는 얼굴을 떠올려봤다. 그리고 그만큼씩이나 B가 별로인 건 아닌 거 같다고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그런 얘길 했다가 오히려 내가 무슨 얘길 들을까 봐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사실 6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나도 편애했다. 그건 내 무리의 친구들이 종종 나에게 말했듯이 내가 상위권 성적의 학생이었고, 다른 무엇보다 우리 아빠가 담임 선생님처럼 초등학교 선생님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애들의 억측이 아니라는 건 수학여행 같은 델 가서 담임선생님이 굳이 나를 따로 불러서 단 둘이 사진 한 장 찍자고 말한 것 때문에 더 확실해졌다. 그 사진 속의 선생님은 눈과 입의 주름이 깊게 파이도록 한껏 웃고 계셨지만 나는 웃어야 할지 찌푸려야 할지 모르는 애매모호한 표정으로 선생님의 팔에 어깨가 감긴 채로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내가 속해있는 무리 속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어떻게든 선생님의 호의와 친절을 받아선 안 될 편애로 느끼고 애들과 우르르 화장실에 몰려가서 불쾌감을 쥐어짜며 토로하곤 했다.


 담임선생님의 교실 자리 배치 방식에도 애들은 불만이 많았다. 선생님의 말로는 랜덤 배치 프로그램 이라지만 분명 선생님의 의도로 짝이 안 되게 정해둔 조합이 있을 거란 음모론이 있었다.

 어느 날 짝을 바꿨는데 나와 B가 짝꿍이 되었고, 우리 둘은 교탁 바로 앞에 있는 중앙 자리에 앉게 되었다. 수업을 들으며 종종 연필깎이나 지우개 따위를 서로 빌리고 빌려주기도 했다. 쉬는 시간에 자리를 비운 사이에 선생님이 나눠주라고 하신 유인물을 받게 되면 혹여라도 빠트리지 않게 책상에 있던 물건으로 종이를 잘 고정시켜 주기도 했다. 


 B는 다른 또래 남자애들과는 조금 달랐다. 공부를 아주 열심히 하고 잘하는 편의 학생이어서인지 점심시간에 소리 지르며 공을 들고 운동장에 뛰어나갔다 오거나 땀과 먼지 범벅으로 냄새를 풍기며 자리에 앉아있지도 않았다. 늘 단정하게, 얌전하게 큰 사고 없이 학교생활을 했다. 그렇다고 다른 남자애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좀, 다른 세상에서 지내는 것처럼 보였다.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나에게 국어시간은 일종의 자부심이었다. 따로 예습이나 복습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수업 내용을 따라갈 수 있다는 것에 늘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한 번은 선생님이 교과서에 있던 내용에서 좀 더 심화된 내용으로 학습지를 나눠주셨다. 그리고 그 학습지의 내용을 짝꿍과 의논하여 채우라고 하셨다. B와 나는 신나게 서로 이야기했다. 학습지에 있는 이야기만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우리는 선생님이 이제 채점하자고 얘기하기 직전까지도 재미나게 수다를 떨었다. 그리고 빨간 색연필을 들고 서로의 학습지를 바꿔서 답을 맞춰보았다.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다. 거의 대부분의 문제에 빨간색 선이 그어져 있었다. B의 학습지도 내 것과 크게 다르진 않았다.

 도저히 이 상황이 납득이 되지 않아서 나는 학습지를 몇 번이고 다시 읽어봤다. 제시된 지문이 묘사하고 있는 과일이 무엇인지 유추하고 그걸 기반으로 답을 작성하는 문제였다. 정답은 포도였다.


 그 수업이 끝나고서 나는 여자화장실 구석에 서서 애들과 같이 B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마마보이에 범생이에, 재미없는 애라고. 걔 때문에 나도 수업 집중을 못해서 너무 어이없이 문제를 다 틀려버렸다고. 진짜 별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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